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누가복음강해

(누가복음9:23) The Vision of Church

이요나 2009. 9. 23. 19:54

(누가복음9:23) The Vision of Church

 

(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우리는 앞 장에서 믿음의 속성과 믿음의 실제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믿음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삶의 원동력이며 또한 주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 가는 관문이다. 이 믿음이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근거를 얻지 못하며 의인의 증거를 갖지 못한다. 따라서 믿음의 교회의 실체이다.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출발한다. 그가 유대인이었든지 이방인이든지 죄인이든지 불구자이든지 남녀노소 부귀귀천 관계없이 그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오면 그는 구원을 얻는다. 따라서 믿음은 구원의 주체가 된다.

 

오늘날 이 믿음의 주체는 교회이며, 또한 믿음의 실현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말미암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주를 믿는 우리는 다 함께 그의 지체이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하나님의 나라 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주님은 그의 부르신 열두 제자를 사도로 삼으셨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믿음을 실현할 권세와 능력을 주셨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누가복음 9장은 10장과 이와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기록되었다. 이는 마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펼쳐질 교회시대를 보는 것과 같은 내용들이 전개되어 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이 땅에 나타날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보게 되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택하신 믿음의 주체들의 온전치 못함으로 나타날 비성경적인 교회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   

 

I. 사도의 복음전도 훈련(1-17)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사도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심(1)

 

A.   파송의 목적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

주님은 열두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내어 보내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셨다. 이는 열두 제자를 택하신 목적이며 그들이 맡은 바 사역적 의무와 책임이다. 또한 이는 오늘날 우리 교회의 주권에 속한 권세이며 책무이다.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며 그들이 사역 현장에서 지켜야 할 규칙을 말하여 먼저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 하셨다. 이는 참으로 쉽지 않은 말씀이다. 객지로 여행을 떠나며 자신에게 필요한 필수품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과연 복음전도를 위해 길을 떠나면서 이 말씀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의심스럽다.

 

그러나 이는 복음을 위해 길을 나서는 자들의 마음 자세를 고취시키신 것이다. 그들의 자신들의 용무를 보러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신 권세와 능력으로 천국복음을 전파하러 가는 길이다. 이들이 받은 권세가 이 땅에 것이 아닌데 이들이 이 땅의 것을 별도로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인가? 미련한 나라도 이만한 권세와 능력을 받았다며 맨둥 벌거숭이로 나간들 무엇이 두려우랴 오히려 짐이 될 것이다.

 

 

B.   사역 윤리

계속하여 주님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라(4) 하셨다. 이는 권세와 능력을 가진 자로 인하여 각 처소에서 발생될 문제들을 염려하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주관된 규칙을 갖지 않고 상황에 따라 이 집 저 집으로 거처를 옮기면 사람들 간에 시기와 질투가 생길 것이고 또 사람들에게도 혼동이 생길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위해서는 소문은 한 곳으로 집중 되는 것이 좋다.

 

세번째로 주님은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5) 하셨다. 이는 무서운 말씀이다. 복음의 사자들을 영접하지 않음으로 그들이 받을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은 그 성을 떠날 때 시행되어야 한다. 성은 고을보다 크다. 누가 어느 고을에 들어가 어느 한 집에 머물며 먹고 마시고 자면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며 하나님 나라의 복된 말씀을 전하는 데도 받아 드리지 않았다면 그의 영혼은 영원히 구원을 얻지 못하여 음부에서 슬피 울게 될 것이다.

 

C.   제자들의 사역적 효과

이에 열두 제자들은 각 촌을 두로 다니며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었다. 얼마 동안의 기간일지는 모르지만 이들이 행한 일들에 대한 소문은 온 세상에 펴져 나가 헤롯궁에까지 들리게 되어 헤롯은 심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헤롯이 죽인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혹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혹은 옛 선지자 하나가 나다시 살아났다고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도들의 사역적 효과는 먼저 정치적 문제로까지 파급되었다.

