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누가복음강해

(누가복음10:21) 부르심과 선택의 지혜

이요나 2009. 10. 1. 15:07

(누가복음10:21) 부르심과 선택의 지혜

 

( 10:21)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우리는 9과에서 사도들의 시대 곧 오늘날 우리 교회시대를 미리 보았다. 주님은 세 제자를 데리고 변화산상에 올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성적인 천국을 미리 보이셨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 초월한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이다. 사도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는 이 날에 소망을 두고 있지만 아직 그리스도의 날은 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께서 세 제자와 함께 땅에 내려오시니 복음사역 현장에서는 세상의 악취가 풍기기 시작하였다. 어린아이를 괴롭히는 귀신도 쫓아내지 못하면서 신학자들과 교리논쟁에 정신이 팔린 제자들, 서로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교회들, 자기들과 서로 다르다고 하여 배타적인 교회들, 자기들의 감정을 따라 은사를 남용하는 잘못된 사역자들, 이들은 사실 복음사역자들이 아니다. 설혹 이들이 주께 부름을 받았다 할지라도 이들은 더러운 영들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주님은 9장 말미에서 세 종류의 사역자들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불행하게도 셋 중에 둘은 택함받지 못한 자들이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의 타락의 원인은 주께서 부르시지 않은 자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목적을 따라 목사와 교사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께서 보내신 또 다른 제자들을 본다. 이들은 이름도 없고 그들의 출신내용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제자들은 칠십이라는 완성의 수에 들은 자들이다. 주님은 이들이 세상에 나갈 때에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말씀하셨다. 부족하지만 나도 이들 속에 거하고 싶다.

 

I. 추숫꾼 칠십인 제자(1-16)

( 10: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A.   파송 목적과 배경(1-3) 추수

흥미롭게도 이들은 주께서 친히 가시고자 하는 각동 각처로 앞서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다. 이들도 두 사람씩 짝지어 보내셨다. 우리는 이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주께서 귀신들린 자들을 회복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셨으며, 또 눈먼 자와 귀머거리를 고치신 것을 알고 있다. 또한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 청년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다. 이들은 모두 무엇을 하였을까? 군대귀신에 집혔던 자는 이미 데카볼리 일대의 전도자가 되지 않았던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을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유대인에게 칠십의 숫자는 매우 의미 있다. 출애굽 때 모세는 이스라엘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70인 장로를 두었고(11:16,17) 이들은 거룩한 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또한 이스라엘의 통치기구인 산헤드린이 70인으로 구성되었다.

 

주님은 이들을 보내시면서 추수할 것은 많으나 추수할 일꾼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셨다. 그러므로 이들은 추수의 일꾼들인 것이다. 어쩌면 이들은 타락한 교회시대의 말미에 나타날 추수꾼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이미 우리 가운데 있지 않은가?

 

주님은 이들을 보내시면서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3)하셨다. 그만큼 세상은 악에 물들었고 이들은 세상에서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할 뿐이다.

 

B.   사역지침

예수님은 이들을 보내시면서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갖지 말라 하셨다. 그 이유는 이들의 사역은 이러한 것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한 것도 아니요, 계속하여 주님은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 하셨다. 이는 사사로운 관계를 가질 필요가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복음 사역자는 오직 주의 일을 위해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이 일은 재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개인적인 감정 또한 필요 없다. 이들에게는 주의 사명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변에 과연 이런 사역자들이 있을까 싶다. 모두들 은행통장을 갖고 있고 인맥을 따라 선교 헌금을 모으고 있지 않은가?

 

주님은 이들에게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 오리라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5-8) 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복음 사역에 필요한 모든 것은 주께서 모두 준비해 두심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가는 곳에 평안의 아들들이 기다리고 있다면 먹을 것 입을 것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이처럼 주께서 예비하신 구원받을 사람들이 처처에서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집 저 집 옮기지 말라 하신 말씀이다. 이는 주거지를 바꾸므로 인하여 사람들 사이에 시기와 질투를 유발하지 않기 위함이며 또 한 곳에서 활동하는 것이 복음전파의 구심점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8,9) 하셨다. 은혜의 사람들이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은 커다란 기쁨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모인 사람들 중의 질병을 고치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아주 효과적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복음현장은 너무 삭막하기 그지 없다.

