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누가복음강해

(누가복음24:32) 뜨거운 마음이 느낄 때

이요나 2006. 7. 5. 19:24

(누가복음24:32) 뜨거운 마음이 느낄 때

 

(눅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누가는 서두에서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였습니다. 안식 후 첫날이란 주일날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23장 54절에서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더라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예비 일은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로서 금요일에 해당하며 안식일은 오늘날 토요일에 해당합니다.

 

오늘날도 안식교 종파에서는 주일을 토요일로 지켜야 한다고 고집을 합니다만 우리가 22장에서 이미 살펴 보았듯이 예수님께서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않으시겠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 곧 유대인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까지 일시 중단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의 새시대의 개막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부터 갈릴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이 주님의 장례를 위해 예비한 향품을 갖고 무덤으로 찾아 왔습니다. 예나 이제나 믿음의 행실은 여자들이 더 강렬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무덤에 도착하자 무덤의 돌 문이 열려 있고 무덤 안에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심히 놀라 근심하고 있는 여인들 앞에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나 산 자를 어찌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박히고 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였습니다.

 

이 일을 목격한 여인들 곧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그 외 다른 여자들이 달려 와 사도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였고 베드로만 무덤에 달려가 무덤 안에 세마포만 있는 것을 보고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다 기록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도들이야 말로 정말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주께서 고난 받으시기 전에 누누이 말씀하셨는데도 마이독경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런 상황이 당신 앞에 놓인다면 당신은 어떠했겠습니까? 당신 앞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옆구리에 창에 찔려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그 영혼이 떠나는 것을 목격하고 또한 시체를 세마포에 싸서 동굴묘에 장례한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였다고 할 때, 다음날 새벽 여자들이 와서 죽은 예수께서 살아 나셨다는 말을 하였다면 의심없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은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이 다 끝나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사실을 믿음으로 극복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말씀은 그 무엇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의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이성적 사고를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들이 제시하는 것처럼 죽음 저 편에 거한 신화적 요소가 아니라 현실 세계 속에 나타날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에 속한 것으로 믿음의 목표에 속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마지막 장은 기독교의 핵심교리 두 가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입니다. 부활은 죽음의 전제하에 이루어 지는 것으로 성경은 그의 죽으심이 없으면 그의 부활하심도 없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시작이며 그의 부활하심은 우리의 마지막인 것입니다. 이로서 주께서 나는 시작이요 끝이라 하신 것입니다.

 

I. 부활 후 첫날 주께서 하신 일(13)

본문에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1키로 정도 떨어진 엠마오로 내려 가는 두 제자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글로바라고 소개 되었고 한 사람은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33절 말씀을 보건데 이들은 사도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달리 세우신 70인의 제자일 수도 또 다른 제자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께서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A.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엠마오란 온천이란 지명을 갖고 있습니다. 어쩌면 두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계기로 새로운 인생을 찾아 잠시 온천에라도 할 생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우리가 흥미롭게 생각해야 할 것은 부활하신 첫날 예수께서 별로 유명하지도 않고 또 믿음이 없어 시골로 길을 떠나는 두 사람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 나셨으면 하실 일도 많고 또 먼저는 슬픔에 빠진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가서 위로를 하였어야 할텐데 말입니다.

 

나는 주님에게 있어 특별한 사람이란 것이 없음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고 나처럼 무명 목사나 위대한 빌리 그레함 목사나 동일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주님은 아침에 베드로를 만나셨습니다. 아마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사건으로 마음이 많이 상해 있을 것을 위로하시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B. 다른 모습으로

예수님은 두 사람의 길동무가 되어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는 이야기가 무어시냐?고 물으셨습니다. 성경은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또한 우리에게 흥미로움을 더해 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나타나실 때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구약에서도 소개되고 있는데 아브라함은 자기를 향해 걸어온 세 사람을 맞이하여 식탁을 베풀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일을 가리켜 부지중에 천사를 맞이하였다 소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주님은 우리 앞에 충분히 나타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초라한 나그네 일 수도 있고 어쩌면 불쌍한 걸인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 권고하였습니다.

 

  C. 무슨 일이냐?

도대체 무슨 일이냐? 고 묻는 낯선 사람의 말에 기가막힌 두 사람은 당신은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에 거기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하고 핀찬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거라는 말로 보아 그들 눈에 나타난 예수님은 이방인의 모습이었던가 봅니다.

 

물론 예수께서 그 일을 알지 못하셔서 물으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대화를 통하여 우리의 감정을 들어 내게 하시여 대화로서 합리적으로 문제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목사들에게 또 다른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목사들은 너무 건방질 때가 많다. 다른 사람의 감정 따위는 무시하고 내 의견을 주입시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 자신의 마음 상태가 어떤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일에 대하여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내가 어디서부터 떨어져 나간 것인지 다른 사람의 것을 잘 파악하면서도 자신에 대하여는 너무 모르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하게 되면 자기의 고통에 대한 감정을 털어 놓고 위로를 받게 될 때가 있습니다. 가장 좋은 카운슬링은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감정을 들어 주는 것입니다.