 

II. 교회와 삶의 문제(1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삽나이다 하였으니(13)

 

사도들이 모두 돌아와 각처에서 자기들이 행한 일들을 예수께 고하였다. 그러나 각 고을에서 그들을 따라 온 무리로 하여 제자들을 쉬게 하시려고 벳세다 마을로 옮기셨다. 벳세다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빌립의 고향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곳이다.

 

그러나 무리들이 이를 알고 그곳까지 따라와 주님을 그들을 영접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 하시며 병 고칠 자들을 고쳐주었다. 그러나 저녁 때가 이르러 열두 사도들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사실 그곳에 따라 온 사람들은 이미 각 고을에서 사도들과 안면목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예수께 말하여 이곳은 아무 것도 없는 들판이니 이들로 마을과 촌으로 내려가 유하여 먹을 것을 얻게 하지요 라고 건의하자 주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셨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어안이 벙벙하였을 것이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남자들만 오천명 정도였고 그들의 가족들을 합하며 육천은 족히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에게는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가 고작이었다. 그것도 무리 중의 어느 한 소년에게서 받은 것이다(6장 참조).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사람들을 한 오십명 씩 앉히라 하신 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 먹고 다 배를 채우고 그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를 거두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예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과 오늘날 우리 삶과 무슨 관계가 있으며 그의 교회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이미 지나간 날 복음서에 기록된 이적으로만 치부할 것인가?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은 과연 멈춘 것인가? 복음전파와 함께 예수께서 주신 교회의 권세 곧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들은 모두가 다 지나간 일들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다면 교회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가 교회의 머리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1:22,23)이라 하신 말씀은 무엇인가? 오늘에 와서 이러한 능력이 상실 된 것이라면 더 이상 성경의 계시는 그 효력을 나타낼 수 없으며 교회 또한 종교집단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주께서 그의 사도들에게 주신 권세 곧 우리 교회가 받은 하늘의 권세와 능력은 오늘 뿐만 아니라 세세토록 영원한 것이라 생각한다. 주의 이 말씀이 살아 있는 한 이 땅에서 굶주리는 주의 백성은 주께서 그의 손으로 떼신 떡으로 넉넉히 먹이실 것이며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칠 것이다. 이 능력은 아직 우리에게 살아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이며 그 사역자들의 사명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실 때 영과 혼과 육을 주셨고 그는 우리의 영혼을 위해 그의 진리의 말씀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필요한 것 또한 알고 계시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도 주의 지체 된 그의 백성들을 주께서 고치시고 먹이실 것을 믿는다. 이것이 교회의 맡은 바 사명이요 행하여야 할 책무이다.

 

III. 메시야 교육(18-27)  계시의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20)

 

세번째 단락은 앞에서의 내용과 또 다른 이슈를 제공한다. 앞에서는 교회가 맡아야 할 복음적 사명에 관한 것이라면 여기서는 그 사역을 맡은 자들의 삶의 목적과 사명감에 대하여 언급되었다. 흥미롭게도 예수께서는 이 단락을 여시면서 따로 기도하셨다고 기록되었다.

 

예수님은 중요한 일을 행하시던가 결정하실 때마다 기도하셨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이 단락에 나타난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도 기적을 행하신 일도 아닌데 따로 기도하셨다고 기록되었디. 과연 무엇 때문일까? 주님은 함께 한 제자들에게 무리가 나를 무어라 하느냐? 물으셨다.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고 합니다 답하였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시고 문둥이를 정결케 하시고 중풍병자를 일으키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여론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는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주님은 그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다. 이에 베드로가 답하여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답하였다. 여기서 그리스도란 히브리어 메시야의 헬라어 번역이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통하여 왕직, 제사장직을 부여 받은 분이라는 뜻이다. 이 칭호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에게만 허락 된 곧 계시 속에 감추어진 성호이다.

