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상담

우울증에 대한 성경적 견해

이요나 2008. 7. 29. 10:12

우울증에 대한 성경적 견해

 

성경에 나오는 여러 우울증의 사례 가운데 하나로 엘리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지만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다가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다( 5:17-18). 이 후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 450명에게 도전하면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라고 기도를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또 불을 내려 제물을 태워버리셨다. 그러자 엘리야가 기손 시내로 내려가 거짓 선지자들을 모두 죽였다.

  이세벨은 엘리야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 24시간 안에 그를 죽이젰다는 내용의 전갈을 보냈다. 엘리야가 이 소식을 듣고는 일어나 놀랬으며 그는 광야로 도망가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하며 여호와께 죽기를 구했다(왕상 19). 이 얼마나 믿음이 없고 겁쟁이 같은 행동이 였던가? 참으로 대조적인 마음의 변동이었다.  

  엘리야가 어떻게 이렇게 급변할 수 있었단 말인가? 바로 얼마 전에만 해도 갈멜산에서 승리했던 그가 어떻게 광야로 도망해 죽기를 원했단 말인가? 이런 사람을 엘리야 콤플렉스에 걸린 사람이라고 한다. "엘리야 콤프렉스"란 믿음이 좋았든 사람이 갑자기 하나님의 임재의식과 그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우울하게 되는 사람을 말한다. 이렇게 되면 삶이 무의미해진다. 이렇게 되면 완전히 버림받은 느낌으로 가득 차 소망을 잃고 우울해진다.

 

엘리야가 하나님에게 죽기를 원했을 때에도 바로 이런 상태였다. 엘리야 콤프렉스란, 열등 의식이 자기스스로 자기를 열등하다고 판단하는 것 같이, 자기가 자기를 우울하다고 믿고 그렇게 행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되는가?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우울하다고 스스로 판단하게 되면 이렇게 된다는 말이다.

  우울증이 오면 무겁고 어두움이 사람을 덮치고 그 우울증의 중량 때문에 견디지를 못한다. 이런 우울한 영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젊은 사람, 중년, 노년, 또 빈부나 교육의 유무를 가리지 않고, 직업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남녀와 기혼 미혼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에게도 찾아온다.

  우울증을 성경적으로 다루지 않고 그대로 두면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다. 자살의 거의 전부가 갑자기 닥친 우울증이나 깊은 우울증이 계속되면서 생기는 것이다.

  
우울증은 심기가 슬프고 우울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흔히 이렇다 할 이유가 없이 나타난다. 그래서 심한 삶의 무관심이나 깊은 좌절감을 나타낸다. 이런 우울증의 증상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식욕상실, 수면상실, 심한 피로, 불규칙적으로 지나치게 음식이나 음료를 많이 먹는 것, 지나친 수면, 일반적으로 삶에 대한 무관심, 심기증(hypochondria-몸이 불편하다고 푸념하는 것), 불결한 외모, 성적충동의 상실, 성취의욕의 상실, 이유 없이 우는 것, 무기력과 억압의 느낌, 매우 부정적인 자화상, 반사회적행동(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을 포함), 장기계획을 하지 않는 것, 신경과민 등이다.

우울증의 원인


1.
엘리야 콤플렉스 - 우울증의 원인 중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생각의 패턴에서 오는 것으로;)

  1) 자기의 문제가 하나님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엘리야는 하나님보다 이세벨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잃었다. 그가 눈을 하나님에게서 띠어 문제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사단이 문제를 현미경에 밑에 넣고 그것을 확대시켜서 보여준다. 그러니 문제가 훨씬 크게 보인다. 엘리야는 이세벨을 현미경 밑에 넣고 그를 보았다. 고로 그가 실제보다 훨씬 크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나의 문제의 크기를 결정하는 사람은 바로 나이다. 예수님의 눈을 통해서 문제를 보아야 그것이 적게 보인다. 우리의 어려움은 언제나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크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단은 언제나 문제를 확대해 우리를 좌절시키려 함을 알아야 한다. 사단이 이것을 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바로 나의 생각이며 나의 선택이다.

