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이사야강해

(이사야1:26) ‘이사야의 비전’

이요나 2008. 11. 11. 16:12

(이사야1:26) ‘이사야의 비전

 

(1:26) “내가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 너의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애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칭함이 되리라 하셨나니”

 

오늘부터 우리는 이사야서를 공부하게 된다. 몇 년 동안 신약을 매달려 오다가 최근 요한복음을 리뷰를 마치고 성경 66권 중 어디를 다시 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결국 이사야를 선택했다. 내가 이사야를 다시 강해 하기로 결정한 것은 이사야서 66장 속에는 구약39권과 신약27권을 요약해 놓은 것처럼 1장부터 39장까지 이스라엘의 패역과 멸망 그리고 이스라엘을 대적하던 애굽, 앗스르, 바벨론 국가들의 멸망이 예언 되었고 40장부터 세어 27장에 해당하는 66권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소개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 약 724년에 살던 유다의 선지자로서 그는 오직 남유다 왕국과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이름은여호와는 구원이라는 뜻과 같이 이사야서 전체의 주제는여호와의 구원이다. 오늘날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뜻한바 구원의 정의가 희석되고 있는 이 시대에 이사야서는 혼탁한 그리스도인의 의식을 각성시키는 활력소가 될 것이다. 

 

신약성경은 세례 요한의 사역과 함께 출발하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진하면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증거하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세례 요한의 출현이 이사야서 40 3절의 말씀 곧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40:3)하신 말씀의 성취로 출발하고 있다.

 

제사장 스가랴의 아들 세례 요한은 침례를 베푸는 자신의 존재를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1:23) 증거하였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이냐? 더욱이 이때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멎은 지 400년이나 된 때이다.

 

이사야서는 크게 전반과 후반부로 나누어진다. 먼저 1장부터 39장까지는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심판에 대하여 기록되었다. 이를 세부적으로 나누면 1장부터 12장까지는 유다와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에 관한 메시지이며 13장부터 23장까지는 이스라엘과 관계를 갖고 있는 주변 여러나라들에 대한 경고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24장부터 27장까지는그날에 관한 메시지가 기록되었다. 그날은 믿는 자들에게 있어 구원의 날이지만 교만한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다. 이 섭리는 아직도 변하지 않은 진리로서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메시지이다. 어어서 28장부터 33장까지는 여섯가지 재앙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의 날에 있을 재앙들을 소개한 계시록의 전편과도 같다.

 

그러나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두신 시온을 위하여 속량의 은혜를 베푸신다. 이 이야기가 34장과 35장에 소개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대환난에서 자기 백성을 속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의 보수를 체험하게 된다.

 

36장과 39장은 우리로 주목하게 하는 특별한 메시지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현대적 인지도를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앗시리아와 바벨론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는 이스라엘을 보게 된다. 이는 마치 오늘날 공산주의 이념 철학과 자유종교의 파워 속에 눌려 있는 우리 교회를 보는 모습과도 같다.

 

그러나 더욱 흥미로운 것은 40장부터 66장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구속의 메시지이다. 이는 마치 신약을 압축해 놓은 것과도 같다. 먼저 이사야는 40장에서 48장까지에서 나의 구속자 여호와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49장부터 57장에서 나를 구원하시는 구원자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구원의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사야는 우리의 영생의 위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시는 만왕의 왕을 위하여 금식하여야 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58). 이는 단지 밥을 굶으라는 메시지가 아니다. 물질만능의 시대에서 가난한 심령이 되어 천국을 준비하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I.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

“유다와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1)

 

A. 웃시야(대하26)

1절에는 이사야의 사역적 배경이 소개되고 있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에 걸쳐 네 왕을 섬기며 복음사역을 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장구한 세월이 아닐 수 없다. 전승에 의하면 히스기야  이후 므낫세가 톱으로 켜서 죽었다 한다(열하21:16, 11:37). 이에 우리는 그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네 왕들의 배경을 살펴 보기로 하자.

