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청년의 이야기
며칠전 칼럼가를 거닐다가 어느 청년이 쓴 칼럼을 읽다가 울어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아버지에 대하여 썼습니다. 그 제목이 "나는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였습니다.
그 청년의 글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간질병 환자였습니다. 어느날 그의 아버지는 전도지를 들고 길에서 전도하다가 갑자기 딩굴기 시작했습니다. 시장 통에서 장사하는 옆집 할머니가 달려와 전해 준 말을 듣고 단숨에 달려간 그 아이의 입에서는 "아빠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소리 없이 터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글을 읽고 얼마를 울어야 했던지..그날 나는 그 글로하여 채면이고 뭐고 차릴 정신이 없을 만큼 울었습니다. 내 가슴속에서 내 아버지의 진정한 사랑이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에 불어 온 근대화 바람은 우리로 하여 현대를 살아가기 위한 방법과 수단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러나 먹고 살아가야 하는 투쟁은 우리 삶 속에서 진정한 삶의 근본 "사랑"을 뺏앗아가고 말았습니다. 사랑에 대한 개념은 있는데 사랑의 삶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인간의 삶은 진정 무엇을 추구하는 것인가요? 자기의 이상을 달성하는 것일까요? 명예인가요? 아니 물질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어느 시점에 와서 자신을 돌아 볼 때 우리의 결론은 결국 허무에 도달하고 맙니다.
우리는 물질세상 속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찾아 헤메는 가운데 진정한 삶의 목적과 근본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생은 이 땅 위에 사는 동안은 시작과 끝이라는 일직선상의 한정된 시간과 공간 속의 삶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논리적인 공식이 아니고 나의 의지와 조물주의 섭리에 의하여 시작되고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긍국적 목적은 삶을 영유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 아니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사랑의 완성에 있습니다.
이제 다음 밀레니엄에는 우리 인간의 형상 속에 내재한 삶의 근본적 사랑이 우리 삶 가운데 회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더우기 지난 세기 동안 우리는 타민족으로부터 그리고 동족상쟁으로 또한 국가 지도자들로부터 우리 안에 내재된 근본적 사랑이 훼방당하고 봉쇄당하며 유린당해 왔습니다. 지난 세월 우리의 상처를 모두 털어버리고 화해와 용서로 다가가서 우리 안에 내재한 사랑의 진실을 회복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성취될 것을 믿고 나의 인생 경륜 속에서 깨달은 "사랑의 이야기"를 털어 놓으려 합니다.
나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내 기억에는 왜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기억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석꾼의 아들로 두번의 결혼을 하신 아버지는 일곱의 아들에 딸 하나를 두셨습니다. 그 중에 나는 두번째 부인인 어머니의 장남 그러니까 아버지의 5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꼿꼿한 어머니 밑에서 장남으로 자라났습니다.
이미 어머니가 시집이라고 오셨을 때는 이미 아버지가 노름으로 그 많은 땅을 달 팔아 드셨고 어머니는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 우리를 키웠습니다. 제 기억에는 어머니는 안해 본 장사가 없으신 것 같았습니다. 닷새마다 열리는 장터 한모퉁이에서 술빵(막걸리로 부풀려서 만든 빵)을 쪄서 파시기도 하셨고 장릉산 유원지 철이면 음료수 자판을 벌리시기도 했습니다. 또한 동네 어귀 빈집을 얻어 보신탕 집을 열기도 하셨고, 그러한 틈에도 인근의 혼수감은 도맡아서 짓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그러한 노력으로 만석꾼이 아들들보다 더 깔끔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버지가 들어오는 날이면 불도 지피지 않은 냉방으로 쫓겨나서 안방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귀를 막고 있어야 했습니다. 싸움은 늘 어머니의 일방적이 승리로 끝났습니다만 난 그 때마다 울 아버지가 불쌍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훤출한 키에 아주 잘생긴 분이셨고 근동에서 온유한 인품으로 칭송이 자자하신 분이셨으며 내 어머니는 그러한 아버지를 늘 깔끔한 한복으로 지어 입히셨습니다. 아버지의 밥상은 늘 겨란 찜과 생선토막을 올리셨고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토된장찌개를 빠트리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진짜로 아버지를 미워하시는 것인지 사랑하시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을 본 일이 한번도 없습니다. 일이라는 것은 새벽부터 밤까지 어머니가 도맡아 하셨지요. 아버지는 밤이 새도록 바둑을 두시던가 골패장기를 두러 다니시느라고 늘 집을 비우셨습니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어머니가 시집오셔서 나를 낳을 때까지 아버지는 하루 밤에 땅 한 마지기씩 팔아 드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빈털털이가 된 지금은 바둑으로 소일하고 계시고 삼남매와 함께 먹구 살기에 힘이 빠진 어머니는 아버지를 보기만 하면 싸우시는 것이였습니다.
내 기억에는 어머니의 푸념을 들으시며 한마디도 말못하고 슬그머니 방을 나가시는 아버지의 멀쑥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울이라는 곳에 이사 오시면서 어머니는 아버지를 시골 큰 형님 댁에 떨치고 우리 형제들만 데리고 이사오셨습니다. 단칸방인 이유도 있었지만 어머니에게는 아무것도 하시지 않는 아버지가 너무 야속하고 화가 나시는 모양이셨습니다.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정녕 사랑이 없으신 잘못만난 부부인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싸우셨고 이제라도 헤여진 것은 어쩌면 잘 된 것이라고까지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내 나이 서른이 다 되도록 일할 곳을 찾지 못하고 거리를 방황을 하던 나를 두고 세상을 떠나시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사시는 시골 산모퉁 자락에 가셔서 누우셨습니다. 차마 마지막 숨을 아버지 앞에 보이고 싶지 않으셔서인지 아버지가 사시는 집을 멀리 바라보는 산모퉁이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나는 그날 밤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을 비비며 어쩔 줄 모르고 우시는 칠십세의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내 아버지는 그 후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의 산소를 지키셨습니다. 지금은 강화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산턱에 나란히 누어 천년의 사랑에 들어 계시지만 사실 나는 우리의 어려서 늘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면서 난 커서 결혼하지 않을꺼야 하고 다짐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 나는 오십이 넘었습니다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국 다음천년의 영원한 사랑으로 입실하셨습니다.
이제 내 나이 오십이 넘어 아버지의 나이가 된 후에야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발견하였습니다. 만석꾼이의 아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나약하게 살아 오셨던 아버지와 억척같이 자식들과 함께 살아 보려던 어머니.. 어린 자식들 눈에 늘 다투시던 그들에게는 진정한 사랑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었지만 서로를 지키는 애뜻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사랑을 지속할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환경과 자식을 향한 인간의 욕망과 삶의 분노가 있었을 뿐이지요.
목사가 된 후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카페 사랑을 배우면서 나는 과연 자식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내 어미의 사랑이 있는 것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한 나는 자기를 뿌리치고 떠난 여인의 산소를 지킬만한 아버지의 사랑이 있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두 분의 순애보가 오십이 넘어서 다음천년을 바라보는 이 못난 아들의 가슴에 살아서 통곡을 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여 내 어머니여 당신은 사랑이셨습니다!
1999년 12월27일 통곡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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