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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16) 복음의 정의

이요나 2007. 5. 16. 09:43

(로마서1:16) 복음의 정의

 

(로마서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나는 최근 깨달은 바 바울이 말한 바 너희가 육으로 살면 반듯이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 살면 살 것이라는 말씀을 생활의 신조로 삼고 있습니다. 또한 나는 은혜의 복음을 구원받은 사람들 속에 역사하여 온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악한 영들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로서 얼마나 많은 심령들이 고통을 받으며 또 그 믿음에서 떨어져 나갔음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일이 왜 구원받은 영들에게 역사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고민하며 그 해답을 성경에서 찾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잘못된 가르침이였습니다. 구원을 빙자한 다른복음들, 즉 오직 성경을 올바로 가르치지 않음으로 발생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먼저 주로부터 택하지 않은 자들이 복음의 사역자로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들에게 커다란 화와 저주가 임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 바울이 말하는 바 복음의 지식은 좀더 깊은 의미 속에서 다시 상고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복음은 하나님의 메시지로서 그의 복음이 인간에게 온전하게 이르기까지에는 시간과 공간과 깨달음의 정도와 문화와 지식의 한계가 분포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 복음은 온전한 깨달음 속에 더 능력으로 역사하여 이 땅의 거룩한 백성들에게 권세로 나타날 것을 믿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바울이 말하는 바 복음의 진리를 함께 상고해 보겠습니다.

 

복음이란 헬라어 '유앙겔리온'으로 '좋은 소식'이란 일반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70인역에서 사무엘하 4장 10절과 18장22절을 번역할 때 처음 사용되었습니다만, '복음'이란 말은 이사야 선지자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한 사람'(사40:9)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통치(사52:7) 그리고 성령의 기름부음(사40:9-11) 를 총괄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은 신약에서 가장 완벽한 복음의 성격과 의미를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며 헬라어 '유앙겔리제스타이'를 21회 사용하여 그동안 유대인들의 의식 속에 있던 복음이란 의미와 달리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구연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복음'에 대하여 좀더 명확한 이해를 갖기 위해서는 사복음서는 물론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충분히 음미하여야 합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 된 후에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고 전했습니다"(마24:14, 막13:10) 또 이들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예수님의 장례준비를 위해 향유를 붓던 여인의 일도 말하여 함께 기념하라 기록하였습니다.

 

마가는 "나와 복음을 위하여"(막8:35)라고 기록하여 복음전파를 위임받은 사역자들이 자신의 소유와 생명을 헌신하여야 할 것을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직무는 "하나임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행20:24)이라 하였으며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난 것이다'(롬1:16-17) 증거하였습니다.

 

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갈1:7) 말하여 그 당시 교회 가운데 행하여진 '다른복음'을 경계하고 그러한 자들을 그들을 주관하는 사단과 함께 저주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다른복음'이란 '전혀 복음이 아니다'(NIV)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언급한 '다른 복음'이란 유대주의적 복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할례를 통해서 구원을 온전케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행15장 참조).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죽은 자들에게도 전파되었음을 언급하였으며(벧전4:6,17) 사도요한은 말년에 천사들에 의하여 선포된 '영원한 복음'(계14:6)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아직 온전한 지식에 이르지 못한 우리의 지식보다 훨신 신비로운 지식과 경지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말 것을 언급하였습니다. 여기서 '부끄러워 한다'는 의미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세상이 인정하는 학문과 지식과 철학들에 비교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도들을 통하여 증거 되었고 세상 가운데서 예수는 이단 교주로 정죄되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또 사람들 의식 속에서의 예수는 세상의 학문과 지식을 배우지 않은 사람으로 신적 요소와 관련된 기인으로 부각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유대교나 또 헬라 사람들 간에는 명문가를 따라 배운 신학과 철학을 중시하고 또 사회적으로도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현실적 구조로 인해 그 당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능력 외에 세상에서 추구하는 학문과 명예를 더하려는 욕망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 외에는 알지 않으려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역자들이 세상에서 존경받는 목사의 위치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을 그의 부르심과 말씀의 순종에 두지 않고 유명대학의 학위를 연연하고 교회성장 전략을 위한 지식들 즉, 목회상담과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너무 불필요한 것들을 배우기에 혈안이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 과정씩 얻어내는 학위들로 하여 이력서를 장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미국의 훌러 신학교에는 한국인 목사들이 400명이 등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의 예기로는 훌러 신학교는 한국인 목사로 운영을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우리 40년의 역사 속에 미국 최고의 교회라 불린 갈보리채플이 국가에 인정하는 신학교를 세우지 않음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많은 신학대학들이 국가의 대학교 정책과 규정을 따르는 바람에 얼마나 퇴색되어 가고 있는지 요즘 신학대학들이 스스로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십 년 동안 각 교회를 통하여 수 천 명의 사역자들을 양성한 갈보리채플은 오직 성경전체를 심도 깊게 가르치는 성경학교만 있을 뿐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10년 동안 갈보리채플 사역을 하면서 많은 사역자들이 새롭게 성경공부 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그들은 나는 무슨 신학대학교와 대학원 과정을 마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여 신학교에서 성경을 가리키는 것 보았습니까? 신학교에서는 신학을 가르칠 뿐입니다. 왜 사역자들이 성경만을 공부하는 것을 부끄러워 할까요?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에게 상담학이나 마케팅 전략이나 설교학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는 깨달은 마음으로 주께서 성경에 기록한 모든 말씀이 필요할 따름입니다.

