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12:56) 카라즈(Charaz)
-사역자의 생명-
(눅 12: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요즘 세상 돌아가는 세태를 바라보고 있자니 ‘인생 왜 사는가?’하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여전하게 바쁜 인생들을 살고 있지만 사람들의 얼굴에서 인생의 목표를 찾을 수 없다.
장년의 얼굴에서도, 청년의 얼굴에서도 소망과 기쁨이 사라진 지 벌써 오래다. 일터를 잃은 아비는 티브이 리모컨을 돌리며 의미 없이 히히덕거리고, 갈 곳이 없는 아들은 자판기에 매달려 떠도는 악풀을 즐긴다. 이래저래 공중파 전쟁은 예능의 강자만 살아남기 마련이다.
허리가 휘도록 허기진 배를 졸라매고 피와 땀으로 세운 ‘탱크한국‘의 불꽃같은 의지가 불과 10년의 세월 속에 이처럼 허탈해 질 수 있는 것일까 싶다. 이처럼 우리는 잃어버린 10년의 세월 속에서 생명이 없는 인생을 살았던 것이다.
추석 전날, 이명박 대통령은 고향에 가지 못하는 청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는 심경을 털어 놓았다. 청년을 생각하는 대통령의 마음이 가상하다. 그러나 아들을 생각하는 아비의 마음만이 능히 아들을 살릴 수 있다.
혹자는 MB의 사람들의 과거를 들추어 온갖 추악한 냄새를 털어내 있다. 사실 그들의 탐욕으로 얼룩진 과거를 생각할 때 그들은 결코 국민의 수장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인생 중 냄새나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니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삼으라’ 기록하였다. 이는 살아남을 인생을 위한 소통의 지혜이다.
또한 성경은 탐심의 사람들을 향하여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 기록하였다. 그 영혼이 세상을 떠나는 날 터럭 한 올도 갖고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MB 정권의 생명을 위해 탐욕으로 쌓아 둔 모든 재물들을 내려놓기를 권한다. 그리하면 거룩한 자의 이름으로 세상을 다스릴 입술의 권세를 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만약 성경의 지혜를 버리고 부자청년의 마음을 따른다면 그의 수치는 역사 속에서 슬피 울 것이다.
5년제 단임 대통령 MB는 저탄소녹색성장이다, G20이다 하며 연일 세계와 머리를 맞대고 출구전략을 세우고 있다. 이는 믿음을 상실한 아들들에게 백년대개의 소망을 주려는 아비의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의 아들들은 시작도 하기 전에 지뢰를 깔고 있다. 그러니 성경이 이르기를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12:49,50) 기록하였고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라’ 말씀하셨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 분쟁의 시대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시대적 분변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구름이 서에서 일면 소나기가 오고 남풍이 불면 심히 더울 것을 알듯이 우리도 시대를 분변하고 대처해야만 한다(눅12:54-56). 또한 주님은 이 분쟁의 시대의 승리는 전쟁이 아니라 화해라고 말씀하셨다. 이 지혜는 종말의 시대를 사는 우리 교회에 주신 화평을 이루는 열쇠다. 또한 이 원리는 정치권에도, 국가와 국가 간에도, 또한 북한과의 관계에도 동일하다.
오늘 추석상 앞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고민에 빠진 사람들.. 그러나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나 모두가 만족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오직 그의 나라를 구하는 자, 그들 앞에는 ‘카라즈’(Charaz) 곧 ‘실에 꿰 놓은 진주들’이 주렁주렁 빛을 바랄 것이다. 아멘 아멘(요나)
I. ‘복음생활의 우선순위’ (1-12)
“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12)
유대인들은 랍비의 설교를 카라즈(Caraz)라고 불렀는데 이는 ‘실에 꿰 놓은 진주들’이란 뜻이다. 우리 말에 구술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구술이란 말과 같이 이는 설교는 진주를 실에 꿴 것과 같이 정갈한 인내의 결정체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야 한다는 뚯이다. 따라서 오늘날 명설교라고 불리는 유명 목사들의 설교가 카라즈는 될 수 없다. 예수님의 모든 설교는 카라즈임에 틀림없지만 특별히 오늘 누가복음 12장을 카라즈라고 명명한 것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 중에서 가장 귀히 여겨야할 말씀들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12장 서두에는 “그동안 무리 수만명이 모여 서로 밟힐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되..” 기록되었다. 이로서 우리는 이 말씀들은 교회를 이끌어 갈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심을 알 수 있다.