 

나는 갈보리채플 사역자로 부름을 받고 미국 갈보리채플의 초청을 받은 일이 있었다. 내 생전 처음 방문한 미국 여행길이었다. 나는 수십년 동안 순복음식 집회에 익숙했던 터라 모든 집회는 다 그런 것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싼타바바라 갈보리채플에서 열린 복음사역자 컨퍼런스는 거대한 잔치였다. 척 스미스 목사를 비롯한 기라성 같은 갈보리채플 목사들이 한 자리에 모두 모였고 그들 앞에는 보기에 좋고 맛있는 푸짐한 식탁이 펼쳐 있었다.

 

강의가 끝날 때마다 식탁을 중심으로 둘러 앉아 서로의 기쁨을 나누는 현장은 천국잔치의 한 장면이었다. 몇일 후 하와이 마우이에서 펼쳐진 마이크 멕킨토시의 사랑의 축제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정말 거대한 축제의 현장이었다. 첫날 우리는 하늘보다 더 푸른 마우이 해변가 리져트 호텔 야외 정원에 펼쳐진 바베큐 뷔훼는 왕의 식탁과 같았다. 5 6일 동안 펼쳐진 모든 집회 현장마다 먹고 마실 것이 풍성하였고 그곳에서 피어 오르는 기쁨은 천국복음 그 자체였다. 그때 내가 지불한 참가비는 고작 150불이다.

 

그들의 집회에는 최고의 식사, 최고의 뮤지션, 최고의 강사들이 함께 어우른 천국잔치였다. 정말 우리나라의 집회와는 너무 대조적이 아닌가? 그들은 높은 자나 낮은 자 구별없이 모두 함께 모여 말씀을 나누고, 은혜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며 각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치유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집회는 어떤가? 대형 운동장에 모아 놓고 울고불고 손뼉치며 무엇인가를 계속 강요 받는 기도를 외쳐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충동적인 감정 속에서 헌금을 작정하여야 한다. 얼마나 대조적인가? 과연 어느 것이 성경적인가?

 

그러나 10절 이후에는 아주 냉혹하고 두려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주님은 어느 동내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말하라 하셨다. 주를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평안과 영생의 나라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는 심판의 나라이다. 주님은 저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셨다. 단지 예수를 믿지 않은 것으로 인해 이러한 심판을 받는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C.   두 도시의 반응(10-16)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특별한 두 동네의 이름을 지칭하시며 심판 때에 그들이 받을 일들을 예고하셨다. 그 도시는 먼저 고라신과 뱃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이다. 벳세다는 베드로 안드레 빌립의 고향이다. 이곳에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으며, 오병이어의 이적이 베풀어졌다. 더욱이 세 사람의 사도를 낳은 동네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또한 고라신은 가버나움 북쪽 3키로 지점에 있는 도시로서 이 도시가 왜 저주를 받아야 했는지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가버나움과 가까운 도시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무수한 소문과 이적을 보고도 복음을 배척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주님은 이곳에서 행한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 행하였다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를 하였으리라 말씀하셨다. 시돈과 두로는 페니키아 최남단에 위치한 성읍으로 서로 36키로 정도 사이를 두고 발달한 항구이며 상업요지이다. 이 도시들은 물질의 풍요함 속에서 교만하고 잔악하여 선지자들을 통해 심판을 경고받은 도시들이다. 따라서 고라신과 벳세다가 시돈과 두로에 비교된 것은 그들이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심판을 쌓았다는 증거다.