 

웃시야여호와는 나의 힘이란 뜻으로 아마샤의 아들로 16세에 등극하여 52년을 치리한 유다의 10대 왕이다(대하26). 흥미롭게도 역대하 26장에는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여호와를 구할 동안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다(대하26:5)는 주석이 붙었다.

 

웃이야 왕은 블레셋의 종교적 중심인 가드성과 야브넷 성과 아스돗 성을 멸하여 그 성들을 헐고 그 땅에 성읍들을 건축하였으며 그 인근 아라비아인의 마을을 점령하여 애굽변방에 이르기까지 강성해졌다. 그는 백성들의 실제적 삶을 위해 간척지를 개간하여 농지와 육축을 장려하였고 군사를 양성하고 병장기를 예비하고 예루살렘 성을 방어하기 위하한 기계를 창작하여 왕권을 굳건히 하였다.

 

그러나 웃시야 왕이 강성해지매 마음이 교만하여져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분향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제사장 아샤랴가 팔십명의 제사장을 이끌고 들어가 분향을 제지하니 웃시야가 노를 발하였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쳐 이마에 문둥병이 발병케 하여 결국 그는 별궁에 유폐되고 말았다. 결국 그는 문둥병으로 하여 열조의 무덤으로 들어 가지 못하였다.

 

 B. 요담(대하27)

웃시야가 죽자 그의 아들요담’(대하27)이 왕위를 이었다. 요담은여호와는 정직하시다라는 뜻으로 그는 25세에 등극하여 16년간 치리하였다. 흥미롭게도 역대하 27 2절에는 “요담이 그 부친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오히려 사악을 행하였다기록되었다. 그가 여호와의 전을 두려워한 것은 그 아비 웃이샤 왕이 저주를 받아 문둥병이 발한 것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된 자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친히 예배를 드리지 않음으로 백성들이 방자해져 사악한 일들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아비 웃시야 왕을 따라 성전 개축과 성들을 건축하여 외세로부터 예루살렘성을 굳건히 하였다. 이로서 그는 비록 여호와의 전을 두려워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성을 굳건히 하므로 여호와께 복을 얻거 강성군주로 일생을 마쳤다.

 C. 아하스(대하28)

요담이 죽은 후 그 아들 아하스가 20세에 등극하여 십육년간 치리하였다. 그러나 그는 선대왕들의 선행을 따르지 않고 북이스라엘을 따라 바알신을 섬기고 흰놈의 아들 골짜기에 분향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녀들을 불에 살라 제물로삼고 산당을 세워 백성들로 분향케 하였다.

 

이에 여호와께서 유다를 아람왕의 손에 붙여 살육이 많게 하셨으나 회개치 아니하고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청한 지라 여호와께서 이방을 더욱 왕성케 하여 유다와 예루살렘을 치게 하시니 아하스가 더욱 교만하여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모아 훼파하고 오히려 여호와의 전 문들을 봉하고 예루살렘 구석마다 단을 쌓아 다른 신들에게 분향케 하였다. 결국 그는 여호와를 격노케 하여 죽어 장사되고 그 아들 히스가야가 왕이 되었다.

 

D. 히스기야(대하29,사38)

히스기야는 25세에 등극하여 29년간 치리하였는데 그는 그 아비와 같지 않고 선대 다윗왕을 본받아 모든 행위에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 이사야 38장을 보면 히스기야가 다윗을 본받은 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히스시야는 먼저 굳게 닫혀 있던 여호와의 전을 열고 수리하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위임하고 그들로 여호와의 전에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하였다. 히스기야는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을 불러 모아내 아들들아 여호와께서 이미 너희를 택하사 그 앞에 서서 수종을 들어 분향케 하였으니 이제는 게으르지 말라’(역하29:11) 엄히 독려하였고 제사장들과 레위인을 성결케 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봉헌케 하였다.