A. 위선적 행위로부터의 탈피
주님은 먼저 ‘바리새인의 누룩 곧 위선을 주의하라’ 하셨다. 바리새인은 그당시 유대교 지도층인 핵심 멤버들이다. 이들에 의해서 유대인들의 종교적 규범들이 제정되고 또 교육되고 있다. 그러니 오늘날 한국교회를 이끌어 가는 어떤 그룹들과도 같다고 하겠다.
오늘 주께서 바리새인의 위선적 생활을 지적하신 것은 제자들을 향한 메시지이다. 이제 곧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도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누룩이란 죄의 속성을 뜻한다. 바울은 잘못된 은사주의에 빠진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고전5:6,7) 책망하였다.
B. 복음의 정당화
주님은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2,3) 하셨다.
종교적 위선자들은 자기의 언행에 대하여 상당한 자신을 갖고 있다. 그것은 종교적 교리와 그 직책의 위엄으로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언행이 교리에 어긋나지 않고 적당히 사람들의 입맛을 돋구어 주기만 하면 된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축복이라는 미명아래 성도들을 우롱하고 있는가? 그들의 목적은 자기의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할진 데 그 모든 비리는 모두 들어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제자들은 은밀히 어두운 데서 말할 필요도 없고 골방에서 서로 귀에 대고 말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심으로 스스로 빛을 발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C. 진정 두려워해야 할 자는 누구인가?
계속하여 주님은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4,5) 하셨다.
주님은 여기서 그의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다. 친구란 생명을 함께 하는 자들로서 서로 비밀이 없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은 이제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셨다. 이는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하셨다.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제자들이 생명을 두려워 하여 복음전파에 떳떳하지 못할 것을 염려한 것이다.
나는 갈보리채플을 시작하면서 많은 다른 교파의 목사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자기 교단의 교리적 배경인 칼빈주의에 대하여 또는 은사주의에 대하여 성경적이지 않다고 믿으면서도 그러한 비성경적 논리를 말함에 있어 주저한다. 그들은 행여나 자신의 그러한 말들로 인해 교단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리로 인하여 은사나 휴거나 재림에 대하여 온전히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가 되지 아니하는도다” 하셨다. 흥미롭게도 마태복음 10장에서는 참새 두 마리에 한 앗사리온이라고 기록되었음을 볼 때 여기서 두 앗사리온이라면 한 마리가 덤으로 끼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생명이 참새의 목숨과 같이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주의 국가에 가면 사람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과도 같다. 철통 같은 암흑의 세상 속에서 그들은 권세자의 손에 착취를 당하며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 행여라도 그에 반하는 말이라도 하면 당장 끌려가 죽음을 면치 못한다.
주께서 오늘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는 것은 이제 복음의 시대의 개막과 함께 그의 제자들의 목숨이 참새의 목숨과 같이 될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그로 하여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처럼 위선자가 되어 복음전파를 하지 못하게 될 것을 염려하신 것이다.
이를 위해 주님은 “너희에게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하시며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7,8) 하셨다.
여기서 너희란 복음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다.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셨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 아닌가? 사람들은 금발의 머리는 약145.000개이며, 흑인들은 12만개, 황인종들을 9만개라고 한다. 이 많은 머리털까지 헤아리신다니 두려워 할 일이 무엇이랴.