 

계속하여 주님은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까지 낮아지리라(15) 하셨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중심지역으로 예수께서 본 동네로 삼으신 제 2 고향이다. 이곳에는 회당이 있었고 백부장에 살았고 왕의 신하가 살았으며 세관이 있었다.  이는 가버나움이 얼마나 발달한 도시인 것을 증거하며 예수님은 이곳에 사시며 친히 많은 능력을 행하셨다. 그러나 그 곳 사람들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으며 변화되지도 않았다.

 

끝으로 주님은 칠십인 제자들에게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16) 하셨다. 이것으로 우리는 그들의 사역이 얼마나 열정을 갖고 있었으며 성실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II. 칠십인 제자의 사역결과(17-24)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종용이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23)

 

A.   영적 반응

칠십인이 사역을 마치고 돌아와 주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나이다하고 보고를 하였다. 주께서 이들에게도 귀신을 쫓아내 능력을 주셨던 것이다. 9장에서 어린아이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던 아홉 제자와는 대조적인 일이다. 그들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하셨다.

 

이 말씀을 통해 칠십인의 사역이 수월했던 것만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을 대적하던 무리가 도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뱀과 전갈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뱀은 누구인가? 사단의 추종을 받아 믿음의 사람들을 대적하는 자가 아닌가? 뱀이 하와에게 한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켜 의심케 하여 넘어뜨린 자가 아닌가?

 

또한 전갈은 어떠한가? 이에 한번 물리면 일어설 장사가 없다. 오늘날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갈에 물려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이들은 이성이 있으나 이성대로 생각하고 말하지 못하고 자기 이상이 있으나 스스로 이상을 펴지 못한다. 이들은 창조자와 그의 신 위에 군림하여 사람들을 노예로 삼는 가인과 니므롯의 후예들이다.

 

B.   영적 목표

칠십인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아직도 이들의 후예가 이 땅에 있음을 믿는다. 이들은 알곡을 창고에 거두기 위해 세상 끝에 보냄을 받은 추수꾼들이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그러나 귀신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셨다. 마태복음 7장에서 주님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에 들어 갈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할 것이다말씀하셨다.  

 

C.   계시 속의 사람들

21절에는 흥미로운 말씀이 기록되었다.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기도하셨다.

 

이 기도는 특별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전체적인 구조로 보아 이 일은 어쩌면 교회시대의 말미에 있을 일이 될 것이다. 부름을 받지 않은 자들의 헌신으로 교회는 날로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져 서로 변론과 논쟁에 휩싸이고 서로 배타적인 관계 속에서 사랑이 식어가고 은사가 남용될 것이다. 이미 주님은 그 열매로 나무를 알지니 하시며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며 예언하고 많은 능력을 하지 않았습니까 하리니 내가 그들에게 밝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셨다.(마태7장 참조).

 

계속하여 주님은 그들을 보시며 종용이 말하여 너희의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것을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23,24) 하셨다. 여기서 종용히라는 말은 공개적이 아닌 개인적인 개념이다. 이로서 우리는 주께서 이들에게 특별한 영안과 들을 귀를 주셨음을 알 수 있다.

 

III. 교회의 두 가지 이슈(25-42)

 

A.   성경, 어떻게 읽는가?(25-37)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세번째 단락부터는 위의 내용과 사뭇 다른 내용들이다. 그러나 면밀히 살펴 볼 때 이 내용들은 위의 내용들 곧 제자들이 하늘나라에 이름을 기록하기 위해 선택해야 할 중요한 이슈들이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고 질문하였다. 사실 그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다만 예수의 지식을 시험하고자 함이다.

 

그의 말에 주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셨다. 주님은 율법사들이 알고 있는 영생은 율법을 지키는 것인데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네가 알고 있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이에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답하였다. 그의 말에 주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들어 예수께서 구원에 이르는 또 다른 말씀을 하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곧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다 하셨는데 여기서는 율법을 지키라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은 율법을 지키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행하느냐에 문제가 있다. 이는 오늘날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어떻게 살던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과 같다. 믿어 구원을 얻은 자들은 말씀을 행하므로 영생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을 들은 율법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말하여 그러면 누가 내 이웃입니까? 물었다. 그는 자기 이웃들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이웃은 제사장 바리새인 곧 서기관 장로와 같은 귀족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예수께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며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니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물으셨다.

