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14:34) 제자의 역할과 가치
(눅 14:34,35)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 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서문) 성경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가치에 대하여 두 가지로 비유하고 있다. 그 하나는 등불이며 또 다른 하나는 소금이다. 다시 말하여 빛과 소금이다. 등불은 자기 스스로 빛을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집 주인이 자기 집 안을 밝히기 위하여 등불을 켜 등경 위에 세워 두는 것이다. 그러나 등불은 낮에는 필요가 없다. 진리의 빛이 세상을 밝히기 때문이다.
또한 소금의 가치는 그 우선 순위에서 단연 맛을 내는 것이다. 소금은 먼저 그 물체에 들어가 맛을 내고 음식을 상하지 않게 보전시키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금의 균형이다. 너무 많아서도 너무 적어서도 않된다. 그것은 자기의 맛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들어가 그 식물의 본연의 맛을 내야하기 때문이다.
I. 초청자와 초대인의 자세(1-14)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1)
A. 초청의 의도
이 이야기는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서의 일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집 주인이 예수님을 안식일 저녁에 초대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고창병 든 사람이 있었다. 고창병이란 복수에 물이 차는 병으로 요즘 간경화증과 같이 심장, 신장, 간장에 병이 들어 물이 차는 중병이다. 고창병 든 사람이 누구인지 또 어떻게 바리새인의 두령 집 안에까지 들어 올 수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전후 사정으로 볼 때 이는 집 주인이 파 놓은 함정이 틀림없다. 누가는 이를 말하여 ‘저희가 엿보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이 모든 정황을 알고 계신 예수께서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고 물으시니 그들이 잠잠하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며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을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 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아무도 답변하지 못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정공법으로 대응하셨다는 것이다. 저희가 예수를 책잡으려 하는 것을 뻔히 알고서도 피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들이 원하는 일을 그대로 행하여 그들로 놀라게 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와 생명의 질서와 원리에 입각하여 말씀하심을 통해서 그들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하셨다.
타 교단 목사들과 성경공부를 하는 곳에서는 늘 당혹스런 장면이 연출된다. 제자들과 진리의 말씀을 분변할 때에는 모두 흥미진진한 얼굴로 숨을 죽이고 감격스런 눈으로 경청하는데 목사들과 떡을 뗄 때에는 항상 불협화음이 일어난다. 그것은 대부분 성경해석에 관한 문제이다. 그런 일을 겪고 나면 나도 감정이 있는지라 얼굴이 달아 오르곤 하지만 오늘 예수께서 행하신 정공법을 보니 진리는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B. 초대받은 자의 자세 –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아마 그날은 바리새인의 두령이 예수를 초청한 자리인지라 지체 높은 많은 사람들을 함께 초청했는가 보다. 그의 생각은 여러 지도자들 앞에서 율법을 스스로 어기는 예수님의 죄를 다루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때 각 사람들이 그 집에 들어 오면서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하는 것을 본 예수께서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의 저를 청한 자가 외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8-9)
여기서 주님은 혼인잔치라 말씀하여 초청받은 자리가 영광스러운 자리임을 주지 시켰다. 오늘날은 누가 결혼을 하려면 조금만 연고가 있어도 다 불러 들이지만 혼인잔치의 초청이란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축복의 자리로서 오직 연회장이 초청한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초청받은 사람이 우쭐하여 스스로 상석에 앉는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기를 격상하는 처사이다. 혼인잔치에는 주인과 연회장의 초청에 따라서 그 서열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결혼식장은 신랑신부의 친지들과 주빈이 앉는 자리가 정해져 있듯이 혼인잔치의 자리는 아무리 초청을 받은 자라도 자기 임의로 상석에 앉지 못한다.
이 말씀을 하시며 예수님은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때에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나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0,11)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의 격을 갖출 수 없는 원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과 관련하여 성경에서 아주 흥미로운 사건을 볼 수 있는데 바로 바벨론 제국을 일으킨 느부갓네살 왕의 일이다. 그 당시 그보다 더 높은 왕은 없었다. 그는 바벨론 제국을 세우고 현대공법으로도 불가사의한 공중 수중정원(hanging garden)을 거닐며 말하기를,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그러나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누가 세상의 통치자이며 지배자인지 알게 하셨고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각인 시켜셨다. 결국 그는 그의 영혼이 혼미해져 7년 동안 들짐승들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었으며 그의 몸은 이슬에 젖고 그의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이 그의, 손톱은 새 발톱과 같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하신 시한이 찼을 때 그의 영이 돌아 와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 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다니엘 4:34,35) 하고 인간의 미천함을 고백하였다.
이것이 인생의 삶의 원리인 것이다. 만약 당신이 교만하여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한다면 당신은 곧 인생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될 것이며 당신이 겸비하여 주의 높으심을 깨달을 때 주께서 당신의 영을 높이실 것이다. 그러나 오늘과 같은 현실주의 세상 속에서 이 진리의 원리를 깨우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치가, 사업가, 연예인 더 나아가 대형교회 목사들의 하는 짓거리들을 보라 결국 그들은 땅 아래까지 내던져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말석에 앉기를 자청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혼인잔치의 주인이 겸손한 당신을 높여 여러 사람들 앞에 영광을 얻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높이시리라."라고 했으며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라고 증거하였다.