D. 말로 성령을 모독하는 자의 심판
흥미롭게도 주님은 10절에서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하셨다. 이 말씀은 매우 역설적이다. 사실 사람들은 사람을 두려워한다. 그들이 믿는 신이라도 그 영혼의 심판보다는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사람들의 권위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거역한다 해도 용서를 받게 되지만 이제 장차 교회를 지배할 하나님의 성령을 거역할 때 그 아무도 용서를 받지 못하신다 하셨다.
어떤 목사들은 이 말씀을 이용하여 성도들을 위협하기도 한다. 자신의 설교를 거역하거나 하는 일을 비방하면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 자신이 예수님보다도 더 크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 말씀을 하시고 사역을 하고 계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령을 모독한다는 말은 신성 불가침을 뜻한다. 만약 누가 성령을 거부한다할 때 그는 주를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여 그 영혼은 결국 구원을 얻지 못한다. 따라서 이 말씀은 장차 그의 제자들이 성령에 의하여 사역을 하게 될 것임을 시시하신 것이다.
끝으로 주님은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11,12) 하셨다. 우리는 사도들과 또 스테반이 어떻게 위정자들 앞에 서서 담대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였는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성령에 의존하지 않았다면 권세자들의 위세에 눌려 떨며 목숨을 구걸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의 주인이 누구임을 알고 있으며 또 다시 살릴 수 있는 권세자를 믿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다.
II. 제자의 가치관(13-34)
(눅 12: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A. 인생의 재물관(13-21)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19)
두번째 단락은 흥미로운 말로 시작된다. 무리 중 한 사람이 예수께 나아와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누게 하소서”(13) 하였다. 이에 주님은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며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셨다.
이 말씀은 제자 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더하고 있다. 주께서 앞에서 제자 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먼저 그 영혼의 소유자를 인식하고 오직 마음을 굳건히 하여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면 두번째로 깨우쳐야 할 것은 재물관이다.
사실 재물이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물질이다. 먹고 입고 사는 것이 모두 재물에 달려 있고 그 재물의 유무에 따라 세상을 사는 지위가 달라진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은 마치 기업과도 같다. 오히려 기업보다도 더 완전하다. 그들은 세금 한 푼 내지 않고도 재벌과 같은 행세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주께서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복음의 제자 된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재물을 위한 재판관으로 삼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예수를 팔아 돈을 모으고 있는가?
주님은 이를 말하여 곳간에 쌓아 둘 곳이 없이 곡식과 물건이 많은 부자가 자기 영혼을 가리켜 스스로 말하기를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할 것이나 하나님께서 오늘밤 네 영혼을 두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다고 하셨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재벌들이 돈을 모으기에 급급하고 있는가? 그러나 이들이 쌓을 곳이 없도록 모든 재물들이 과연 그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었는가? 차라리 그가 지혜가 있었더라면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샀을 것이다. 결국 재물은 그의 우상이 되어 그 영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B. 인생의 목표(22-34)
계속하여 주님은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22) 하셨다. 오늘 주께서 이처럼 재물에 대하여 강조하시는 것은 장차 교회시대에 나타날 잘못된 재물관을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온 정열을 쏟고 있다.
주님은 먼저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고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하셨다. 주께서 다른 새들을 다 두고 까마귀를 예로 드신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그만큼 까마귀는 자기 생명을 위해 본능적으로 먹을 것을 찾아 내는 능력을 갖고 있다. 예수께서 우리를 까마귀에게 비유하신 것은 어쩌면 우리로 목숨을 위해 음식을 탐하는 육신적 본능의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을 염두에 두셨는지도 모른다.
또한 주님은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크게 할 수 있느냐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25,26) 하셨다. 이는 세상을 살아가는 염려에 빠지 말 것을 언급하신 것이다.
사람들이 재물에 빠지는 것은 사실 삶의 염려를 채우기 위함이다. 그러나 부자의 재물이 그 영혼을 지키지 못하였듯이 먹고 살기 위한 염려는 무용하다. 하찮은 미물 까마귀도 주께서 기르시는데 하물며 그의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을 먹이고 입히시지 않겠는가?