 

마태복음에는 베드로의 답변을 들으신 주께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셨다(16:18). 이 말씀을 하시고 주님은 이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 명하시며 제자들에게 비로소 메시야 교육을 하시며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하리라(22)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어찌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처럼 많은 이적과 기적들을 보면서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깨닫지 못한 것일까? 이는 말씀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아직 계시 속에 머물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그의 말씀을 통하여 그의 사람들에게 계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주께서 제자들에게 비로서 메시야 교육을 하신 것이다. 이 원리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에 계시는 모두 하나님의 뜻 가운데 기록된 말씀이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무리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23) 하셨다. 처음으로 무리를 향해서 십자가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는 주께서 어떤 죽임을 당하실 것을 계시하신 것이며, 그 무리 중에 자기를 따르는 자들이 있을 것을 아셨던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하신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주를 따를 자 곧 그의 제자 된 자들은 자기의 인격을 부인하라는 말씀이다. 이제로부터는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아 하나님의 인격으로 사셨듯이 그의 제자들은 그리스도로 기름부음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또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각 사람마다 지워진 자신의 사명을 위해서는 자신을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주의 사명을 받아 그 행함에 있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바로 자기의 인격으로 무엇을 행하려 하고 또 자신의 정욕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던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셨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주께 부름을 받아 헌신한 사람들을 자기 생명을 버려야 할 것을 알 수 있다. 과연 이 시대에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자가 얼마나 될까 싶다. 그러나 그 반대로 자기 목숨을 위하여 온 천하를 얻을 자도 있을 것이 암시되었다.

 

더 흥미로운 말씀은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26) 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다시 올 것에 대한 계시를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를 위해 목숨을 잃는 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임을 미리 언급하신 것이다. 또한 주님은 내가 참으로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27)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상당히 난해한 말씀이기도 하다. 주님은 아직도 오시지 않았는데 주 앞에 선 자들이 살아서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께서 그들의 눈 앞에서 현실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펼치신다면 그들은 볼 수 있을 것이다. 엘리사가 엘리야가 불말을 타고 올라 갔던 것을 본 것과 같이 말이다. 그때 엘리야는 주께서 나를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본다면 네 말이 이루어질 것이다 말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주의 말씀 속에서 펼쳐지는 것이며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의 말씀 속에 사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그의 나라를 볼 것이다.

 

 

IV. 그리스도의 교회 그리고 또 다른 패턴 (28-5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41)

 

A.   하늘에 속한 이상적 교회의 패턴

오늘 이 장면은 지상에서 미리 가보는 천국이라고 할 수 있다. 비단 이 영광스런 이벤트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초대를 받았지만 이 땅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또 다른 세상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영광 중에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초월현상에 대하여 사람들은 신화 속의 한 장면처럼 치부하려 하겠지만 믿음을 사람들 속에는 이러한 신척체험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심을 인정해야 한다. 그는 전능자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세계는 영원불멸하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물질과 비물질의 모든 세계를 총괄하고 계심을 인정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세계를 말하여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자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다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1:16,17) 증거하였다. 바울도 이미 지상에서 주를 보았고 또 3층천 하늘에까지 이끌려가 사람으로서는 알아 듣지 못한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내용을 좀더 리얼하게 경험해 보고자 한다면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일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들을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 지나간 역사에 대하여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에녹이나 아브라함이 이 땅에서 하늘에서 온 세 천사를 맞이했던 일이나 소돔성의 일들을 생각해 볼 수도 있고, 엘리야가 불 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일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모두 그들의 믿음이 하늘에까지 닿아 살아 있는 몸으로 하늘의 영광을 체험하였지만 믿음의 사람이라면 오늘날에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까지라도 동일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장래에 올 일들에 대한 환상을 보고자 한다면 굳이 하늘로 올라가는 체험을 할 필요가 없다. 이미 우리를 대표하여 사도 요한이 그 일에 대한 전체를 보았고 또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달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의 계시록이며 이미 옛 선지자들로 부분적으로 보여 오셨던 내용들이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그의 세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상에 올라 하늘의 영광을 보이신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분 자체가 창조자이시며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면 이 일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당신에게 믿음이라는 신적 도그마가 필요할 뿐이다.     