 

또한 그는 제사장들에게 다윗과 왕의 선지자 갓과 나단의 명령한대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게 하였고 다윗의 선견자 아삽의 시로 여호와를 찬송케 하여 하나님의 전에 찬양이 끊이지 않게 하였으며 제사장들을 성결케 하고 백성들과 함께 유월절을 온전히 지키며 여호와의 말씀을 그대로 준행케 하였다(참조 대하29,30).

 

그러나 인생에게는 항상 어느 때에고 변고가 이르게 마련이다. 이사야서 38장을 보면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죽음을 통지 받자 그는 자기 생명을 위하여 면벽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15년간 생명을 연장받는 은혜를 이끌어 내었다. 이 때 주께서 그 증거로 뒤로 물러갔던 해의 일영표를 10도 뒤로 물리게 하셨다.  

 

그러나 병에서 고침을 받자 그 시대 신진 세력으로 등장한 바벨론와 무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 왕의 치유를 축복하고자 사자들을 보내어 편지와 예물을 보내자 히스기야가 충동을 받아 그들에게 궁중의 모든 보물고와 전 소유를 다 보였다. 어쩌면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처럼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충만하면 갈피를 잡지 못하는가 보다.

 

이때 선지자 이사야가 들어와 왕에게 이들은 누구이며 이들에게 무엇을 말하였고 무엇을 보였는가 물었다. 이에 히스사야가 내 궁전에 있는 모든 것과 보물들을 다 보였다고 말하자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을 것이며 네게서 날 자손 중에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궁의 환관이 되리라”(38:6)고 전하였다.

 

이 말을 들은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또 가로되 나의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였다. 참으로 흥미로운 답변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여호와의 말씀이 좋다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과 뜻은 신실하심을 알고 있음을 뜻하는 믿음의 고백이다. 그는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자기의 뜻을 따라 예정하시고 이끌어 가심이 좋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그가 생전에 평안함과 견고함이 있을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주께서 전한 말씀은 장래에 일어날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그 어떤 상황에서든지 히스기야와 같이 기도하여 여호와의 증거를 이끌어 내며 또 여호와의 말씀이 신실하고 좋으신 뜻대로 성취 될 것임을 믿어야 할 것이다.

 

II.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같이 원두막의 상직막같이 에워쌓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도다”(8)

 

A.   이스라엘의 상태(2-4)

2절에서 하나님은 거역하는 자식을 기르고 양육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전능자를 대적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게 된다. 과연 어느 시대 그 누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이겨 본 일이 있었던가? 이미 하나님께서는 대적하는 자에게 화 있을 것을 선언하셨다. 그러함에도 자신을 기르시는 하나님을 거절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자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이들을 가리켜 소와 나귀보다 못하여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최근 강아지 한마리를 키우고 있다. 어찌나 주인을 알아보고 깍듯이 따르는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매일 산책을 시키며 먹이를 주고 용변을 치워주고 매주 한번씩 목욕을 해 준다. 서너 달 밖에 않되었는데 벌써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 알아채고 꼬리를 흔들어 댄다. 집에 두고 외출이라도 하는 날에는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나를 기다린다. 나는 가끔 내가 과연 이 강아지만큼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하여 범죄한 나라요 허물어진 백성이라 하셨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담배 자판기만큼 즐비한 교회간판이 무색할 정도로 날이 갈수록 세상은 험악해지고 있다. 동성애자들과 윤락가 여성들은 인권을 빙자하며 동성애자들의 결혼과 성매매 합법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더 고통스런 일은 정부의 일각에서 그런 일들에 대하여 검토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라고 책망하였다. 이는 매우 슬픈 일이다. 만약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라면 하나님을 슬프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하나님께서 자식이라 일컫는 자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성경은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다”(4b) 기록하였다.

