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15:10) REJOICE
(눅 15: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서론) 본문은 14과에서 연결된다. 안식일 바리새인의 두령의 집에 점심식사를 초대받은 예수께서는 그들의 심사를 아시고 고창병 든 사람의 병을 고쳐 주신 후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오자 그들을 향해서 주신 소망의 메시지이다. 예수님은 그들도 모두 한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사느냐 아버지의 집 밖에 나가 있는 아들이냐를 놓고 죄인이 되버린 아들이 회개를 하고 돌아 오는 과정을 설명하셨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원리를 설명하시기 위해 먼저 길 잃은 양 그리고 여인이 잃어버린 은화 한 잎을 비유로 들으신 것이다. 이 말씀 속에는 우리를 다시 깨우치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계시가 있다.
I. 첫 번째 삽화 –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다시 찾는 목자(3-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7)
A.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야 하는 이유
예수님은 먼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 다니지 아니하겠느냐”(4) 고 반문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길 잃은 양을 비유로 말씀하신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중동 지방에서는 양은 조상대대로 생계를 이끌어 가는 삶의 수단이었으며 특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양은 하나님과 자신들의 관계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메시지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기르시는 목자이심과 자기들은 양 됨은 잘 알고 있다. 또한 이러한 성경적 설정은 성경 전체에 나타나고 있는 복음적이고 또한 계시적 메시지이다.
여기서 먼저 우리는 양에 대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양은 살아 있는 생물로서 다른 생물들처럼 하나님을 아는 영혼을 갖지 못한 이성적 생물로서 자생능력이 없는 초식동물이다. 양들이 자생능력이 없다는 것은 스스로 살아갈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여 목자가 양들을 초장으로 데려가고 또 물을 먹이지 않으면 그들을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위해 스스로 먹이를 준비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만약 목자가 양들에게 꼴을 주지 않고 양의 우리에 먹을 풀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양들은 그 우리를 쑥밭이 되도록 파헤쳐 망쳐 버릴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교회 안에 분쟁이 잃어나고 스스로 붕괴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양은 귀소본능이 없다. 목자들이 매일 데리고 나가 초장에서 풀을 먹이고 물을 먹임에도 양들은 그 오고 가는 길을 스스로 찾지 못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양들은 자기의 목자를 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목자는 양의 이름을 알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 하셨고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불러 내어 앞서 가면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고 따라간다 하셨다. 이것으로 보아 양들도 이성이 있어 자신을 키우는 주인과의 관계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B.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 목자는 누구인가?
여기서 우리는 한 마리 양을 잃어 버린 목자는 누구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곧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해석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초등학생도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양 일백 마리는 모두 목자의 양들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아흔 아홉 마리가 있으니 한 마리 정도는 잃어버려도 된다는 관념이 아니라 잃어 버린 양도 백 마리 중에 하나라는 사실이다. 주님은 7절에서 이 비유의 목적을 설명하여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그 잃어 버린 양 한 마리도 처음부터 일 백마리 속에 있었던 자기의 양임을 강조하셨다. 그가 만약 목자와 함께 있었다면 그 양은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잠시 자기 스스로 먹이를 찾을까 하여 무리 가운데서 나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목자의 의무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시편 23편에는 선한 목자는 양들을 푸른 초장에 누이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기록하였다. 과연 우리는 푸른 초장에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양들이 푸른 초장에 있지 못하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지 못한다면 자생능력이 없는 양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은 자생능력이 없어도 갈급하여 스스로 찾아 나서지 않겠는가? 그러면 그 양들은 길 잃은 양이 되는 것이다.
두번 째로 목자는 목자가 알고 있는 목양 수칙이 있다. 목자는 반듯이 양의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문으로 들어 가지 않는 자는 도둑이다. 이는 마을에 있는 공동 목장의 예를 말한 것이다. 목자들은 저녁이 되면 배불리 먹인 양들을 이끌고 양의 우리에 넣게 된다. 만약 이 때 목자가 양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양들이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지 못한다면 대혼란이 일어 날 것이다. 아침이 되면 목자는 양의 문으로 가서 자기의 양들의 이름을 불러내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나온다. 이때 다른 양들은 자기 목자가 아니므로 잠잠할 것이다. (참조; 요10:1-5)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또 다른 경우를 말씀하신 것이다. 목자는 양들을 데리고 초장을 찾아 다니다 해가 지면 마을로 들어 가지 못하고 양들을 위해 들판에 돌로 얼기설기 만들어 놓은 우리에 양들을 몰아 넣어야 한다. 이 우리는 임시라서 문이 없다. 그러므로 목자는 스스로 양의 문이 되어 입구에 가로 눕는다. 누구든지 양에게 들어 가려면 목자를 넘어 가야 하고 양들도 밖으로 나가려면 목자를 넘어야 한다.