 

오늘 이 상황은 앞 단락으로부터 이어진다. 이를 위해 누가는 28절에서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 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러 한에 올라 가사라고 주석을 달았다. 따라서 예수께서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다하신 말씀은 이 사건을 지목하신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을 통해 하늘의 영광을 체험하는 나와 당신도 포함된 것이라도 믿어도 될 것이다)

 

누가는 그 때의 광경에 대하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체가 나더라(29) 기록하였다. 여기서도 우리는 주께서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화된 것을 알 수 있다. 기도로 하늘의 영광을 이끌어 낼 수 있다니 오늘날 믿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짓인가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너희가 받지 못함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용모가 어떻게 변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는 거룩하신 신성이 그에게 임하신 것이 아닐까 싶다. 따라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천지만물이 새롭게 변화될 것이라는 것이다. 바울도 그 비밀을 말하여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15:51,52)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이 영광은 믿는 자에게 믿음의 계시로서 우리가 다 함께 그 영광에 소망을 가져야 할 것이다.

 

계속하여 누가는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30,31)라고 기록하였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것은 그들이 하늘에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그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날을 준비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성경의 기록을 보건데 엘리야는 불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기록되었으니 이해가 되는데 모세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 백성들에게 분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모세가 죽어 모압 땅에 장사 되었으나 그 묘를 아는 자가 없었다 기록되었는데 흥미롭게도 우리는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가 천사장 미가엘과 다투었다는 유다서의 기록을 읽을 수 있다. 이로서 우리는 모세가 죽임을 당했으나 그의 죽음이 사역적 사명 속에 있음으로 주께서 그를 하늘로 데려 가셨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후일 주의 날이 임하실 때에 앞서 보내실 이스라엘을 위하여 보내실 두 증인 곧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에 대한 사고는 역시 모세와 엘리야 일 것이라 사려된다(11:3-10). 

 

흥미롭게도 누가는 이 때의 변화산상의 상황에 대하여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32)라고 기록하였다. 개혁성경의 번역을 따르면 이들이 본 것은 비몽사몽 간에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마가는 그들이 상당히 두려워하는 상태인 것임은 틀림없다.

 

누가는 계속하여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여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기록하였다. 이는 난해한 부분이기도 하다. 곤하게 졸다가 깨어서 두 사람을 보았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본인도 깨닫지 못하였다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도 일어난다. 나는 목사가 되기 전 동경 호라이즌 채플에서 훈련을 받았다. 히라노 목사님을 따라 세미나던 집회던 따라 나서지만 몸이 피곤하여 졸며 깨며, 또 생뚱맞은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무의식 중에 하는 말이라도 전혀 빈말은 아니다. 오히려 의식 중에 할 수 없는 말을 입이 말할 때도 있다.

 

누가는 이 말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34-36a) 기록하였다.

 

어쩌면 베드로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다면 모든 것이 다 해결 될 것이라 생각했을 수 있다. 자기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믿고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를 알지 못하고 아직 모세의 가르침을 따르고 엘리야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후일 베드로는 이 때의 일을 회상하며 지극히 큰 영광 중에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벧후1:17,18) 증거하였다. 베드로는 이 일을 증가하며 사도들의 위엄과 그들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는 계시의 말씀의 권위에 대하여 신중할 것을 경계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 교회가 가져야 할 미래 지향적인 목표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며 귀신을 쫓고 질병을 고치며 먹고 살아 가는 인생의 전반적인 책임을 수용하여야 하지만 이것이 교회의 목표는 아니다. 교회의 최종적 목표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시작과 과정이지만 믿음 자체가 목표는 될 수 없다.

 

우리의 목표는 천국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모두 그에게 속한 것이며 사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어진 믿음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속에 거한 것이다. 이것이 무너지면 우리가 행한 그 어떤 믿음도 허망한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비전이며 우리 교회의 비전인 것이다.

 

B.   패역한 세대의 네 가지 교회 패턴

그러나 오늘날 우리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영광 중에 거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와 함께 오른 변화산상 아래 곧 이 땅에 펼쳐진 또 다른 믿음의 진기한 현상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과연 어디에 속해 있는 것인가? 이튿날 예수님은 세 제자와 함께 산에서 내려 오셨다. 아마 세 제자들은 마치 천국을 방문하고 다시 사람의 땅으로 내려온 기분일 것이다. 어쩌면 신비의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느낌일 수도 있다.

