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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16) 구원의 확신

이요나 2007. 5. 16. 09:44

(로마서1:16) 구원의 확신

 

(로마서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제가 신약 속에서 가장 좋아하는 성구를 말하라면 먼저 요한복음 3장16절로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오늘 바울이 말한 로마서 1장 16절로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정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힘이 솟아 오름을 느낍니다. 사도 요한이 3장16절에서 복음의 진리를 선포한 것이라면 바울 사도는 여기서 복음의 원리를 설명한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이 작은 구절 속에는 정말로 놀라운 복음의 원리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원에 관한 일들은 우리 교회사 속에서 피를 보는 아픔을 통하여 오랜 세월 동안 정립되어 온 교리 중의 하나입니다만 아직도 각 교파간에 다른 입장들을 보이고 있습니다. 저의 목적은 어느 특정교단의 교리를 비방하거나 그것을 다루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미 코스타메사 갈보리채플 척 스미스 목사님께서 구원에 관한 갈보리채플의 입장을 갈보리채플의 특징이란 저서에서 밝혔고 또 다른 교리들에 대하여도 책자를 통하여 언급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함께 부름을 받은 우리는 척 스미스 목사님의 목회철학을 따르며 그의 가르침을 통하여 성장하여 왔습니다. 우리는 어느 교단들의 소속처럼 어떤 교리적 신조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또 동일한 지식을 공유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가 이렇게 작은 지식과 견문을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론에 대한 글을 쓰게 된 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지난번 로마서 강의를 하면서 세부적으로 깊게 다루지 못했던 믿음과 구원에 대하여 좀더 심도 깊게 상고하며 또 이에 대한 갈보리채플의 견해와 또 나의 신앙적 입장을 밝혀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 하나는 최근 어떤 형제들이 최근 우리 서울 갈보리채플의 가르침을 들어 잘못된 가르침이라 말하며 다른 복음이라 말하며 분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직 그렇게 말하는 그 형제들을 내 삶의 호흡에 두고 있으므로 나를 향한 개인적인 분노를 참고 인내할 것이지만 나의 염려는 그들이 지나쳐 불의로 진리를 거슬려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할까 두려워 주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형제들은 남보다 강한 믿음의 열정과 복음을 향한 비전을 갖고는 있지만 조급한 심령이 이끌려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하심을 인내하지 못하고 교만하여져서 부분적으로 보고 감정으로 감각된 말씀들을 마치 성령의 알게 하심처럼 착각하여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 감히 진리가 아닌 것을 주장하는 자들 가운데 이끌리어 스스로 패역의 길을 걷는지라, 그들을 진리의 책에 기록된 말씀으로 책망하여 주께 순복하고 믿음의 길로 돌아 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들은 한 때 갈보리채플 제자되기를 기뻐하였던 아이들로 주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오직 진리의 말씀을 들으며 함께 생활하던 믿음의 아들들입니다. 그들은 나와 함께 사역의 비전을 갖고 말씀을 사모하며, 말씀의 능력으로 거룩한 삶을 성취하기를 소망하여 하루하루 근신된 삶을 살던 아이들입니다.

 

내가 오늘날 이처럼 그 아이들로 인하여 고통하는 것은 나는 그 아이들에게 있어 주의 날이 이르기까지 빚진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는 지난날 미처 깨닫지 못했던 믿음의 행로 속에 연루된 모순된 행각들을 돌아 보며 심히 부끄러워하고 그 아픔으로 통곡하고 있습니다.

 

그 일로 하여 나는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멍에를 걸머지고 오직 주의 긍휼하심을 구하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내게 있어서 그 멸망의 기억들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미스테리입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른 나의 깨달음은 주를 믿은 영혼은 그 누구도 주의 허락 없이는 멸망받지 않는다는 확신과 또 그 누구도 정죄할 수 없다는 신념에 있습니다.

 

만약 누가 내게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정의를 묻는다면 나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한계 속의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그 누구도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는 하나님의 계시의 비밀로서 오직 그의 말씀과 성령의 가르치심 속에서 믿음의 경륜 가운데 한가닥씩 깨우쳐 가는 진리의 세계"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사실 나는 오랜 세월 예수를 믿으면서도 또한 신학교를 다니면서도 죄가 무엇인지 , 의가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거룩함과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 채, 성도라는 신분으로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육신의 노예로 살아 왔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또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이나 구원의 확신이 없었다던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분명히 구원을 받았고 또 구원의 확신 또한 갖고 있었습니다. 다만 지금 생각하니 그 당시 나의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하신 은혜 가운데 있었을 뿐 온전한 구원의 지식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그에 대한 전문 지식을 알지는 못해도 확실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과 또 그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성품들을 면밀하게 아는 것입니다. 한 예로 우리는 나를 낳아주신 분이 나의 아버지이며 어머니인 것을 알고 있으며 그분들은 나를 사랑하고 나를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 아버지의 성품이나 그에 관한 지식을 갖지 않아도 알고 있는 인식이며 확신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오래 살면서 그의 성품과 사랑의 역사와 인내하심과 권고와 책망을 받으며 우리는 아버지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그 앎으로 하여 우리는 부모에 대한 사랑과 은혜와 존경심을 더해 갑니다. 이 때 우리는 나는 아버지를 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주를 영접하고 주의 자녀가 되었을 때 우리는 그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또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하여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알고 있으며 또 확신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사실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우리의 마음에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앞에 놓인 믿음의 세계와 현실 세계의 갈등입니다.