그러므로 공동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이든지 들에 있는 임시 우리에서든지 양들은 양의 목자를 통하여 들어 오면 꼴을 얻고 나오며 꼴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 하셨고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않는다 하셨다(참조; 요10:6-9). 이 말씀들은 양을 치는 목자들이 양들의 습성을 잘 이해하고 목자는 양들을 배불리 먹일 책임이 있음을 언급하신 것이다.
그러나 목자는 이것만으로 그 책임을 다한 것은 아니다. 영의 생명은 목자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선한 목자란 어떤 의미인가? 착한 목자라는 뜻이 아니다. 이는 제 양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 그가 선한 목자이다. 양은 항상 이리의 공격을 받게 되어 있다. 만약 누가 임시로 삯군을 고용한 것이라면 이리가 오면 삯군은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도망 갈 것이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자기 목자를 알기 때문에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 버리는 것이다. (요10:11-16)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의 양들은 이리에게 공격 당하지 않고 있는가? 그렇다면 아직도 교회 안에 담배 피며 술마시며 성중독과 동성애에 빠진 사람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부가 싸워 이혼하고 자녀들이 집을 나가고 교회가 온통 문제 투성이 인 것은 무슨 때문인가? 그것은 목자가 양들을 좋은 꼴 곧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지 않고 젖을 짜내게 하고 털만 깎기를 원했기 때문에 양들의 삶이 모두 이리 떼에게 도둑을 맞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양들의 문제를 만나면 전문가에게 보내고 저희들은 가만이 앉아서 양의 털을 두르고 양의 젖을 짜는 일에 몰두한다. 이들이 모두 삯군 아닌가?
C. 예수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목자이다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작품이다. 어떤 사람들은 유리하는 가인의 족속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가인의 뿌리는 이미 노아의 홍수 때 다 죽었다. 죄로 물든 세상은 노아로부터 다시 시작되었고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의인의 자손들이다. 다만 그들이 우리에 들지 않아서 목자의 인도를 받지 못하고 스스로 살아 갈 수 없는 본능을 이끌고 살려고 애를 쓰니 마귀의 밥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 우리 안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10:16) 하셨다.
II. 두 번째 삽화 – 잃어버린 은화 한 잎을 다시 찾은 여인 (8-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 15:10)
A. 은화는 비인격 물질이다
예수께서 두번째 보여주신 그림은 한 여인이 잃어 버린 드라크마 한 잎에 관한 비유이다. 이는 앞에서 보여 주신 삽화와는 다른 비인격 물질이다. 양은 이성이 있어 목자를 만나면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목자의 인도를 따라 들어오면 나가며 생명을 풍성이 얻을 수 있지만 잃어 버린 은화 한 잎은 누가 찾기 전에는 그 가치를 나타낼 수 없다.
그러나 똑 같은 은화라도 누가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다르다. 돈이 많은 재벌에게 5만원짜리 지폐는 껌 값도 아니다. 그러나 결혼 지참금 50만원의 중에 오 만원 권 지폐 한 장은 그 위력이 대단하다. 그 한 장이 없음으로 하여 결혼은 성립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은화는 그것을 누가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 용도와 가치를 나타낼 수 있다.
B. 유통하는 화폐 데나리온을 예로 들지 않고 은화를 예화로 든 것은 특이하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께서 그 당시 통용되는 로마화폐 데나리온을 예로 들지 않고 헬라시대의 은전 드라크마로 예를 든 것은 매우 특이하다. 이것이 본문의 계시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열쇠이다. 헬라 은전 드라크마는 헬라시대 노동자 하루 품삯으로 1 데나리온 보다 조금 가치가 있는 은화이다. 그러니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있어서는 골동품에 해당한다.
예수께서 오늘 잃어버린 은화 한 잎을 비유로 하신 데는 커다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열 드라크마는 그 당시 결혼한 여인을 나타내는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팔레스틴의 여인들은 시집을 가게 되면 신랑으로부터 은화 열잎을 선물로 받게 되는데 그것을 은실에 꿰어서 머리에 얹어 자신이 결혼한 여인임을 증명하게 된다. 그러므로 은화 열 잎은 오늘날 결혼 반지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C. 은화 한 잎의 가치
따라서 결혼한 여인의 은화 열 잎은 매우 소중하여 남편이 사업에 실패 하드라도 그 은화만큼은 손을 댈 수 없다. 그것은 그 여인의 가장 소중한 결혼 증명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은화 한 잎을 잃어버렸다면 어떻게 될까? 아홉개만을 머리에 얹으면 그런대로 묵인 될 수 있는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 은화 열 잎은 모두 함께 실에 꿰에 머리에 얹을 때 그 가치를 갖게 된다.