  2) 나만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엘리야는 "오직 나만 남았나이다"(왕상 19:10)라고 하나님께 말을 했다. 이런 것을 영적인 밀실 공포증(claustrophobia)이라고도 한다. 그는 영적 밀실 공포증에 걸려 있었다. 이런 영적 밀실 공포증에 걸린 사람이 승강기에 타면 사방의 벽이 자기에게 넘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공포에 떤다. 벽이 실제 무너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엘리야도 사방에서 세상이 자기에게로 무너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만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엘리야가 자기만 남았다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은 "내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그 입을 그에게맞추지 아니한 자를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무엇을 겪고 있는지를 아셨고 또 몇 사람이 엘리야와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계셨다. 그 옛날 그들의 경험을 아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

  3) 엘리야 콤프렉스에 걸린 사람은 나는 이제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엘리야는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간청했다. 그는 죽음이 두려워 피하면서도 죽기를 원해 기도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보다 더 큰 문제를 가진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지 그의 문제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문제다. 우리는 예수님을 크게 보고 마귀를 적게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컵의 물을 가지고도 자기들의 관점에 따라 달리 본다. 컵에 물이 반이 들어있는 것을 믿음으로(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컵에 물이 아직도 반이나 차 있다고 보지만 믿음이 없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컵에 물이 반이나 비었다고 본다.

  이런 사람을 상담할 때에는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먼저 갖게 해야한다. 부정적인 생각에서 긍정적인 생각으로, 불신의 관점에서 믿음의 관점으로, 또 사람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상황을 보게 해야한다. 피상담자로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하고, 믿음으로 변화되게 하는 것은 과정이기 때문에 하루 밤사이에 되는 것이 아니고 매일 매일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 12:2)을 통해서 서서히 되는 것을 가르쳐야한다.

  우리가 엘리야 콤프렉스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적은 세부적인 것만 보지 말고 큰 그림, 즉 그림 전체를 보아야 한다. 문제만을 보지 말고 받은 복을 세어보기 시작해야 한다. 컵에 물이 반이나 차 있다고 생각해야지 컵에 물이 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우습게도 엘리야는 죽기를 위해 기도했음에도 실제로 죽지 않았다. 그는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나님께로 승천했다(왕하 2:11). 그가 우울했었지만 그는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모르고 있었다. 우울증은 언제나 미래에 대한 우리의 소망에 대해 눈을 어둡게 한다.

 

* 우울할 때에는 도대체 왜 우리가 우울한가를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런 생각을 분석하는 테스트를 해보기 바란다.  (다음의 공란 ________ 에 답을 적어 넣는다. 해답은 뒤에 나와있다)

 

1. 내가 행복한 것은 내가 ______ 생각을 해왔기 때문이다;

2. 내가 슬픈 것은 내가 _____ 생각을 해왔기 때문이다;

3. 내가 분이 나는 것은 내가 ______ 생각을 해왔기 때문이다;

4. 내가 우울한 것은 내가 _____ 생각을 해왔기 때문이다.

 : (1. 행복한  2. 슬픈  3. 분한  4.  우울한).

  우리의 정서의 변동은 이와 같이 간단하다. 우리의 생각(마음)에 따라 우리의 기분이 변한다. 생각은 우리의 정서에 영향을 준다. 우리의 생각에 따라 우리의 정서가 행동으로 나타난다. 정서는 정보를 받는 대로 반응한다.

  내가 우울해 있으면 이는 내가 우울한 생각을 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우울증의 원인이 음식이나 운동부족이나 다른 유기적 원인 때문일 수도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우울증은 침울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부정적이고 우울한 생각을 하고 우울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래서 우울증의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우리의 생각이 정서를 결정한다면 우리의 우울증도 우리의 생각을 바꾸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나의 정서를 바꾸려면 나의 생각을 바꾸면 된다. 우울한 생각을 하려고 하지 말고 기쁜 생각을 하면 된다. 믿음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내 몸에서 엔도르핀(endorphins)이 나와 우울증 때문에 생겼던 화학적 불균형을 바로 잡아준다. 하나님은 왜 기뻐해야 하는지 그 의학적 이유를 설명해주시지 않으셨지만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 17:22)고 말씀하셨다.

  두 아들이 음주중독자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후 집을 떠났다. 몇 년 후 "음주중독이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한 심리학자"가 이 두 사람을 찾으러 나가 그들을 만났다. 한 아들은 아버지의 전철을 밟아 음주중독자가 되었다. 심리학자는 그에게 "당신은 왜 음주중독자가 되었습니까? 하고 묻자 그는 "나의 아버지 같은 아버지를 가진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을 기대합니까?"라고 대답했다. 그 심리학자는 또 다른 아들을 만나자 그는 놀랬다. 이 아들은 지금껏 술을 전혀 입에 대보질 않았기 때문이다. 심리학자가 그에게 물었다: "왜 술을 입에도 대보질 않았습니까?" 그는 "나의 아버지 같은 아버지를 둔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을 더 기대하십니까?"라고 대답을 했다.

  두 사람은 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나 되는 것은 나의 환경으로 결정되지 않고 그 환경에 대한 나의 반응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첫째 아들은 환경의 자기를 희생자라고 생각했고, 둘째 아들은 자기의 환경에서 동기를 얻어 그의 생활에서 음주를 아주 없애버리려고 했다. 그는 그의 환경을 이긴 승리자가 되었다. 나는 회생자의 삶을 살 수도 있고 승리자의 삶을 살 수도 있다. 그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다.