 

과연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도 인생의 복을 바랄 수 있겠는가?  만약 누가 인생의 선한 것을 바라면서 하나님을 거역한다면 그는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선한 것을 이루게 하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이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나오는 것을 자유롭게 먹어도 된다.”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이는 그의 사람에게 가장 선하고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하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해롭고 파괴적인 것을 금하여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하셨다. 이 말씀은그 과실은 네게 치명적이다. 그곳에는 영혼을 죽이는 바이러스가 있어 너의 이성을 마비시키며 세포를 파괴하고 또 돌연변이를 일으켜 노쇠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자신의 생각을 따르고 말았다. 그 결과 인간이 얼마나 추악해졌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 더 큰 문제는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돌이켜 고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너희가 어찌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5)고 경고 하셨다. 얼마전 옥소리라는 여가수가 결혼 한지 얼마 안되어 외간 남자와 통간을 하고도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요구하는 재판을 걸어 결국 대법원에까지 이르렀고 패소를 하자 헌법소원을 냈었다. 다행이 헌법재판소에서는 그녀의 소원을 기각하였지만 세상이 이처럼 악해질 수 있을까 싶다. 죄를 정당화 하고자 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최근 나는 몇 년전부터 전화로 상담을 받아 오던 형제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그는 예수를 믿으며 신학을 공부하는 동성애 성향을 가진 형제였다. 그는 학교를 가던 전차 안에서 동성애자의 유혹을 받아 그 욕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단 한번 관계를 가졌을 뿐인데 수개월 후 HIV양성반응을 받았다고 한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자 신학공부를 하면서 수년동안 절제해 오던 자신의 노력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이제는 피할 곳이 없는 죄인이 되어 거리를 방황하며 이제는 아주 동성애자들의 클럽에서 생활을 한다고 한다. 정말 안타깝기도 하고 어처구니 없기도 하다. 그동안 나는 그 형제에게 여러 차례 경고를 하였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고 자신의 욕정 앞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한순간의 불순종으로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이 되고 만 것이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욕되게 한 벨사살 왕에게 당신이 수명이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 있는 줄 알면서도 당신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고 책망하였다. 우리도 그와 같이 자신의 죄를 알면서도 악을 행하는 것에 대한 판결은 꼭 받게 될 것이다. 다니엘은 벨사살 왕에게 당신이 본 글자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하므로 당신은 이제 끝났다고는 뜻이므로 오늘밤 당신의 영혼이 떠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만약 오늘 이 글을 읽고도 망나니 짓거리를 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저울에 달릴 것이다.

 

B.   이스라엘의 딜레마(10-15)

그 결과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에게 짓밟혀 그 땅은 황무하게 되었고 성읍들은 불타 버렸고 그들의 소산은 모두 이방인들에게 삼킴을 당하였다. 이사야는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같이 원두막의 상징막같이 남았을 뿐이며 이도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남겨 두지 않았다면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었을 것이라 하였다.

 

이스라엘을 가리켜 소돔과 고모라에 비유한 것은 매우 흥미롭다. 소돔은 사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의 조카가 선택한 기름진 땅으로 물질과 음행에 빠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도시들이다. 우리는 이미 창세기 19장에서 그 현상을 목도한 바 있다.

하나님은 10절에서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하고 경고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은 지도자들과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떠난 물질만능에 빠져 있음을 질책하신 것이다.

 

오늘날 유럽 미국 그리고 우리나라를 보자 이 나라들은 모두 유대인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나라들이다. 그러나 오늘날 유럽은 어떠한가 그들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찾아 볼 수 없고 선교대국이라고 칭하는 미국은 모든 범죄의 근원이 되어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동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으로 지칭되어 우리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을 하였고 오늘과 같이 잘 살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과연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교회와 그의 성도들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교회는 비대한 늙은 코끼리처럼 힘을 잃고 쓰러져가고 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점점 상실되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의 미리 하신 말씀을 따라 우리 앞에서 촛대를 치우실 것이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그들의 죄악을 열거하였다. 그들의 죄악의 근원은 바로 다름 아닌 그들의 종교활동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은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네게 무엇이 유익하냐하였으며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하셨다. 또한 그들이 지키는 안식일을 비롯한 모든 집회의 부정됨을 책망하며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이 말씀은 너희들의 종교활동이 지겹다고 하신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인간들과 씨름을 하지 않겠다는 말씀이다(6:3 참조).