이에 주님은 다시 비유를 말하여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27) 하셨다. 이 말씀의 열쇠는 복음의 제자들의 역활이다. 우리가 비록 실도 만들지 못하고 옷감을 짜지 못하여도 백합화와 같은 정결함과 그윽한 향기를 상실하지 않는다면 그 역할역 충분하다는 것이다.
또한 주께서 백합화와 솔로몬의 영광을 비유하신 것은 솔로몬은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것이 없다. 재물과 권위와 영광된 지혜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 주어진 모든 것을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살았다. 결국 그의 삶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시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28-30) 하셨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인가? 우리가 이 복음을 위하여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으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할 일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우리가 이처럼 주의 말씀에 따르지 못하는 현실은 무엇 때문일까? 현실은 가깝고 이상은 멀기 때문일까? 과연 우리가 이처럼 근심에 쌓이는 것은 주께서 우리의 현실을 다루시지 못하시기 때문일까?
염려와 근심에 쌓인 우리를 향하여 주님은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하면 이런 것이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두려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31,32) 하셨다. 이 얼마나 든든한 말씀인가? 제자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그의 나라를 구하는 것 뿐이다.
그러면 그의 나라를 구한다는 말씀은 무엇인가? 이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하여 복음의 삶에 전념하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따라 살며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그의 오심을 준비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제일먼저 우리가 할 일은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다. 이는 먼저 우리의 바라봄이 세상의 재물에 있지 않고 오직 하늘의 영광에 있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하셨다. 이 말씀들은 모두 장차 교회시대를 이끌고 갈 제자들의 인생의 가치관에 관한 것이다.
III. 사역의 우선순위(35-48)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35)
A. 주인이 혼인잔치에서 돌아 올 때 문을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자
이제 3번째 단락으로 가 보자. 우리가 성경 강해를 함에 있어 단락을 구분하여 핵심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의 장절을 나눌 때 그 당시 성경학자들은 헬라어의 특성을 따라 문단을 나누었는데 헬라어의 문장 구성의 특징은 한 문단에 한 가지 주제 곧 한가지 아이디어만을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문단별로 핵심을 발견하고 각 문단을 연결해 나갈 때 한 장에서 언급된 메시지의 주제를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앞에서 주님은 제자들의 삶의 우선 순위를 언급하시며 최종적으로 그들의 마음이 이 땅의 보물에관심을 둘 것인가 아니면 하늘에 쌓아 둔 보물에 마음을 둘 것인가에 초점을 두셨다. 이는 사람의 마음이 귀한 것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계시록 마지막 장에서 우리가 장차 들어갈 천국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곳은 이 땅에서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다. 문마다 한 진주요 길은 정금으로 깔려 있으면 성벽의 기초석은 12보석으로 이루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들을 상징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말씀 그대로 믿을 것이다. 그래야 이 땅에서의 모든 보물들을 초개처럼 여길 것이 아닌가?
이제 주님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35) 명하셨다. 허리에 띠를 띠라는 말씀은 항상 무엇을 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등불을 켜고 서 있어야 한다. 이는 그만큼 우리가 일할 세상이 어두운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종말의 세대를 사는 우리를 향하여 전신갑주를 취할 것을 명하면서 제일 먼저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라’(엡6:14) 하였다.
주님은 우리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여 “너희는 마치 그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36,37) 하셨다.
이 비유는 매우 흥미롭다. 주인과 종의 사이인데 종이 할 일을 다했다고 해서 그 종을 사례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7장에서 “종이 밭에서 돌아오면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하셨다.