II. 당신의 목회는 어떤가? (15-24) – ‘부활시’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15)
A. 누구를 청할 것인가?
예수님은 이와 같은 원리를 말씀하신 후 초청자의 입장에 대하여도 언급하여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데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베풀려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12-14)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은 ‘부활의 때’이다. 지금 예수님은 혼인잔치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공중재림을 언급하고 계신 것이며 그날에 당신의 부활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천국 혼인잔치에 초대받을 사람들로 어떤 고객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가를 묻고 계신 것이다.
(나의 이러한 적용적 해석에 이의를 가져도 좋다. 그것은 당신의 마음이다. 그러나 당신이 이 말씀을 듣고 지금이라도 돌이켜 이 세상에서 소외받은 자들곧, 가난하고, 불구자되고 절며, 소경된 자들을 만찬에 초청하였다면 그 날에 당신은 영광의 자리에 않게 될 것이다. 당신의 초청자들이 모두 신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B. 잔치의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
예수님이 초대받은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던 한 사람이 예수님의 말을 듣더니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15) 말하였다. 이 사람이 어떤 의도에서 이 말을 하였는지 우리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우리도 가끔 어떤 말을 들을 때 무의식 중에 옳은 말이 튀어 나올 때가 있다.
이에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 되었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나는 밭을 샀으니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데 나를 용서하라 하고 또 하나는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려 가니 청컨데 나를 용서하라 하고 또 하나는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 지라”(16-20) 말씀하셨다.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때 각 사람이 자기 일로 바쁘면 아무리 잔치라도 가지 않을 수 있지 않느냐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자기를 초청한 자와의 관계가 소원하였을 때 할 수 있는 말이며 만약 그가 자기를 초청한 사람이 누구이며 그 잔치가 어떤 잔치인지 알 고 있었다면 세상의 일로 사양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 어떤 목사가 대형교회를 새로 짓고 신학교를 세웠기 때문에 그 일로 하여 주의 잔치에 부름을 거절하였다면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잔치 두 번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만약 당신이 세상 재미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이건 더 큰일이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도 당신을 다시 깨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고전 7:33) 라고 말한 것인가?
C. 주인의 대응
그러나 정해진 잔치를 미룰 수는 없다. 모든 것을 다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객석에 들어와 자리를 체워야만 한다. 이제 주인은 종들에게 ‘빨리 시내와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21) 하였다.
명을 받은 종들이 급히 나아가 사람들을 데려 왔으나 아직 자리가 남아 있는지라 주에게 고하였더니 주인은 종에게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21-24) 하였다. 이것으로 우리는 이 잔치의 중대성을 알 수 있다. 이 잔치는 단 한번으로 끝난다. 나 중에 다시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D.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는가?
1960년대 미국은 밭을 산 자와 소를 산 자와 장가 든 자로 가득찼다. 미국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1세기 동안 세계 최고의 국가로 일어섰다. 그 가운데 교회들은 부흥과 전도로 바빠져 연일 자기네들 천국잔치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시내와 거리와 골목에는 가난한 자와 병신들과 저는 자와 소경으로 가득차 있었고 아무도 그들을 돌아 보지 않았다.
그 당시 17년 동안 실패를 한 척 스미스 목사는 사랑하는 아내 케이 여사와 함께 힘겹게 생활을 하고 있었고 롱 비치 해변을 거닐던 두 부부는 도요새처럼 해변과 거리를 방황하는 젊은 히피들을 보며 길 잃은 양들을 보는 상한 심령으로 통곡을 하였다. 대형교회와 유명목사들로 넘치는 미국 현실 가운데 아무도 이들을 불러 모으는 목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척 목사님은 교리적 배경 때문에 성경적 진리를 행할 수 없는 목회의 비성경적 현실을 직시하고 교단을 탈퇴하고 거리를 방황하는 히피들이 자유롭게 들어 올 수 있도록 교회 문턱을 낮추었다. 그리고 찬양과 예배를 좀더 현실적으로 개편하고 다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풀어 가르치는 목양을 택하였다. 그것이 오늘 미국 최대교회 25개 중 13개의 교회를 석권한 갈보리채플의 시작이다.
오늘날 한국의 실정은 어떠하며 현재 우리는 어느 시점에 와 있는가? 세상은 앞뒤를 분간할 수 없을만큼 혼란스러워졌고 어느 때 전쟁이 일어날지.. 또 지구의 온난화로 빙하는 언제 붕괴될지 언제 어디에 지진과 태풍과 쓰나미가 일어날지,, 현대의학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인플렌자로 인류는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두려워야 할 것은 세상은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악해 지고 있고 우리 아이들의 영혼은 그 속에 잠식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 연일 좋은 밭을 사고 많은 곳곳에 지교회를 세우고 세상 사는 재미에 빠져 주인의 잔치에는 관심도 없고 눈을 돌릴 틈조차 없다.