 

산에서 내려 오자 큰 무리가 기다리고 있었고 무리 중 한 사람이 달려 와 소리쳐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십시요 이는 내 외아들입니다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갑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 쫒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못하였습니다(38) 하였다.

 

마가복음 9장을 보면 이 내용이 좀더 상세히 기록되었다. 그곳에 남아 있던 아홉명의 제자들은 서기관들과 변론을 하고 있었다. 변론이란 서로의 흠을 잡고 쟁론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보고 주님은 너희가 저희와 무엇을 변론하느냐?(9:16) 책망하셨다. 어린아이에게 들린 귀신 하나도 쫓아내지 못하면서 서기관들과 쟁론을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서기관이란 누구인가? 이들의 직무는 율법 곧 성경을 해석하는 기관에 속한다. 따라서 이들은 랍비 조직의 초석이 되며 이들에 의해서 유대교 경전 토라의 교훈들이 제정되었다. 따라서 서기관은 바리새인의 주축세력이며 율법사들의 근원지였다.

 

  *신학적 논쟁에 빠진 교회들

서기관의 조직은 마치 오늘의 신학자들의 전형이 아닌가? 우리는 복음서에서 서기관들과 예수님의 갈등을 발견하게 되는데 예수께서 죄사함에 대한 권세를 말씀하실 때 그들은 참담한 일로 여겼으며(9:3) 예수께서 귀신을 쫓는 일에 대하여 바알세불의 역사로 규정을 짓기도 하였다. 물론 이들 중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서기관이 제자가 될 수 이유를 말하여 나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 하셨다(8:19,20).

 

오늘날 교회의 분열은 교리적 마찰에서 비롯된다. 또한 이런 교리들은 결국 신학자들에 의해 거론 되는 것이 아닌가? 모두가 자기가 깨달은 원리에 입각하여 구원의 교리, 성령의 교리, 종말론 더 나아가 교회론까지 제정하여 자기들의 논리에 맞지 않으면 사정을 칼을 휘둘러 주의 형제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지 않는가? 성도들은 귀신들에 의해 희롱을 당하고 심하게 상하고 있는데 교회는 신학자들과 변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본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아이를 데리고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고치사 아비에게 주셨다. 여기서 패역하다는 뜻은 비틀린 상태 곧 뒤집힌 상태를 뜻하며 둘로 찢어진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특별히 주께서 세대라고 지칭하신 말씀은 매우 흥미롭지 않은가? 만약 주의 제자라고 하는 당신이 신학적인 변론에 빠져 있다면 당신도 같은 세대일 것이다.

 

이 일 후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44) 하셨다. 또한 마가복음에는 이 말씀 속에 죽으심과 부활하실 것이 언급되었다. 흥미롭게도 담아두라라는 말은 그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이는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경계일 수도 있고 또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일들은 제자된 너희가 당연히 맡을 몫이라는 것을 깨우치신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저희로 알지 못하게 숨김이 되어 깨닫지 못하여 묻지도 두려워하였다고 기록되었다.

 