똑 같은 말씀인데 이처럼 서로 상반된 비유를 하신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는 그 상황이 다른 것을 발견하여야 한다. 17장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는 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주인의 명령을 지켜야 할 순종의 문제임을 일깨우실 때 하신 말씀이고 오늘은 그 주인이 혼인잔치에서 돌아 올 때의 상황이다. 다시 말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말씀하신 것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주인이 혹 이경이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느리로다”(38) 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예수께서 오시는 날이 언제 일지 알 수 없음을 언급하셨다. 그러나 하루 중 이경은 밤 열 시부터 새벽 한 시이고 삼경은 닭 울 때 곧 새벽 한 시부터 새벽 네 시를 가르친다. 이는 사람들이 해 뜨는 시작을 짐작하지 못하고 한 참 곤하게 잘 때를 뜻한다. 또한 도둑이 가장 극심하게 활동할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밤이 깊어도 아침이 오는 해는 분명히 뜨는 것과 같이 교회의 신랑 되신 예수께서는 그의 신부들을 데리러 꼭 오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할 것은 주께서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하신 말씀과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하신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종된 자로서 재물에 마음을 둘 것인가 아니면 주인이 오실 날을 기다리며 도둑이 들지 못하도록 그의 집을 지킬 것인가에 그 의미가 있다. 바울은 종말을 사는 우리를 향하여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니라’(살전5:2-6)
B.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41-48)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베드로가 일어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물었다.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 아닐 수 없다. 22절에 따르면 위의 내용들은 분명히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주께서 하신 비유로 볼 때 종말의 때에 관한 말씀이라 궁금해졌는가 보다.
이제 주님은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 있으리로다”(42,43) 하셨다. 흥미로운 것은 주인의 집의 종들을 맡은 청지기에 관한 말씀이다. 위에서는 종들이 깨어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청지기의 역할에 대하여 언급하셨다.
청지기란 ‘분배’의 역할을 맡은 관리자이다. 이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것뿐이 아니라 주인의 노예니 자녀까지도 교육을 책임진 주인의 집의 책임자이다. 국가로 말하면 국무총리에 해당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은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라고 하셨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청지기는 주인집 종들이 잠들지 않도록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양식이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먹일 하늘로부터 오는 양식 곧 하나님의 말씀을 뜻한다. 그러므로 청지기는 주인이 그 종들을 먹이기 위해서 창고에 넣은 주인의 양식 곧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식은 한번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때를 따라 밥을 먹듯이 청지기는 그 집의 종들에게 때를 따라 영의 양식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우리가 먹는 매 끼의 식탁도 메뉴가 바뀌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매우 다양하다. 성경은 16세기에 걸쳐 수많은 종들을 통해서 모든 각 나라 사람들의 생활과 관습에 적용되도록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태는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 오는 집주인과 같으리라”(마13:52) 기록하였다.
C. 주의 뜻을 알지 못하는 자
계속하여 주님은 “만일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는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자는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자는 적게 맞으리라”(45-48) 하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알고 행한 자나 알지 못하고 행한 자나 모두 매를 맞는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라 들어가리라”(마7:21) 하셨다. 그가 누구라도 주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자는 모두 자기의 생각과 뜻을 따라 자기 창고에 재물을 쌓기 위해 불법을 행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은 어떤 종이든지 어떤 위치 어떤 책임을 맡은 자라도 종들은 그 주인의 뜻대로만 행하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담임은 담임으로서의 청지기가 되어야 하고 부목사는 부목사로서의 청지기 또한 주일학교 교사는 교사로서의 청지기 역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48b) 하셨다.
IV. 시대적 분별의 지혜 (49-59)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57)
A. 분쟁의 시작
마지막 단락은 매우 흥미롭다. 우리가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하셨다. 이는 세요 요한이 증거한 예수님을 통하여 베풀어질 성령과 불의 세례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한 신성의 능력이요 불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죄의 불의를 태우고 온전케 하기 위한 연단의 세례이다.
주께서 땅에 불을 던지셨으면 불은 붙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불은 예수께서 이 땅에서 이루실 십자가의 죽으심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의 사람들 가운데 붙은 그리스도의 불은 이제 온 땅으로 번져 나갈 것이나 이 불은 세상과 커다란 전쟁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주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하셨다. 우리는 때로 많은 분쟁에 휩싸이게 된다. 구원론이 성령론이니 종말론이니 하며 각 교단별 교리를 갖고 서로 분쟁을 한다. 사실 이런 분쟁은 청지기가 주인의 종들에게 주인의 양식을 골고루 나누어 주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에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여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계2:20) 책망하였다.