 

l  목사의  이웃이 누구인가?

여기서 강도 만난 사람은 물론 유대인이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고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은 여행 중이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조상들의 종교적인 관례로 인해 서로 적대감을 갖고 있어 서로 상종을 하지 않는 터이다. 주의 물음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답하였다. 이에 주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하셨다. 이와 같이 율법사는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르게 알지 못하니 바르게 행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깨우침을 주는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 사역자 된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가 생각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서로 끼리끼리 놀고 먹으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란 말이 무색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지위와 형편에 맞는 사람들을 자기 이웃으로 삼는다. 목사들은 장로와 집사들 곧 자신들에게 아부하고 칭송하는 사람들과 어울린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도 부자는 부자와 이웃되고 거지는 거지와 어울리는 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큰 계명 중 먼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내 이웃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죄인 중에 죄인 된 나를 자비와 긍휼하신 사랑으로 구원하셨으니 말이다.

 

B.   사역,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38-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장의 마지막 백미는 마르다와 마리야 자매의 이야기다. 이 두 자매는 무덤에서 다시 살아 난 나사로의 누이들이다. 우리는 요한복음 11장과 12장에서 예수께서 이 두 자매와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을 보시고 민망해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께서 이 두 자매의 집이 있는 촌에 들어 가시자 마르다가 주를 영접하여 자기 집으로 모셨다. 그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아래 앉아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이 마리아는 후일 갑시싼 나드 옥합을 깨트려 주님의 머리에 붓고 주의 장례를 준비하던 자매이다.

 

마르다는 주님을 맞는 준비로 정신없이 바빴다. 이에 마르다가 예수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않으십니까? 저에게 나를 도우라고 명하여 주세요 하였다. 이에 주님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 하리라(41,42) 하셨다.

 

이 말씀은 오늘날 주 앞에 선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아닌가?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들의 모습이며 또 두 종류의 성도들의 모습이 아닌가?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마리아처럼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가?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일하므로 천국을 이룰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전도다 교회부흥이다 예배다 하며 새벽부터 밤 늦까지 목회자들은 잠잘 여가조차 없다. 그러나 과연 그들은 정작 읽고 살펴 보아야 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대하여는 어떠한가?

 

그들은 마리아가 곧 다가올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위해 장례를 준비하고 있을 때 그들은 도토리 키재기를 하며 돈궤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던가?(요한12장 참조). 죽은 자의 부활의 날이 가까운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기들 스스로 천국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러나 그들은 자기 머리터럭 하나도 희게 하지 못한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머리가 하얗게 될 때가 있다. 감당할 수 없는 계시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의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하셨는가 보다. 나는 이 기쁨으로 오늘을 살고 또 내일을 살 것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뵈오니 무엇이 부족하랴!

 

후일 사도 요한은 네 생물 곧, 사자 같은 첫째 생물, 송아지 같은 둘째 생물, 얼굴이 사람 같은 셋째 생물 그리고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 넷째 생물을 보았다고 기록하였다. 그는 네 생물에 대하여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4:8) 증거하였다. 만약 당신이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면 당신에게 천국은 멀지 않을 것이다.

 

주님! 어리고 어린 소자에게 이 말씀을 보게 하시니 영광 중의 영광입니다. 나로 이 말씀을 보이셨아오니 이제 나로 이 말씀을 이루어 짐을 보게 하소서. 주의 날이 가까웠음이니이다. 나로 하여 벗어 버리지 못한 율법사의 옷을 벗고 자비의 사마리아인이 되게 하소서 주께서 가까이 계심을 내가 아나이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