 

만약 내가 이 일반적인 구원의 믿음을 통하여 예수를 믿어 이미 그의 나라로 들어갔다면 나는 아무런 꺼리낌도 없이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요 하늘의 시민권자로 그곳에 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육신 가운데 처한 나의 믿음은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하나님의 첫사랑과 은혜를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나는 아직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실입니다.

 

나의 믿음은 내 안의 성령의 탄식하심과 관계없이 세상과 믿음의 세계를 적당이 합리화 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여 나는 교회를 통하여 크리스챤이라는 신분을 취득하였고 또 세상에서는 세상의 한 시민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내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나는 이력서의 종교난에 기독교라고 기재하고 그들이 말하는 일요일을 주일로 섬기며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일 뿐입니다.

 

그 누구도 이 때의 나의 영이 거듭나지 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분명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내가 만약 거듭나지 않았다면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다윗의 자손 예수를 나의 주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를 주라고 할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바라고 감사하며 찬양과 기도를 하는 그 이유는 형식이 아니었고 내 안에 계신 그의 성령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나는 교회라는 것이 자랑스러웠고 내 인생의 가장 위대한 발견이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당시 내가 죽을 지언정 그 무엇과도 나의 자녀 된 신분을 바꿀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나는 그 당시 세상에서 하던 사업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또 육신이 즐기던 습성들 즉 술과 담배와 오락과 도박과 또 성적행위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변하고 달라진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이 분노하고, 다투며, 시기하고 질투하며 교만하였습니다. 참으로 끊어지지 않는 세상의 사슬이요 멍에였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러한 육신의 일들이 해결되었을 때 예수를 믿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매주 일요일이면 성도로 돌아가 교회에 가서 찬송을 하고 기도도 하며 또 때로는 눈물로 회개를 하며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교회서 준 나의 직분에 맞게 헌금을 하며 늘 그들의 모임에 출석하였고 또 성경공부 모임을 주관하기도 하였습니다. 의로운 모습과 세상의 모습이 내 삶 속에서 함께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한 몸을 가지고 두 세계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나는 구역장, 조장, 집사의 직책으로 불리며 또 한 교회의 선교회를 이끌어 가는 리더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내 삶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주께서 나를 암흑 세계를 위한 전도자로 부름을 받은 것으로 착각하여 담임 목사의 권고를 받아 신학교에 입학을 하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해를 위하여 예수 믿기 전의 나의 소개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내가 처음 예수를 영접하였을 때 나는 정말 영육간에 피할 곳이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몰골 조차 바라볼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내가 예수를 영접하기 전 불과 일년 전까지 나는 파괴된 내 영혼의 회복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하신 어머니의 혼백을 위로하기 위해 승려가 되기를 결심하고 산간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산간대처를 돌며 부처를 찾아 불공을 드려도 부처는 내게 아무 대답도 없었고 내 영혼은 아무런 만족을 얻지 못한 채 더욱 패괴한 몰골이 되어 세상으로 다시 돌아 왔습니다. 그 당시 나는 또 내 인생의 전력을 알고자 동양철학에 심취되어 있었습니다. 윤회설과 운명론과 사주와 주역에 흥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 후 세상 친구들의 도움으로 아주 작은 카페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마음의 안정을 하지 못하여 줄담배를 물고 살았고 손에는 염주를 돌리며 불경을 외웠습니다.

 

사실 내 방안에는 작은 불상까지 놓여 있었고 아침 저녁으로 향을 꼽으며 절을 하였었습니다. 나는 내가 왜 그 일을 하는 지 조차 모르며 다만 내 어머니의 영혼을 위로하고 또 부처가 나를 도와 줄 것을 바랬을 뿐입니다. 그러나 내 영혼은 행방을 잃고 탈출구 조차 찾지 못한 채 하루하루의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동양철학에 심취했던 나에게 자신의 운명을 묻던 3류 여가수가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그녀는 일본에 가서 야쿠사 조직들에게 걸려 고생만 하다가 그곳에서 예수를 믿고 천신만고 끝에 귀국하여 몰골이 패괴한 나를 찾아 왔습니다. 사실 나는 그녀가 일본에 떠기 전에 앞으로 3년 후에 당신은 새로운 사람이 되어 나를 찾을 것이다 말한 일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희안한 일입니다)

 

호텔 카피 숍에서 3년 만에 커피잔을 마주하고 앉은 그녀는, 한 손으로 염주를 돌리며 연신 담배 불을 붙여내는 나를 바라보며 "주께서 내게 너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하시더라" 말하였습니다. 그녀는 비행기 안에서 기도 하던 중 주께서 내게 가서 예수의 이름을 전하라고 하셨다 하였습니다. "주께서 너에게 예수의 이름을 전하라"고 명하셨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나의 머리에 커다란 돌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그 순간 담배 불을 끄고 염주를 내려 놓으며 그 분이 내 이름을 어떻게 아셨단 말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않될 것이라 주께 대답하였지만 주께서 내가 이미 그에게 나에 이름을 주었은 즉 너는 가서 내가 보내서 왔다고만 하면 될 것이라 하셨다 증언하였습니다.