 

두번째로 바울은 복음의 대상을 언급하여 '모든 사람' 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가장 기초적이고 매우 중요한 구원의 교리이기도 합니다. 어떤 교파에서는 구원의 원리를 말하여 이 땅에 구원받을 사람들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칼빈이즘의 5대강령 속에 명시된 예정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만약 인간의 구원이 예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복음을 전할 필요도 없습니다. 설혹 예정되어 있다 하드라도 한계 속의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예정을 단정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월권행위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대상은 '모든 사람'입니다.

 

세번째로 바울은 복음의 조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이 땅의 죄인 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로 주신 복음은 그 복음을 들은 사람에게 선택의 책임이 있습니다. 복음이 그에게 전파 되었는데도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의 영혼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고 또 주의 날에 그는 그 책임에 대한 판단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택적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권면과 책망과 가르침으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지만은 인간의 의지를 꺽어서 자기의 임의대로 하시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굴욕적 구원을 얻게 될까요? 이처럼 하나님은 구원에 있어서도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계십니다.

 

네번째로 바울은 '구원'을 언급하였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결과를 말한 것입니다. 이 구원에 관한 것은 아직도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또 많은 크리스챤 중에서도 '내가 정령 구원을 받은 것인가?'라는 의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아직 거듭남의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 속에 구원의 증거를 구하는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노린 어떤 교파에서는 '회개의 단계' '구원의 확신'이라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고도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 어느 한 구절을 끄집어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한 연약한 심령들에게 당신은 이 말씀으로 구원을 얻었다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구원의 증거를 눈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여 이것은 오직 믿음의 세계 속에 있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믿음에 대하여는 다음에 다시 시간을 할애하여 언급하겠습니다만 하나님은 믿음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구원의 확신은 믿음을 통하여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치 자기네들만이 구원이 있는 것처럼 구원의 확신을 보이라는 것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앞에 올무를 놓는 사단의 책략입니다. 유다는 종말의 성도를 향하여 '일반적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유다서1:3) 권하고 있습니다.

 

다섯번째로 바울은 구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란 '총체적'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가운데 나타난 성령의 은사만을 뜻한 것이 아니라 창조자이시며 권능자이시며 구속자이시며 인도자 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권능을 말한 것입니다. 이 능력에 대하여 인간은 그 량과 질을 감히 추측할 수도 언급할 수 조차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내랴 선포한 것입니다.

 

여섯번째로 바울은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계시적 속성을 언급한 것입니다. 복음은 원초적으로 하나님의 신적요소로서 택하신 사람들에게 계시된 것으로 이 땅에서의 복음의 역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한적인 한계를 극복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가 세대주의 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세대별로 나누어진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진리는 하나이고 또 '정하신 한 날'도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 계시의 비밀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 앞에 종말은 항상 유효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더디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신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종말이 있음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그 지식을 통하여 각 시대의 사람들로 구원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영과 육의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정결케 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기록하였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는 바울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첫째'라는 수사를 달은 것에 의심을 가질까 모르겠습니다만 원래 하나님의 기쁜 소식은 유대인에게 먼저 들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말씀과 율법과 예배 그리고 또 육신적으로는 그리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면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라는 말씀은 무슨 까닭인가요? 바울은 왜 모든 이방인이라 하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헬라인'이란 성경적 의미를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헬라의 원어는 '야완'으로 야벳의 아들에 그 기원 두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남부 발칸반도를 중심으로 정치와 문화와 철학을 발전 시켜왔습니다,

 

이들의 역사는 고대왕국 이집트와 앗수르와 페르시야의 정치적 격전 속에서 패권을 다투며 세기의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에 이르러 헬라제국으로 통일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헬라의 문명과 문화와 철학과 학문은 전세계의 모든 최상의 것들을 통합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현대국가의 기틀이 되어 온 것입니다.

 

물론 바울의 시대에는 로마시대로서 모든 나라가 로마의 지배 가운데 있었지만 로마는 새로운 문명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핼라문명을 토대로 합리적인 정치체제를 발전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지배 속에 있었지만 삶의 근원은 헬라의 문화와 철학과 사상 속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의미로 바울은 헬라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또한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지만 예루살렘의 박해와 함께 헬라지역으로 전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