이렇게 소중한 은화 묶음에서 한 잎을 잃어버렸다면 어떻게 할까? 당신 같으면 시장에 나가서 다른 은화 한 잎을 사다가 채울 것인가? 그러면 그 물질적 가치는 동일할는지는 모르지만 그 은화는 나를 아내로 맡기 위해 땀을 흘려 모은 돈으로 산 남편의 사랑의 징표이다.
D.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부지런히 찾아야 하는 이유
그러니 한 잎은 잃어버린 여인은 그 은화를 찾기 위해 온 정신을 쏟을 것이다. 여인은 잃어버린 은화 한 잎을 찾기 위해 먼저 등불을 켰다. 그 이유는 그 당시 팔레스틴의 집은 50센티 정도의 창문 하나만 있을 뿐이라서 몹시 어두웠기 때문이다. 어두운 집을 밝히는 데 등불은 최고이다.
그 다음 여인은 집을 쓸었다고 했다. 그 이유는 그 당시는 집 안에 갈대를 깔고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은화를 찾기 위해서는 쓰레기를 쓸어 내야만 할 것이다. 이 때 주의 할 것은 쓰레기에 은화가 함께 휩쓸려 나가지 않도록 알곡과 가라지는 골라 내듯이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자 이쯤 되면 당신도 눈치를 챘을 것이다. 이 여인은 누구를 상징하며 은화 한 잎은 무엇을 뜻하는지를…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는 주님과 정혼한 여인이다. 그는 우리에게 자기 목숨을 내버려 값을 치르고 산 예수님의 신부이다. 이제 언약하신 때가 이르면 신랑이 우리를 맞이하러 오실 것이고 그때까지 신부는 하나님의 성령에게 맡겨져 신부 수업을 하여야 한다.
또한 이 땅의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한 지체이다. 하나라도 잃어버릴 수 없는 귀중한 존재들이다. 피의 값으로 산 신부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보내어 우리를 지키시고 도와 신부 수업을 맡기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지체 된 신부 하나를 잃으면 어떻게 될까? 아홉이 있으니 만족할까? 그건 아니다. 성령의 임무는 하나도 잃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둠에 가리워 하나도 잃지 않게 하기 위하여 진리의 등불을 켜야 한다. 그러나 다 중요한 것은 먼저 신부로 단장하기 위해 더러운 쓰레기들을 치우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E. 여기서 여인은 성도의 보혜사 성령을 상징한다
계시록 19장에는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 되었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계19:7,8)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8) 하신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찾도록’이란 단어이다. 이는 찾을 때까지라는 뜻으로 멈추지 않는 것을 뜻한다.
계속하여 주님은 “또 찾은 즉 이 여인은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므카를 찾았노라 하리라”(9)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잃은’ 이란 단어 앞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다. 이는 6절의 잃은 양에서도 동일하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잃어버린 양 하나는 한 마리가 아니며 잃은 은화 한 잎은 결코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전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0)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잃어버린 은화 한 잎의 비유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 올 죄인을 뜻한 것이다. 이 죄인을 온전한 성도로 만들기 위하여 성령은 이처럼 우리 교회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비유하신 이 여인 또한 성령의 상징으로 보아도 지나친 비화는 아닐 것이다.
III. 세 번째 삽화 – 잃어버린 한 아들을 다시 얻은 아버지(11-32)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눅 15:24)
A. 두 아들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보여 주신 그림은 아버지와 두 아들에 관한 비유다. 이는 이미 앞에서 언급된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기쁨’에 대한 결론에 해당된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는 기쁨, 잃어버린 결혼 기념물의 구성체인 은화 한 잎을 찾는 기쁨, 이는 우리 생활 속에서 흔하게 경험할 수 있는 기쁨이다. 그러나 이것은 잃어 버린 아들을 다시 찾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다. 흥미롭게도 NIV 성경은 이 기쁨을 ‘Rejoice’ 가 아닌 ‘Celebrate’라는 단어로 번역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두 아들의 아버지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두 아들에게 대한 기록이 너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궁극적으로 성경에서 요구는 약속의 아들 곧 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이삭의 뜻은 웃음이다. 하나님은 침례를 받고 물 위로 올라 오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노라’ 하셨다.