 

나는 얼마 전 기가막힌 말을 들었다. 어느 대형교회에서 세 사람의 장로가 그 교회 건축을 위해 22억씩 66억을 약속하였다고 한다. 교회는 그 말을 믿고 은행 융자를 내어 교회를 지었는데 그들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여 매달 수억의 이자를 물게 되자 주일 예배에 공개적으로 그들의 이름을 거론하여 출교를 시켰다는 것이다. 세 사람이 육십육억의 헌금을 하겠다고 약속한 그들도 문제지만 과연 이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인가 싶을 정도로 두려워진다. 이런 일은 세상에서도 행하지 않는 일다. 나는 그 교회는 이미 하나님께서 떠나신 교회라고 생각한다.

 

III. 변론의 기회(16-2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18)

 

A. 하나님의 경고(16-17)

이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경고하여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고 악행을 그치라명하셨다. 스스로 씻는다는 것은 마음의 성결을 언급하신 것이며 스스로 깨끗케 하라는 말씀은 정결한 생활을 요구하신 것이다. 다윗은 청년이 무엇으로 청결하겠습니까? 하소연 하였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하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내가 너에게 말한 말을 통해 너희가 이제 깨끗하게 되었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여기서 이제 너희가 스스로 종교적 중독에서 벗어나 이성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촉구하신 것이다.

 

계속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17) 하셨다. 흥미로운 것은 선행을 배우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에 대하여 공부를 해서 슬기로워지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사실 선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따라서 죄성을 가진 사람들이 선행을 스스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선행을 배우라 하신 것이다. 또한 공의를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공평하신 의 곧 그리스도의 의를 구하라는 것이다. 이 또한 인간 스스로 얻을 수 없는 것임으로 구하라 하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선행을 배우고 공의를 얻으면 우리는 학대받는 자를 도울 수 있으며 고아를 신원하여 줄 것이며 과부를 변호하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기르시고 가르치신 것이다.

 

C.   죄의 문제를 해결하자(18-20)

18절에서 주님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하셨다. 변론하자는 말씀은 서로 논증을 통해서 시시비비를 가려보자 하신 것이다. 따라서 주님은 여기서 우리에게 합리적인 이성적 판단을 요구하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게 된다. 우리 죄가 아무리 진하고 붉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능히 깨끗케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심판하는 분이 아니라 선하고 은혜로서 용서를 베푸신다.

 

계속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순종의 삶을 살라고 명하신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19,20) 하셨다.  이 땅에서의 아름다운 소산이란 우리의 생명의 터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서 우리는 이 땅에서 잘 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아브라함과 그의 장막에 거한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하다.

 

IV.전능자의 계획(21-31)

시온은 공평으로 구속이 되고 그 귀정한 자는 의로 구속이 되리라”(27)

 

A.   원수에게 보수(21-23)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타락을 보고 다음과 같이 한탄한다.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었도다”(21). 이 얼마나 슬픈 탄식인가? 거룩하여야 할 자기 자식들의 타락한 모습이 창기와 같다 하였으니 말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충만했던 공평과 의리가 상실되고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라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마치 소돔과 고모라의 거리를 거닌 것과 같다. 오죽하였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만행의 실상을 살피려 내려 오셨겠는가? 이는 오늘날 우리의 사회현실을 그대로 보는 것과도 같다.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신실함과 공평과 의리를 찾아 볼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함에도 우리 교회는 이 땅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인지 싶어진다.