III. 천국 제자의 지혜(25-35)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33)
A.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
예수께서 가시다가 함께 따라 오는 무리에게 돌이켜 말씀하시기를 “무릇 내게 오는 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26,27) 하셨다.
이 말씀은 그 배경적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수와 함께 하고자 무작정 따라 오는 자들을 염두에 두신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희생을 감행하고 또 자기에게 지워진 사명을 각오하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미 주님은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가 있음을 말씀하셨듯이 주의 제자들도 부르심을 따라 자기를 버려야 하는 사명감 없이는 따를 수 없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자기 십자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하나는 주께서 나를 부르실 때 계획하신 뜻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여야 한다는 뜻이고 하나는 매일 매일 삼 가운데 나타나는 육신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부모 처자 형제 자매를 어떻게 버릴 수 있겠는가? 더구나 부부는 서로의 책임이 있고 보모를 공경하는 것은 마땅히 지켜야 할 계명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좀 특별한 해석과 이해가 필요하다. 이는 혈육에 의해 복음적 사명에 영향에 받아서는 않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한가? 그러므로 여기서 ‘미워하지 아니하면’ 이란 말씀은 우리의 사역에 부모 처자, 형제자매에게는 환영받을 일은 못됨을 알 수 있다.
B. 사역의 지혜
이 말씀과 함께 예수님은 두 가지 예화를 드셨다. 먼저 주님은 ‘망루를 세우는 자는 먼저 망루가 완성 되기까지의 비용을 예산하여야 할 것이라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오늘날 대책없이 일만 벌려 놓은 한국교회의 목사들에게 하신 말씀과도 같다. 교회를 지으면 성도들이 몰려 올 것이라는 막연한 착각에 사로잡혀 장로들의 집을 담보하고 은행 빚이나 사체에까지 손을 대고 결국 짓지 못하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로하여 목사와 성도가 반목되고 결국 교회를 파는 사례까지 빈번하다.
두번째로 예수님은 전쟁터에 나가는 임금이 적군의 군세를 미리 파악하여 자신의 군세가 적군을 대적할 수 없으면 적군이 멀리 있을 때 먼저 사신을 보내어 화해를 청해야 할 것이라 하셨다. 이 두 예화는 모두 앞을 내다 보는 지혜와 전략을 말씀하신 것이다.
많은 사역자들이 믿음이라는 도그마에 빠져 버려 앞뒤 안보고 행동할 때가 있다. 어쩌면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도 마찬가지 케이스였다고 생각된다. 예수께서 이제 가기의 십자가를 지시게 될 것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앞뒤 분간없이 주님의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말하였으며, 나는 죽을 지언 정 절대로 주를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 호언장담하였다.
또한 야고보와 요한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을 보고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이들을 살라 버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였다. 이 얼마나 의미 없는 객기인가? 이처럼 사단은 복음사역에 앞장 선 사역자들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이 밀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나는 너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라’ 말씀하셨다.
C. 소금의 역할
이 말씀을 하시고 주님은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히리라 소금이 좋은 것이로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 버리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셨다.
소금의 본성은 그 맛에 있다 소금은 식물에 들어가 자기 존재가 더 없어지기까지 녹아 그 식물의 맛을 내고 또 음식을 보존 시키는 일을 한다. 소금은 자기 맛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식물의 가장 좋은 맛을 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무 많이 들어가도 너무 적어도 않된다. 이는 그 균형을 상실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 성경의 말씀은 균형과 질서를 갖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역자들이 성령, 구원 종말에 대하여 자기 중심적 해석을 하므로 믿음의 질서가 깨어지고 있다. 이는 모두 사리사욕에 사로잡힌 잘못된 사역자들의 무지몽매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의 요지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맡은 제자들이 재물에 충동을 받아서는 않된다는 말씀이다.
그로 인하여 제자의 가치를 상실하고 아무 쓸데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려지게 될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이 예고는 오늘날 이미 사실 대로 들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미리 예산하지 않고 성벽을 쌓은 사람이나 적군의 세력을 알아보지도 않고 전쟁터로 뛰어나간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 것이다.
사랑하는 주님 이 얼마나 통탄할 일들입니까? 주께서 이처럼 자상하고 간곡하게 말씀을 주셨는데도 아직도 자기의 위치와 역할을 깨닫지 못하고 술에 취한 사람처럼 달려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로 인하여 교회는 술취한 것처럼 비틀거리고 주의 성도들은 날로 죄에 빠지는 모순이 일어납니다. 주님 속히 일어나소서. 그리하여 이제 주의 오심을 준비하는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소서. 아직 이 땅에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여 속히 오소서 속히 깨우소서. 아멘아멘!
'신약강해 > 누가복음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16:16) 복음의 율법적 딜레마 (0) | 2009.11.11 |
---|---|
(누가복음15:10) REJOICE (0) | 2009.11.04 |
(누가복음13:34) 예루살렘 애가 (0) | 2009.10.22 |
(누가복음12:56) 카라즈(Charaz) (0) | 2009.10.16 |
(누가복음10:21) 부르심과 선택의 지혜 (0) | 2009.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