  *도토리 키재기 하는 교회들

믿음이 없고 패역한 교회세대에 나타날 두 번째 돌발상황은 제자들끼리 도토리 키재기이다. 거듭하여 메시약 교육을 하셨는데도 그들은 노중에서 제자 중에 누가 크냐?하는 변론이 일어났다. 이 모습도 오늘날 우리 교회의 진풍경이 아닌가? 어쩌면 변화산상을 다녀 온 제자들이 코가 납작해진 아홉 제자들 앞에서 으쓱대지 않았을까 싶다. 이에 주께서 어린 아이를 하나 세우시고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자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48) 하셨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말씀이다. 여기서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제자에 대하여 언급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위대한 사람들을 설득하고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아주 어린 자를 예수께로 인도한 제자를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 어린아이란 누구를 가르치는가에 대한 사고가 필요하다. 어린아이란 아직 사리 분별을 할 줄 모르는 자들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들은 누구를 영접하기에 애를 쓰고 있는가? 타락하고 문제투성이 이들인가? 수준 높고 지체 높은 사람들인가?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곳마다 대형교회들이 따라 들어가는 것은 무슨 이유에선가? 역시 그들은 가버나움을 좋아하는가 보다. 그러나 주님은 가버나움아 너희가 음부처럼 낮아지리라 저주하셨다. 과연 그들이 십자가를 질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배타적인 교회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에 등장할 또 다른 패턴의 교회는 배타적인 교회이다. 이는 사랑하는 제자 요한으로부터 그 빌미가 제공되었다. 아이들은 사랑을 많이 받으면 으쓱해져 오직 자기만 잘난 것으로 착각하기 일쑤다. 아마 요한도 변화산상에 다녀오고 나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나 보다. 요한이 주께 말하여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습니다(49) 하였다. 이에 주님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셨다.

 

나는 가끔 갈보리채플 한인 사역자들과의 만남을 가질 때마다 소외감을 받는다. 차라리 척 스미스 목사나 마이크 멕킨토시와 같은 목사들과 만날 때에는 그들의 환대와 사랑에 너무 큰 은혜를 체험한다. 그런데 오히려 한국인 갈보리채플 사역자들을 만나면 그들은 항상 나를 이방인 취급을 한다. 마치 예루살렘에서 환대받지 못한 바울의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그들은 늘 정통성을 말하고 있는데 내가 보는 그들도 한결같이 타교단에서 전향하여 SOM이라는 2년 과정을 공부하고 갈보리채플 목사가 된 사람들이다.

 

나는 갈보리채플 사역의 부르심에 대하여 또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만약 누가 CCBC(갈보리채플 성경대학) SOM(갈보리채플 사역자학교)을 졸업만하면 목사가 될 수 있다면 일반 신학교제도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에도 서기관과 제사장 출신들이 제자들 속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고 그들이 바울과 항상 마찰을 빚었었다.

 

나는 주께서 성격과 배경과 출신이 서로 다른 열두 사도를 부르신 것은 무슨 이유일까 싶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모두 다르게 지으신 것과 같다 하겠다. 우리는 모두 똑같을 필요가 없다. 아니 모두가 똑같다면 오히려 커다란 분쟁이 일어날 것이다. 진리 가운데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복음사역을 하는데 있어 우리 교회가 모두 동일한 방법이 아니라도 좋다. 그렇다고 이는 모로 가도 서울만가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는 자기가 맡은 일에 충실하면 된다는 뜻이다.

 

 *은사를 남용하는 교회들

네번째 나타난 패턴은 은사의 남용에 관한 것이다. 은사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주신 것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는 데만 사용되어야 한다. 자기 기분에 들지 않는다고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이 일로 흥미롭게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에 의해서 비롯되었다. 아무래도 주께서 이뻐하시고 제자들 중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시니 남들보다 사역에 열정인가 보다. 다른 복음에 보면 이 두 형제는 그 어미까지 나서 주의 나라가 임할 때에 두 아들을 오른 쪽과 왼쪽에 세워달라고 하기까지 하였다.

 

주께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실 때가 가까우니 주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려고 뜻을 굳게 세우시고 사자들을 미리 보내어 예수께서 가시는 길을 예비케 하려고 사미리아인의 촌으로 들어 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임을 알고 환영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의 일이 자신들과 관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나아와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참으로 당돌한 제자들이다. 과연 그들이 하늘에서 불을 내릴만한 능력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들의 기세가 이처럼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을 통해서 나타난 많은 능력 때문이라 생각한다. 기고만장한 상태까지 도달한 것이다. 이에 주께서 저희를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셨다. 

 

오늘날 우리는 강력한 은사가 나타나는 교회들을 보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행하는 일들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싶을 정도로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그들은 무엇을 믿는지 모르겠지만 자기들 뜻대로 행하는 것이 보인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와 능력은 그 어떤 경우든지 간에 생명을 위한 것이지 생명을 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설혹 주를 환영하지 안는다해도 그들의 생명을 멸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런대도 오늘날 어떤 교회들은 다른 종파에서 행하는 것에 저주를 내리려고 한다.  