 

II. 사람들의 관점

두 사람은 그에게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나사렛 예수의 일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였는데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는데 이 일이 지난 지 사흘이요.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를 보았다 하여 우리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A. 죽음의 현실

또 우리와 함께 한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보았더니 여자들의 말과 같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다 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 중에 함께한 여자들이 천사를 보았다는 말을 듣고 또 무덤 안에 세마포만 개어 있었다는 말을 듣고도 그들의 관점은 바꾸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현실은 이처럼 사람들의 모든 소망을 송두리째 묻어버리고 맙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보편적으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이 믿고 고대하는 것은 성경의 선지자들이 말한 바 전쟁과 질병과 고통이 없는 그리스도께서 통치 하시는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제자들은 그 날이 속히 이를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눅19:11). 그러나 그리스도라고 굳게 믿었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 그들이 꿈꾸던 소망은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님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 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며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의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27).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두 사람을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말씀을 설명한다는 것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성경은 자세히 설명하시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한절한절 풀어서 강해를 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B. 성경의 관점

그러나 성경에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에 대한 더 많은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미쳐 살펴 보지 못했던 성경의 말씀들과 보고도 깨닫지 못했던 말씀들을 자세히 해석해 주었습니다. 주님은 창세기에 언급된 하나님께서 뱀이 여자의 후손의 뒷꿈치를 상하게 것이라 하신 말씀에 대하여 설명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후손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과 또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릴 때 하나님께서 받으실 예물은 하나님께서 친히 스스로(그 자신이) 준비하신 다는 말씀을 설명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출애굽에 언급된 유월절 어린양의 이야기와 레위기에 기록된 희생제물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희생의 전조였음을 설명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시편에 기록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의 비유와 그들이 내 수족을 찌르고 내 옷을 제비 뽑았다(시22)는 말씀과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라 한 예언과 이사야 53장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기록한 말씀의 유래를 설명하셨을 것입니다.

 

또 다니엘이 예언한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명령이 있은 지 483년이 지난 후 그리스도께서 친히 스가랴의 예언과 같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이라는 것이 제자들과 샇람들 앞에서 성취되었던 일과 또 그 일 후에 있을 일에 대하여 다니엘이 기름부운 자가 끊어질 것이라는 말씀과 그 이후에 관하여도 설명하셨을 것입니다. 아마 주께서 그들에게 강해하신 말씀을 논하지만 오늘밤이 다 지나도 끝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경강해가 얼마나 자세하고 흥미 있었던지 이미 날이 저물어 저녁이 되었고 11키로나 되는 목적지에 도달하였습니다. 말씀에 취한 두 사람은 어느새 얼굴이 홍조가 되어 예수님께 강권하여 우리와 함께 여기 머물자고 떼를 썼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말씀에 흥취되었던 기억이 있다면 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II. 그들은 결국 목적지 엠마오에 도착하였다(28)

주님은 그들과 함께 숙소로 들어가 식탁을 마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빵을 들어 축사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가 주 예수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희에게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요술의 세계의 이야기와 같은 내용입니다.

 

  A. 말씀을 풀어 주실 때

그때서야 그들은 서로 말하여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며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에게 주께서 살아나셨다고 전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두 사람을 위해 상세히 설명하신 성경 말씀은 우리들에게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왜 주께서 그처럼 오랜 시간을 그들과 함께 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엔 주께서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시고 너희들 뭐하는 거냐 내가 이렇게 살았다 이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해라 했을 것인데 부활하신 첫날 바쁘신 일정을 멈추고 자기 살길을 찾아 길 떠난 제자들에게 나타나 오랜 시간 동안 성경을 풀어 주셨는지 참으로 이해가 안됩니다.

 

지금 여기서 주님은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들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의 교회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주님은 그의 교회들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이끌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부터 지금까지 주께서 당신에게 성경의 말씀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을 당신과 함께 하셨는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어 엠마오 향하고 있으나 주님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에게 그 오랜 시간 동안 성경말씀을 풀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B. 마음이 뜨거울 때

혹시 당신은 어느 날 잘 알지 못하는 어느 목사의 설교를 들을 때 그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자세히 풀어 줄 때에 당신의 마음이 뜨거워졌었다면 이미 당신은 예수를 만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당신은 힘을 얻고 가슴이 뜨거워져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 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없나이다(렘20:9)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주와 믿음을 언약한 사이라도 믿음에서 떨어져 엠마오로 향하고 있습니다. 늘 세상과 벗하고 새로운 일들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계속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성경의 말씀을 풀어주고 계십니다. 그 여정은 당신이 계획했던 목적지에 도달하게 될 때까지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마음이 뜨겁게 달아 오르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야 주님의 계획으로 다시 돌아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당신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껴본 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생각해 보십시요? 그렇다면 당신이 가고자 하는 엠마오에 도달하기 전에 이제라도 성경을 풀어주는 사람이 만나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믿음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동료의 말이 아닌 당신의 마음을 뜨겁게 할 성경을 풀어줄 그를 만나야 할 것입니다. 다음주에 누가복음을 마치게 됩니다. 축하 파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