원래 사람은 오직 한 사람으로 지음을 받았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하심을 얻은 아들을 얻기 위함이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부터 이 땅에는 기쁨의 아들과 고통의 아들 태어나기 시작했다. 아담에게 있어 아벨은 기쁨의 아들이었고 가인은 고통의 아들이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통의 아들은 아비의 근심이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언약의 아들 이삭을 희롱하는 이스마엘로 인하여 근심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얻은 기쁨의 아들 이삭도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 에서로 하여 근심하였다. 그는 육신의 소욕을 따라 행하는 아들이었기 때문이다(창27:46,히12:16).
B. 이스라엘과 이방인
이 땅의 민족은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얻은 이스라엘이며 그 외에는 모두 이방인들이다. 이방인 중에 아브라함은 한 사람으로 출발하였지만 하나님의 기쁨이었고 그 기쁨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기뻐하신 것은 그들은 언약의 백성으로 예배와 율법이 그들에게 있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방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은 육체의 기쁨을 위하여 세상신을 섬기며 전쟁을 일으키며 살아갔다. 이 고통은 아직까지 끊이지 않고 있다.
C. 의인과 죄인
성경은 의인과 죄인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여기서 죄인이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며 의인이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을 뜻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열심히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복음을 전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죄인의 의미를 우리가 생각한 것과는 또 다른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사실 오늘 이 말씀은 죄인들을 받아드리는 예수님의 행동에 반기를 드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그들이 죄인이라고 부르는 세무 관원들과 죄인들을 향하여 말씀하신 메시지이다. 주님은 그들이 죄인됨에 대하여 부인하지 않으셨다. 또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의인이라 말하고 있음도 부인하지 않으셨다. 다만 여기서 주님은 의인과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를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의인에는 회개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라 칭하셨다. 그러나 다음 장 누가복음 16장 말미에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모두 의인되지 못함을 증거하고 있다. 바울은 이 말씀을 예증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를 향하여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9:5-7) 기록하였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의인에 대한 자각과 우리가 죄인이라 하는 관점에 대한 재인식이다. 과연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의인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증거하였는가? 만약 의인이라 생각하는 우리에게서 의로운 삶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과 같은 생각 같은 말 같은 행동을 하며 자신의 기쁨과 소욕을 위해 살아간다면 과연 그들이 교회생활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믿음이 아니요 종교활동일 뿐이다. 나는 이들 또한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D. 두 아들
오늘 예수님은 본문에서 두 아들을 증거하시며 그 둘째가 아비에게 자기에게 돌아 올 재산의 분깃을 달라고 청하여 그 살림을 각각 나누어 주었는데 둘째는 며칠이 못되어 재물을 모아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한 생활로 재물을 허비하였다고 말씀하셨다.
흥미로운 것은 아비는 둘째 아들을 잘 알면서도 말리지 않았다는 것이며 둘째 아들은 분깃을 받자 며칠이 안되어 아비 집을 떠나 먼 나라로 떠났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을 읽으며 예수께서 지금 나를 바라보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롭게도 내 아버지는 두 아들을 두셨다. 나와 내 동생이다. 어려서부터 영리하다고 칭찬을 받던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급속하게 세상을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군대를 제대하자 마자 학업을 채 마치기도 전에 스스로 무엇인가 해보고 싶은 생각에 빠져 어머니를 졸라 땅을 팔아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사업을 해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 내 육신의 정욕대로 한번 멋지게 살아 보자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이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나는 갈수록 만신창이가 되었고 내 한 목숨을 빌어 먹을 기운 조차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는 집 나간 아들이 돌아 오기를 기다리고 계셨고 이 아들이 올바른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는 일념으로 생을 마치셨다. 나는 오늘날 내가 이처럼 하나님 앞에 돌아 설 수 있었던 것은 탕자 아들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기다리시는 내 어머니의 사랑과 간곡한 기도였다고 믿고 있다.
나는 여기서 왜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고집을 막지 않았는가 생각해 보았다. 우리 말에 자식에게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하듯이 어느 부모가 자식의 빗나간 마음을 꺾을 수 있겠는가? 이미 그 마음에 세상의 것으로 가득 차 버렸는데 그 마음에 찬 세상의 더러움이 그의 영혼과 몸을 사로잡히기까지 그 아들의 마음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것이 죄의 속성 아닌가? 흥미롭게도 아비의 분깃을 받은 아들은 며칠이 못되어 아비 집을 떠나 먼 나라로 나갔다는 것이다. 이처럼 죄의 화살은 빠르며 가장 먼데로 날아가고자 힘을 쓴다. 그러니 이처럼 아비 집을 나간 아들을 위해 당신이 할 일은 무엇인가? 이는 절실한 사랑과 하늘에 닿는 인내 뿐일 것이다.