2. 
육신적인 원인

때로는 신체적 변화 때문에 심한 우울증을 경험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여자의 경우에는 홀몬의 불균형 때문에 우울증이 올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estrogen으로 치료가 가능하지만 의사하고 상의해서 이것이 그들이 겪고 있는 우울증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아야 한다.

  또 남녀의 관계없이 병을 오래 앓거나 부상을 당한지 오래되면 우울증을 경험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당뇨병으로 양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다. 병원에서 회복되는 동안 그는 자살하려다가 발각돼 생명을 구하고 또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게 되었다. 그는 "나는 이제 걸을 수도 없으니 살 보람을 잃었습니다"라고 한 간단한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하려고 했든 것이다. 즉 그는 소망을 잃었든 것이다. 욥도 그의 우울증과 싸운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 되었다가 터지는구나"( 7:3-5).

  이 말씀은 육신의 질병이나 어려움도 우울증을 줄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우울증에는 또 다른 이유들도 있다.

3.
해결되지 않은 죄책감 문제

"해결되지 않았다"는 말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죄책"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경종이 울리게 하는 장치를 우리 안에 달아 노셨다. 이러한 죄책은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해 우리를 건전하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죄책이 해결되지 않거나 거짓된 제거 장치로 덮어놓으면 우울증이 들어와 그 곳에서 나를 괴롭히는 작업을 시작한다


  몸의 열이 병에 대한 경고를 주듯 죄책은 영혼에게 경고를 준다. 몸의 열이 육을 불편하게 만들어 외부에서 무엇인가 불순물이 몸 안으로 들어온 것을 알리듯 죄책도 영혼에 침범해서는 안될 것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리는 하나님의 경고 장치이다. 이것을 그대로 두면(회개하지 않으면) 죄책은 우리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로 우리의 삶에 해를 준다.

  다윗도 밧세바에게 범죄한 후 이런 경험을 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 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32:3-5). 계속 죄를 지으면서 뉘우치지도 않고 회개도 않으면 우울증이 나의 목을 잡고 회개하라고 계속 나를 괴롭히며 독촉한다.

4.
사랑하는 사람의 상사 - 부모나, 배우자나, 자녀나, 친한 친구의 상사는 일반적인 슬픔을 동반한다. 마리아도 오라비가 죽었을 때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11:21) 하며 예수님께 그의 슬픔을 보여주었다. 또 예수님도 무덤에 가셔서 우셨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슬픔이 일정한 기간이 지난 후에도 계속되면 이는 그것이 우울증으로 변해 그의 목을 조이고 있음을 나타낸다
.

  슬픔과 우울증은 다르다. 슬픔이 가시지 않으면 우울증으로 변한다. 어떤 사람은 상사를 당한지 2년이 지나도 극심한 슬픔으로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다.

5.
권태 - 어떤 경우에는 끈질긴 권태로 인해 우울증이 오는 수도 있다.

산다는 것이 너무나 단조롭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사회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찾아온다. 가난한 사람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다. 솔로몬도 전 6:3에서 이런 상태에 대해서 언급했다: "사람이 비록 일백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 또 그 몸이 매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저보다 낫다 하노니"( 6:3).

  부를 얻고 장수를 해도 생을 성취하지 못하고 삶의 의의를 찾지 못하고 죽으면 이것처럼 비참한 것은 없다. 권태로 우울한 많은 사람들 중에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에 투자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6.
우리의 영혼을 죽이려는 원수에게서 직접 공격을 받을 때

사탄은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우울증을 주려고 공격해온다. 사울왕은 시기와 질투로 다윗을 계속 죽이려고 했다. 이럴 때마다 성경은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렸다"(삼상 18:10)고 했다. `

  이는 하나님이 악신에게 사울을 격분시키라고 허락하신 경우를 말한다. 사울의 분과 질투가 그를 우울하게 만든 것이다. 요나도 분이 최고도에 달하자 그는 매우 우울해 졌었다. 사탄이 공격을 할 때에는 시기, 질투, , 복수심 등 어떤 것을 공격 무기로 삼든 마지막 결과는 언제나 같다.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다.

7.
자기 연민 - 자기 연민도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모세도 자기를 괴롭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룰 때 이를 경험했다: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 . .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11:11, 15).

 우리가 자기 연민에 빠지면 언제나 우울증에 걸리게 되어있다.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위협했을 때 엘리야는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며 . . .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 . . "(왕상 19:4)라고 했다. 엘리야도 우울증 때문에 이런 일을 한 것이다.

엘리야나, 모세나, 욥 같은 사람들도 우울증에 시달렸어도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았으니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