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로마서강해

(로마서1:9) 최상의 길

이요나 2007. 5. 16. 09:46

(로마서1:9) 최상의 길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롬1:9-10)

 

바울은 로마서 1장13절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을 하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롬1:13). 이러한 강조법은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자신의 의중을 설명하기 위하여 자주 사용하던 어법이다.

 

그의 교회들이 이스라엘 역사에 대하여 알기를 원하였을 때에도(고전10:1) 또 유대인의 전인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롬11:25)과 성령 은사(고전12:1)에 대하여 알기를 원하였을 때에도 그리고 교회의 휴거(살전4:13) 에 대하여 가르칠 때에도 사용된 어법이다. 따라서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했던 일은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주께서 주신 그의 절대적 사명과 관계가 있음을 예측할 수 있다.

 

우리가 이미 다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은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세우신 사도이다. 주께서 바울을 세우실 때 아나니아에게 "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그릇이라"(행8:15)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바울은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일생 동안 자신의 생명을 귀히 여기지 않고 오직 복음을 위하여 분신쇄골 하였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도전을 받아왔다. 바울이 유대인들로부터 도전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빼어내는 격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이방 도시에는 이미 예루살렘의 유대교와 깊은 조직적 관계를 기진 유대인들이 회당을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자연히 신학적 교리의 마찰과 교권의 종주권 행사에 따른 세력 다툼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오랜 세월 이러한 영적 다툼 속에서 민족적 애환과 갈등을 겪어야 했던 바울은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는 결국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복음의 주권을 탈환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사실 복음의 종주권으로 말하면 이미 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주권을 탈환하셨고 오순절 성령의 강림을 통하여 친히 세우신 그리스도의 교회에 성령의 능력으로 확증되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이 땅에서의 복음은 오직 택한 자들을 통한 전도의 매개체 뿐이었다. 이것은 태초로부터 이 땅에 놓으신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질서이고 예정이다. 이를 위하여 주께서는 이미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땅에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셨다.

 

성령의 능력 가운데 사도들의 열성적인 헌신에도 좀처럼 변하지 않는 유대인의 고집을 목도한 바울은 차라리 자기의 생명을 던져서라도 불협화음에 처한 예루살렘의 복음을 완성시키려 결심을 한다. 바울이 그처럼 결심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와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 유대교의 열심당원으로 공회의 한 사람이었고, 그동안 이방에서의 복음의 능력으로 보건 데 만약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변증을 한다면 유대인 동료들도 자기와 같이 회심을 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성령은 그의 동역자들에 장차 예루살렘에서 겪어야 할 바울의 고통이 있음을 알게 하심으로 바울의 달려갈 길을 제지하였다. 이 때 바울은 그의 동역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3-24) 말함으로 더 이상 자신의 뜻을 막지 못하게 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성령의 만류를 제치고 예루살렘에 올라와 주의 도우심을 구하는 바울에게 주께서 친히 나타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행22:18) 말씀하셨다. 그러나 바울은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을 그들도 아나이다"(행22:19-20)답하였다. 과연 그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황소 고집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태도에 대하여 그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징계를 받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는 일에 대하여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행20:22) 기록함으로써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도 성령의 강권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반된 기록들은 이 글을 읽은 후세의 우리를 매우 당혹하게 한다.

 

하나님의 기준은 무엇인지, 또 왜 같은 성령께서 동일한 마음을 주시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아닌 바울이 말한 것이었다. 그러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아야 할 것을 전하신 것도 성령이요 또한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도 성령의 매임이라면 과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성령의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에 올라간다는 바울의 애절한 고백과 자신의 의지를 바꾸려 하던 동료들에게 오히려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는 바울의 말과 그리고 그의 결심을 바꿀 수 없음을 깨달은 제자들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행21:14) 라는 기록을 통하여, 바울은 성령의 뜻을 거슬린 것이 아니라 바울을 사랑하시는 주께서 그가 당하여야 할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하시어 그의 믿음이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게 하시려는 순교의 계시였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생명과 순교를 사이에 두고 선택하여야 할 최종적 테스트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의 사역 속에서 이와 같은 똑같은 일들이 놓인다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만약 바울이 그 길을 포기하였어도 주께서는 그를 책망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주께서 이미 성령으로 올라가지 말 것을 성령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선지자는 예루살렘 밖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따라 예루살렘에서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따라간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사역을 마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달려 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순교를 두려워 한다면 그는 더이상 그 어디에서도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죽음을 향한 바울의 의로운 선택에 의하여 바울을 향하여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모두 성취하게 됨을 알게 된다.

 

바울은 성령이 미리 말하심을 알고도 그것을 부인하고 올라가므로 예수님과 같이 공회에 잡혀 이방인의 손에 넘겨져 버리고 만다. 바울의 선택은 비록 2년간 옥살이를 하면서 수모와 조롱과 압박을 받게 되지만 그는 유대인 공회의 제사장들과 서기관과 장로들 그리고 유대의 총독, 벨릭스와 베스도 그리고 아그립바 왕 앞에 복음의 진리와 장차 올 심판을 증거하고 결국 그의 복음의 최종 결산지 로마에 이르러 그의 사명을 완성하게 된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대하면서 나는 과연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나아갈 좋은 길을 알고 있는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