아들이 모든 재물을 탕진한 후에 그 나라에 흉년이 들었다. 궁핍해 진 그는 이방인 사람에게 붙여 살며 돼지를 치며 돼지의 주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여도 주는 자가 없었다. 이것이 세상인심이다. 나는 과거 십여년 동안 이태원을 주름잡으며 많은 돈을 벌며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았다. 그러나 나를 위한 행운은 항상 따르지 않았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칼날은 나만 향하신 것처럼 느껴왔다.
사업은 날로 힘들어지고 악의 세력은 내 숨통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고통을 벗어버리고자 짐을 싸 들고 일본으로 도망을 갔다. 그 사이 내가 운영하던 여러 개여 사업장은 지진을 맞은 듯이 무너졌고 나는 졸지에 국제 고아가 되고 말았다. 평소 나를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 그들은 마치 나는 더러운 벌레 보듯이 피하였다. 이때 내가 바라볼 수 있는 것은 하늘의 아버지뿐이었다. 다행이 내 영혼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돌아 갈 곳은 세상천지에 오직 하나님의 집 뿐이었다.
죄에 빠진 아들이 돌아 갈 곳은 오직 아버지의 집 뿐이다. 이것은 자신이 죄를 얻었다는 것을 자각할 때에 깨닫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내가 이태원에서 한 세상을 호령할 때에는 이미 예수를 믿고 있었고 나는 어느 교회의 유명한 사람이 되기 까지 하였다. 나는 세상이 다 아는 죄의 허울을 쓰고 살면서도 그들은 나를 영접하여 주었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은 내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주지 못했다.
이것은 이 땅에 모든 교회가 갖고 있는 딜레마 중에 하나이다. 그들은 내게 사영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영혼의 구원자이심을 가르쳐 주었고 하나님은 나를 축복하실 것이며 성령은 나를 지켜 줄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벗어야 할 구체적인 삶의 죄된 실상을 설명하지 못하였고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예수를 믿으며 인생에 복이 온다고 가르쳤다. 12년의 세월 속에서도 나는 변하지 않았고 나는 점점 더 악의 세상을 향해서 급속도로 달려갔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아비를 떠나 허랑방탕한 아들이 한 아버지의 아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세상의 고통 속에서 아버지의 집이 얼마나 풍요롭고 평안한가를 깨닫고 그때서야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아버지의 집을 향하였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 돌아 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아버지께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칭할 수 없으니 품군의 하나로 여겨달라고 간청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에 대한 의미를 깨우칠 필요가 있다. 회개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 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집에서 아버지의 뜻 가운데 사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담배 피며 술 마시며 음행과 간음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면 당신은 아직 하나님께 돌아 온 사람이 아니다. 당신은 아직 아버지의 집을 나가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많은 은혜의 선물들을 탕진하고 있는 아들이다.
아들이 돌아 왔을 때 아버지는 더 없는 기쁨에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게 하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 함께 즐기고자 잔치를 벌리며 ‘이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였다. 그는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았다 하였고 잃은 아들을 다시 얻었다고 하였다. 당신은 이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가?
바울은 우리에게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듯이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3,14) 증거하였다. 만약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당신이 영으로 인도함을 받으며 육신의 소욕을 따르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버지의 집에 있는 의인이다. 그러나 당신이 만약 입술로 주여 주여 하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면 당신은 결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마7:21). 그러므로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모두가 한 아비의 아들이기 때문에 당신이 온전한 회개를 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 오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흥미롭게도 여기서 우리는 아주 대조되는 내용을 보게 된다. 그것은 집 나간 아들 곧 죽었다고 다시 살아나고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인 자기의 동생이 아비의 집으로 돌아 온 것에 대하여 또 아비가 그 아들을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준 것에 대하여 심히 분노한다. 주님의 이 말씀을 듣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과연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였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분노하였고 도리여 죄인들을 영접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였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어떤가? 그들만의 파티가 매일 열리는 대형교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의인이며 아비의 뜻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집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욕심대로 살고 있는 또 다른 모습의 아들이 있다. 이것은 바로 당신이고 당신의 가족이며 또 오늘날 의인으로 생각하는 교회의 풍경이다. 오늘 이 메시지를 받고 있는 당신은 어떤 아들인가? 큰 아들인가, 방탕한 아들인가? 이 아들들은 모두 한 아버지의 아들들이며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이다. 우리가 마땅히 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아멘 아멘 주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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