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의 문제는 참으로 극복하기도 쉽지 않고 또한 인정하기 조차 싫은 정말 어처구니 없는 악의 사슬이다. 질병이면 치료 받을 수 있고 불치라면 대처의 방법을 강구해도 되겠지만 성경은 동성애를 죄의 문제로 정죄를 하고 있기 때문에 믿는 동성애자들의 고뇌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렵다. 누가 뭐라고 해도 동성애자들에게 있어 동성애 성향은 타고 날 때 입고 나온 천형(天刑)과 같아 몹시 불쾌하고 고통스럽다. 동성애가 죄인지 모르던 시절에도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이 들어날까봐 괴로워해야 하고 부모나 친구나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아픔을 들어 낼 수 조차 없다. 또한 어쩌다 자신의 성향이 은연 중에 들어나게 되면 그것은 곧 살아 있는 지옥을 걷는 기분이다. 그로 하여 동성애자들은 인간관계에 있어 소극적이고 또 이중적 인격을 갖고 교제의 연결고리를 형성하게 된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처구니 없고, 무슨 이런 더러운 것이 내 인생을 잡고 있는 것인지 정말 생각할 수록 분통이 터지고 어쩔 수 없이 이중 인격자가 되어 두 개의 세계를 살아야 하니 스스로 자신을 저주하고 또 미워 한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이런 인생을 허락한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때로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나를 이런 모습으로 낳으신 부모님도 원망스럽고 내가 자라온 모든 환경조차 저주스럽다. 어디론가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도망가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동성애자는 그 어디도 도망갈 곳이 없으며 그 어느 세상에도 동성애를 받아주지도 인정을 해주는 곳 또한 없다. 물론 세상이 좋아져서 동성애자 인권이 보호되고 트랜스젠더로 살아갈 기회까지 열렸지만 사실 순수한 동성애자들은 트랜스젠더로 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것은 동성연애자가 선택한 최후의 말로일 뿐이다.
더욱이 온건한 성격을 갖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고통은 믿지 않는 자보다 더욱 심각하다. 차라리 막 살 수 있는 환경 속에서 동성애자로 컴잉아웃을 하고 여장을 하고 거리로 뛰쳐 나가 하늘을 향하여 나는 나야 하고 소리치며 살고 싶은 욕망이 들끓고 있지만 나를 지키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나의 존재를 그렇게 망쳐버리고 싶지는 않다. 한 남자로 또는 한 여자로 아름다운 이성교제를 하며 부모형제 친구들과 스스럼 없이 대화하며 숨김없는 양심을 표현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도 육체는 이성과의 사랑을 거부하고 동성과의 사랑을 요구하며 밤이면 밤, 낮이면 낮, 내 삶의 공허한 사슬을 드리우고 목을 옥죄이고 있다.
바울은 이 고통을 말하여 “이제는 내가 원치 않는 그것을 하면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7-20) 통분하였으며 또한 그는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는 또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도다”(롬7:22) 울부짖었다. 그러나 바울은 동성애자가 아니다. 그는 죄성의 사슬을 끊어내지 못하는 인간의 고뇌를 서술하였을 뿐이다. 평범한 사람도 죄를 갈구하는 육체에 대하여 통분을 하는데 천형처럼 동성애의 사슬을 드리우고 사는 이 사람들의 고통이야 말하여 무엇 할 것인가?
그러면 아무런 방법이 없는 것일까? 그렇다. 인생으로는 또한 세상의 법으로는 아무 방법도 없으며 하나님께서 의롭게 살아가라고 주신 율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 율법은 우리가 행하는 죄들을 더욱 죄 되게 하여 우리가 죄인임을 알게 하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우리의 범죄를 끊어내지 못한다. 그러니 바울이 통곡하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고백한 것이다. 이처럼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하여 고통 받아야 하며 결국 죄로 인하여 사망으로 내려가야 하는 존재다. 이것이 하나님을 발견한 사람들의 깨달음이다.
그러나 율법이 우리의 범죄를 죄로 정죄한 것은 그 정죄를 통하여 죄를 깨닫고 우리의 양심으로 하여 구원자를 찾아 갈망케 하여 그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기 위함이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능히 모든 죄의 사슬을 십자가에 못박고 모든 인류의 죄의 사슬을 풀어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새 생명의 영을 주셨다. 그러므로 주는 십자가에 죽으셨고 우리는 그와 함께 하나님의 영으로 다시 산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주를 믿어야 하는 이유이며 유일한 생명의 통로인 것이다.
성경은 예수 안에 있어 육신을 따라 걷지 않고 성령을 따라 걷는 자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다 기록하였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께서 율법으로도 다스릴 수 없는 연약한 육체를 위해 하나님의 성령을 불어 넣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살던 우리에게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살아가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믿는 자에게 있어 고민은 내가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에 있다. 성경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평안과 생명이라” 하였으며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였다.