계속하여 주님은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하셨다. 이 말씀을 따르면 집 안에 분쟁이 나는 것은 불가불의 일로 여겨진다. 이는 분명 장차 교회시대에 나타난 분쟁을 언급하신 것이다. 이미 이러한 분쟁의 조짐이 사도시대에 나타나 바울은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1:10) 증거하였다.
그러나 한 집 안에서 분쟁이 일어나 서로 대립하면 결국 망하는 것이다. 주님은 이미 비유로서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눅11:18) 말씀하셨다. 아비와 아들이 싸워서도 않되고 며느리와 시어미가 싸워서도 승자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미 불을 던지셨으니 진리와 불의의 전쟁은 그 끝이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전쟁인 것이다.
B. 시대의 분변(54-57)
끝으로 주님은 무리를 향하여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하시며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을 분변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책망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지의 능력을 주셨다. 그러나 이러한 예지의 능력은 아는 것만큼 볼 수 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보물지도를 보고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너희가 분쟁 중에서 왜 진리를 분변하지 않는가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부모와 자식이 분쟁을 하면 어느 누가 이겨도 득이 될 것이 없는 분쟁인데 그래도 분쟁을 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라면 잠시 돌이켜 분변을 해 보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옳은 것이라면 스스로 판단을 하고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 아닌가?
몇일 전 우연히 방언 하늘나라에 언어인가? 라는 옥성호 형제의 책을 일게 되었다. 옥성호 형제는 이미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라는 책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 교회의 잘못된 관행들을 신날하게 파해쳤던 터라 하나님의 은사에 관한 새로운 책이 소개되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책의 중반도 읽기 전에 아연실책하고 말았다.
그 형제는 어쩌면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행하여지는 잘못된 방언의 실태에 염증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책의 서두에서 편집장은 옥성호 형제는 “은사 중지론”을 전제로 이 책을 썼다고 소개하였다.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이 책을 읽는 것이 무용하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이미 교계에 은사 중지론이 어느 정도 확산되고 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심리학에 물든 교회의 실태를 신날하게 파헤친 저자가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과 14장을 정리하면서 은사 중지론을 언급하였다니 그 형제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행여 그 형제의 판단이 사실이라면 오늘날 우리 교회의 활동들은 모두 사람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는 것이다(물론 그런 교회도 상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성령의 불을 붙이신 것이면 그 불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에 이르기까지 끌 자가 없을 것이다. 설혹 어떤 사람이 방언이 아닌 방언을 방언이라 말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방언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방언은 지식과 예언과 함께 온전한 것이 오기까지는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성경이 기록하였고 방언을 금하지 말라고 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한 집에 다섯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라 하신 말씀이 아직 실행 중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주님의 불은 이미 땅에 던져 졌고 이제 우리가 행할 것은 분쟁 중에서 지혜를 얻어 속히 화해와 용서로서 주의 뜻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에 주님은 “네가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어가고 재판관이 너를 관속에게 넘겨 주어 관속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하셨다. 이미 우리는 분쟁의 시대를 살고 있고 이제는 곧 화해를 해야할 시대이다. 우리는 모두 한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날이 가까울 것을 말씀하여 “네게 이르노니 호리라도 남김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 결단코 저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흥미로운 것은 너라는 단수이다. 이 말씀의 시작은 무리에게 하셨지만 끝까지 화해를 이루지 못하는 완고한 사람은 한 사람 바로 당신인 것이다. 이는 개인적인 문제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우리에게 하신 말씀인가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냐고 물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주님 이미 주께서 땅에 불을 던지셨으니 그 불은 온 땅에 번질 것입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불의한 마음을 태우시고 진리의 빛 가운데 의로운 사람을 세울 것이니 주여 우리로 하여 더욱 온전케 하소서 내가 정금같이 나아가오리다. 아멘 아멘(2009.10.17. 9pm) 이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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