 

그 순간 희안하게도 나는 그녀 말이 믿어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분명한 목소리로 주께서 나를 부르셨다면 나는 예수를 믿겠노라고 답하였습니다. 그 순간 나의 눈에서는 폭포수 같은 눈물이 쏟아지며 "나는 죽음에서 살아나신 분을 믿을거야"라고 되뇌이고 있었습니다. 내 안에서 세상이 뒤바뀌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그녀가 일본으로 들어간 지 꼭 3년이 된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내가 그 날을 기억하는 것은 그날이 미국 독립 기념일인 7월4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 이름을 처음 발견한 것은 국민학교 4학년 때 지나가던 미군트럭에서 던져준 아동용 쪽복음이었습니다. 나의 기억 속에는 마리아 품에 안긴 아기예수와 동방박사의 경배가 그려진 누가복음이었습니다. 그 후 중학교 시절 서울로 올라와 형수 집에 있으면서 나는 형수와 함께 얼마간 교회를 다녔습니다, 나는 그 당시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성경도 없었고 또 성경을 볼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그 당시 내 믿음은 주일에 교회 가서 찬송하는 기쁨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서른 살이 된 지금 그의 부르심 가운데 예수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그가 나의 구속주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스스로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처럼 나의 죄를 인식해 본 일도 또 그처럼 많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해 본일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인도를 따라 여의도 순복음 교회를 다녔습니다. 주일이 기다려지고 늘 성경을 보며 찬양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내가 주를 믿은 순간부터 평안과 기쁨이 가슴에서 솟아 났습니다. 나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하였고 내 일생을 그에게 송두리 채 드려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하나님의 나라와 아주 먼 거리에 있었습니다. 나는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고 담배 또한 끊어내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 생활을 청산할 수 없는 현실에 놓였었고 또 그것을 정리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제가 주를 영접하고 말씀과 주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는 그 삶 속에서 그 때까지 빚 투성이로 전전긍긍하던 술집이 불같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이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수년 동안 빚 투성이가 되어 오히려 망해야 할 술집이었는데 예수를 믿는 날부터 불일 듯 일어 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이해할 수 없는 미스테리입니다)

 

교회 전도사나 성도들은 내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박수를 치며 나를 어둠의 전도자로 부르신 증거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매주 금요일 술집에서 기도모임을 갖고 또 한 달이 한번씩은 기도원에 올라 가기도 하였습니다. 술집은 날로 번창하여 제가 교회를 다닌 지 6개월만에 50평되는 클럽으로 확장하였고 또 아파트도 작만하였으며 종업원도 50명이 되어 거대한 클럽으로 바뀌었습니다.

 

클럽이 확장되자 우리 클럽은 매주 그 지역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제공되었고 매주 담임목사가 나와서 예배를 인도하고 또 우리 종업원들은 모두 함께 교회에 등록을 하여 내가 다니던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 명물로 불리웠습니다. 그후 3년 동안 나는 3개의 클럽을 확장하고 또 일본에까지 댄서들을 송출하여 일약 유흥가의 떠 오르는 별이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때 나는 열성적으로 예수를 믿고 있었다는 것이고 내 안에는 사모함과 갈급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날로 달라지는 것은 세상에서 내가 누리는 지위만큼 교회에서도 내 신분적 지위가 상승되고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믿음의 척도로 인정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교회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한국교회의 믿음의 척도는 교회를 향한 헌금과 봉사와 직분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나의 믿음은 교만해져서 교회에서 더욱 큰 인정을 받는 것이 곧 영적 축복이며 또 그 축복은 내 사업의 축복으로 이어진다는 아전인수격의 믿음으로 변질되어 내 믿음생활은 말씀의 균형을 잃고 무성한 모습을 자랑하기 위한 광적 신앙으로 변해갔습니다. 전도와 많은 헌금 그리고 교회의 봉사를 외치며 마치 김정일이를 추종하는 사람들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나는 그 당시 내가 다니던 교회가 부르짖던 삼박자 구원 원리인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리라"는 믿음의 신조를 신봉하며 늘 큰소리로 외치며 기도하고 전진에 전진을 거듭하였습니다. 오직 내가 알아야 할 성경 구절은 요한3서 1장2절 뿐이었습니다. 오늘도 그러한 사람들을 보면 지나간 나의 수치가 되살아나 통분하게 됩니다.

 

정말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입니다. 차라리 믿지 않는 것이 더 나았을 것 같은 모습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있었고 나의 믿음과 행위에 전혀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광분한 유대인들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 때의 슬픔을 지워버릴 수 없습니다. 주께서 구원하신 그 고귀한 믿음의 본질이 그처럼 변질 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믿음의 역사 속의 한 페이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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