 

하나님은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하셨다. 여기서 은은 정결한 우리 마음을 뜻하며 포도주는 삶의 기쁨을 말한다. 사람의 마음이 온통 더럽게 물들었으니 그 삶이 패괴하고 음산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 것일까?

 

주님은 그들에게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 도다하셨다. 주께서 그의 종들을 세운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지도자들은 마치 자기들이 잘나서 백성들의 지도자로 세운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뇌물을 받고 또 당연히 하여야 할 일에 대한 사례물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 배경은 하나님을 대적자로부터 나온 것이다. 

 

B.   시온의 회복(24-27)

이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케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수하겠다하셨다. 이 대적자 하나님의 원수는 에덴동산에서 그의 영광을 훼방하던 자로 이 세상을 사로잡은 악한 영들이다. 이 원수들에게 보수하시는 날 사람의 마음은 온전케 회복 될 것이며 우리는 이 땅에서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님은 그 날의 일들을 말씀하여 내가 너희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 너희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러한 후에게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칭함이 되리라 하셨나니 시온은 공평으로 구속되고 그 귀정한 한 자는 의로 구속되리라”(26,27) 하셨다.

 

사사들이란 백성들을 위해 세우신 주의 종들을 뜻한다. 처음 이스라엘은 왕을 두지 않았고 하나님의 신실한 사사들의 통치 속에서 평안을 누렸다. 사사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따라 악을 물리쳤고 이리의 입으로부터 양들을 구해냈다. 그들은 선한 목자들이다.

 

또한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하리라하신 말씀은 백성들의 실제적 리더를 뜻한다. 가르치고 인도하고 치료하고 또 보호하는 카운슬러다. 이는 오늘날 우리를 인도하시는 보혜사 성령과 같다. 그들은 의로움으로 주의 백성들을 인도할 것이다. 이때에야 하나님의 성도 곧 교회는 공평으로 구속되고 그 귀정된 자들은 의로 구속이 될 것이라 하셨다. 이날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날인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상 속에서 천년이 하루 같은 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또한 구속을 받은 자로 그날을 기다린다. 이 소망이 있음으로 주를 믿는 자들에게는 평안이 있다.

 

C.   선택의 결과(28-31)

그러나 하나님은 거절의 책임을 물으신다. 주님은 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하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평하심이다. 만약 주께서 미리 말씀하지 않으셨다 해도 하나님은 공의로 판단하시며 하나님의 심판은 공평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늘 한번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기회를 부여하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이 임할 지어다 하고 기원한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왜 하나님의 뜻을 거절한 것일까? 그것은 그들의 택함에 있다. 이사야는 너희가 너희의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너희의 택한 동산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며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없는 동산 같을 것이라”(29,30) 증거 하였다. 예수께서도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의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나도 저희를 부끄러워하리라하셨다.

 

여기서 상수리나무란 이방인의 신들을 뜻하며 택한 동산이란 그들의 신앙의 중심 곧 종교적 배경을 뜻한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만약 누가 남산에 올라 좋은 것을 선택하라면 어떤 사람은 여의도를 바라 볼 것이요 또 누구는 이촌동이나 압구정동을 택할 것이다. 요즘은 분당을 찾는 이들이 더 많겠지만 말이다. 그들의 눈에 50평도 되지 않은 조그만 갈보리채플 서울교회가 눈에 들어 올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주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자는 모두 구속을 입어 신실한 자라 의로운 자라 칭함을 받을 것이다.

 

끝으로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에게 임할 일들을 예고하여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31) 증거하였다. 인간에게 강하다는 것은 참으로 연약한 갈대와 같다. 블르셋의 성읍을 무너트린 삼손의 힘도 그 머리가락에 부으신 성령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내가 약할 때 강함이라 말한 바울의 증거에 박수를 보낸다. 우리의 모든 삶의 힘이 오직 그리스도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말의 날을 살고 있는 우리가 무엇을 택할 것인가? 너는 상수리나무를 택하더라도 나와 나의 가족은 진리의 말씀을 들으리라.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