 

여기서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어찌하여 주께서 택하신 열두 제자들 사이에서 이런 일들이 있어 났을까 하는 의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그 상황 속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지금 주님은 장차 믿음없고 패역한 교회세대에 나타날 패턴들을 미리 보여 주신 것이다. 앞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거룩한 산에 올라 이 땅에 펼쳐질 하나님의 영광 된 교회의 모습을 보았듯이 이 또한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한 계시에 속한 말씀이다. 주님은 이러한 패역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교회의 세움을 택하심에 두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제자로의 부르심이다.

 

V. 세 종류의 구도자(57-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62)

 

A.   어느 구도자의 청원(서기관-8:19)

주께서 길을 가실 때 한 서기관이 주께 나아와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겠습니다하였다. 이에 예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58) 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이 구도자의 선택이 무엇에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는 한 세력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또 제사장과 수 많은 랍비들의 계파를 따른 세력을 구축하듯이 그 시대를 이적과 권능으로 풍미하는 예수의 세력을 구축하려 했던 것이다.

 

최근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와서 갈보리채플 신학교를 만들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나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다. 내 이름으로 또 무엇인가를 남기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나와 우리 교회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있으면 된다. 내가 있을 동안이나 또 내가 떠나간 후에도 이 말씀은 계속 지켜져야 할 것이다. 아멘!

 

B.   예수의 부르심

두번째 그룹은 예수께서 친히 부르신 사람이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셨다. 그러나 그가 답하기를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참으로 당돌한 친구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60) 명하셨다.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거부하는 사람같이 보여진다. 그러나 그는 그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율법의 요구를 다 하고 싶다는 말을 한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 사람의 도리 중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주의 부르심에 대한 장애물은 오직 율법을 거역하는 것 한가지가 남았던 것이다.

 

또한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 하신 말씀은 무엇일까? 어떻게 보면 참으로 냉엄하게 들린다. 이는 영적 우선 순위를 말씀하신 것이다. 네가 할 일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고 세상의 일은 세상에 맡겨 두라는 말씀이다. 그 모든 일이 주의 주권 속에 있음을 언급하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헌신을 함에 있어 부모의 신앙에 억매일 때가 있다. 예수를 믿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부모님이 부처를 믿기 때문에 아버지가 조상의 제사를 섬기기 때문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주의 택하신 자라면 결코 부모의 믿음에 매여서는 안된다. 믿지 않는 부모의 승인을 받고 예수를 믿는 것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의 뜻을 따라 내가 믿음으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

 

C.   또 다른 제자의 헌신

세번째 구도자는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다. 또 다른 사람이 주께 나아와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하였다. 이에 주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 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고 내치셨다.

 

때때로 여러 교단에서 공부한 신학생들과 사역자들이 갈보리채플의 목회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갈보리채플의 좋은 점을 말하여 교회들의 모순점들에 대하여 비판한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있지 않아서 보따리를 싼다. 그들이 다시 오던 길로 돌아서는 것은 자기가 배운 신학적인 교리들을 우리 갈보리채플에서 함께 수용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배운 교회의 특성은 그대로 살리고 어떤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빨리 목사 안수를 받고 싶은 것이다.  갈보리채플 목사가 되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인 줄 알았나 보다. 그러나 갈보리채플의 목사가 되는 것은 오직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은 자만이 가능한 일이다. 다른 곳은 모르겠으나 내가 있는 곳에서는 나를 부르신 이의 부르심이 없이는 절대로 들어 오지 못할 것이다.

 

사랑하는 주님! 당신은 오늘 우리에게 우라 앞에 펼쳐질 교회의 패턴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께서 부르셨으니 오직 당신의 십자가를 마음에 담아 두겠나이다. 모든 것이 주 앞에 있아오니 주께서 친히 이루실 것입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우리를 도와 주소서!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