계속하여 성경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듯이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육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기록하였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자세히 살펴 공부를 하려면 로마서를 살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그 죄악을 벗고 이겨낸 하나님의 자녀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된 양자인 것을 증거 하며 우리가 장차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감당할 수 없는 영광을 위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 역설하였다.
교회 봉사에 관해 말씀하건대, 그리스도인의 교회봉사는 천사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자들에게 그의 성도를 섬기라고 주신 은사적 직무로서 이러한 신령한 은사는 주의 택하심과 부르심 가운데 성령세례를 통해서만 나타난다. 따라서 누가 부르심을 따라 성령의 세례로 받은 직무가 아닌 신학대학을 통해 목사가 되었다면 그는 성경의 권위로 부름받은 목사가 아니고 세상의 교회 조직으로부터 자격증을 받았을 뿐이다. 그러하여 교회 가운데 거짓 선지자와 거짓교사들이 나타나 구원받은 하나님의 성도들의 마음에 가라지를 심는 것이다.
만약 당신은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중독자가 선생이라면 그에게 자녀를 맡길 것인가 생각해 보자. 만약 알콜중독자가 비행사라면 그 비행기에 내 몸을 맡길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자녀를 동성애와 음행과 간음과 도둑질과 술 취한 자들에게 맡기시겠는가? 이것은 너무 간단하고 자명한 원리다. 세상에서도 할 수 없는 것을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더욱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며 또한 죄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도 또한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다.
따라서 교회의 봉사는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택하심을 받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이 주께서 주신 직분을 맡는 것으로 그의 역사는 선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능력으로 나타난다. 많은 교회들이 각 사람들의 재능을 따라 봉사를 맡기는 것은 엄밀히 말하여 봉사가 아니다. 봉사는 재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성령의 세례를 통해서 주신 은사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긴 오늘날 세상은 대통령 재직 중에도 이혼을 하고 동성애자가 국가 수상이 되기도 한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입지를 존중하며 세상은 그들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누구라도 국가 경제를 살리고 백성들을 평안케 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사람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그의 인격의 가치를 눈에 보이는 것으로 치부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는 이와 다르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또 죄인은 그 어떤 경로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
그렇다고 동성애자나 알코올중독자, 혹은 마약중독자들은 사역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처음부터 죄인이었다. 그러나 주 예수를 믿는 성도는 의인이라 칭하셨고 그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와 주의 부르신 영화로운 백성으로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어 주 하나님을 섬기며 주의 백성들을 섬길 수 있다. 그러나 아직 그가 죄 가운데 있다면 그는 스스로 경계하여 죄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심령으로 변화되어 정결한 그리스도의 그릇이 될 때까지 교회에서 스스로 자중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은사란 하나님의 성도를 섬기기 위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적 직무 곧, 교사라던가 찬양리더, 전도사, 목사 더 나아가 전도자와 예언자의 분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세상 일의 기능직과 다른 영적 은사에 속한 것으로 일반 교회 행정이나 사무직, 음향, 교통, 건물관리와 같은 기능직 섬김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물론 이런 교회 기능직 봉사자를 선임하는 데도 성도로서의 성결성과 도덕성이 기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능직 봉사는 성령의 은사로 담당하는 직분이 아니라 개인이 갖고 있는 재능과 섬김의 열정에 속한 것이므로 각 교회의 기능적 필요에 따라서 교회 운영회의 교정에 따라 맡길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을 담당하는 봉사 직무는 택하심과 부르심 가운데 성령의 세례를 통한 직임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오해의 소지가 없었으면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영을 분별하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며 이를 위해 하나님은 영분별의 능력을 주셨다. 따라서 어떤 목사가 외국의 유명 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그가 성경을 가르침과 성도를 섬기는 일에 큰 능력이 나타난다 해도 그가 성령의 세례를 받지 않은 자라면 그의 직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자신과 교회의 조직을 통한 직분일 뿐이다. 이로서 성도들이 적그리스도의 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주님은 사도를 세우시고 그들에게 성령을 부으시고 친히 기록하신 성경의 말씀을 영으로 깨닫게 하여 그의 교회 곧 죄에서 사함을 받은 성도들로 장차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주와 함께 통치자가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동성애자든 그 어떤 범죄자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을 받고 구습을 벗어버려 새사람을 입었다면 그를 온전케 하신 주께서 그에게 성령을 부어 그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거룩한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어 굳건한 영광 위에 서서 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 부족함이 전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양자된 영광의 기업을 세세토록 누릴 것이다.
'동성애탈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성애서 전향한 이요나 목사 이야기 (2)-회복, 그 이후 (0) | 2007.10.30 |
---|---|
[스크랩] 동성애서 전향한 이요나 목사 이야기 (1)-어머니의 죽음 (0) | 2007.10.30 |
더이상 망설이지 말자! (0) | 2007.08.14 |
동성애와 성경적 상담 (0) | 2007.08.08 |
아직도 이반으로 살고 싶은 가? (0) | 2007.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