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18:41,42) 믿음생활의 여섯 가지 오해
주님은 17장에서 실족함에 대한 엄중한 책임이 따를 것을 말씀하시며 제자들의 믿음의 완전성을 요구하셨다. 만약 주의 보내심을 받은 사도들이 잘못된 지식을 유포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서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은 곧 임박할 그리스도의 날에 대한 경계의 말씀을 하셨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의 반열에 들어 그리스도의 평안을 누리다가 실족하여 잘못된 지식에 휘말려 주의 날에 데려감을 당하지 못하고 버려둠을 당하였다면 우리의 믿음에 무슨 자랑이 있겠는가?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믿음은 그 본질에서 퇴색되어 세속화되고 있다. 모두가 자기 위치에서 열심히 믿음생활을 하고 있지만 자신의 믿음을 자기 입장에서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18장에서 우리의 믿음생활과 관련된 우리의 잘못된 생각들을 살펴 보고자 한다.
I. 기도생활에 대한 오해(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이것은 날이 갈수록 성도의 기도가 삶 속에서 무의미해 갈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주님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시며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에 비유하셨다. 원래 비유란 전달하고자 하는 대상에게만 그 뜻을 전달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쏙닥어와 같은 것이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반어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공의로우신 하나님과 그의 성도들의 관계를 불의한 재판관과 의지할 것 없는 과부와 대칭하여 그 의미를 관찰하게 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을 지적하신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처럼 자기의 유익을 따라 판단하는 분이 아니시며 우리 또한 의지할 곳 없는 과부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로 판단하시며 우리 또한 그의 의로운 자녀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기도는 귀찮아서 마지 못해 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들어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제자들의 원한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제자들의 의로운 생활에 대한 세상의 핍박을 뜻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세상 사람들이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비방하고 욕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는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세상으로부터 어떻게 핍박을 받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면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말씀은 무엇일까? 이것은 주의 날이 가까워질수록 성도들의 믿음의 실체가 변질되어 의롭지 못한 것을 옳다 생각하고 진리가 아닌 것을 따르는 기이한 현상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세속화 된 믿음생활을 뜻한다. 그러므로 세상으로부터 원한을 가질 것도 없고 도리여 세상과 사둔을 맺고 있는 격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 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교회가 어디 있는가? 우리나라의 대형 교회들의 위세는 도리여 세상을 위협하고 그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러나 북한과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나 이슬람 국가의 성도들은 밤낮 그 원한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부르심을 받은 의로운 제자로서 그리스도의 진리의 복음에 바로 서 있고 주의 날이 임하기를 기도하고 있다면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주께서 세상으로부터 당하는 고통과 원한을 풀어 주실 것이며 당신을 무시한 자들 곧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진리의 입김으로 멸하시고 곧 나타나심으로 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II. 의로움 대한 오해(9-14)
(눅18: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계속하여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에 과신하는 현상이 나타날 것을 예고 하셨다. 주님의 ‘자기를 의롭다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한 비유로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두 사람을 비유하셨다. 우리는 이 비유 속에서도 감추진 퀴즈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주님은 기도하는 두 사람의 기도의 방법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람들의 도덕적 마음가짐의 상태를 설명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가 함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 가서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기도하였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하였다고 말씀하시며 주님은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하셨다.
날이 갈수록 세상은 양극화 되어 가고 있는 가운데 교회도 양극화되어 가고 있다. 마치 바리새인들과 세리가 나누어 기도하는 것처럼 대형교회는 날이 갈수록 자신들의 행위의 의로움과 믿음의 증거를 자랑하는 데 비하여 개척교회는 마치 죄인처럼 가슴을 치고 있다.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낮이 열 두 시간이니 곧 밤이 올 것이며, 나중된 자가 먼저 될 것이라는 말씀이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III. 섬김에 대한 오해(15-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17)
세 번째 문단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그를 꾸짖으시며 ‘어린아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섬김에 대한 오해를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은 마치 어른이 되어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러한 경향으로 모든 교회 교육 프로그램은 성인 중심으로 되어 있고 어린 아이들은 행사 위주 또는 어른들의 예배를 위한 격리적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진실로 말하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이성적 순수성을 의미한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믿음은 어른들과 같이 이해 타산적이지도 않고 배타적이지도 않다. 어린아이에게는 바리새인이나 세리나 구분이 있을 수 없으며 아이들은 가르침을 받는 그대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한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 주께서 말씀하신 비유는 어린 아기들의 유아세례를 언급한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유아세례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유아세례는 중세 콘스탄틴 대제 이후 귀족의 자녀들을 축복하기 위해 발생한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세례(침례)란 죄사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사함을 받은 믿음의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성령세례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침례)는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이성적 판단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도 사역에 임하실 때 침례에 임하셨다. 그러므로 유아침례는 세례에 대한 잘못 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주께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을 향한 순수성을 의미한 것이다.
IV. 하나님의 일의 행함 대한 오해(18-30)
(눅18:27)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이 부분은 우리가 다 잘아는 부자 청년에 관한 이야기이다. 누가는 그 청년이 관원이라 기록하였다. 여기서 관원이란 유대교의 지도자를 뜻한다. 그가 예수께 나아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물었다. 이에 주님은 그에게 반문하여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말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 하셨다. 이는 그가 유대교 지도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네가 계명을 아니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이는 십계명 중 사람과의 관계된 계명이다. 흥미롭게도 주님은 그 순서에 있어서도 부모와의 관계된 5번째 계명을 맨 나중에 언급하셨다. 이에 부자 관원은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답하였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유대교의 덕망 있는 지도자인 그가 아직 성경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주를 가리켜 선한 선생님이라 하면서도 주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성경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을 알고자 힘을 썼다면 메시야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비록 율법적 관계 속에서 사람과의 관계성 속에서 칭송을 받을 수 있었지만 하나님에 대하여는 무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과의 관계는 재물로 맺을 수 있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재물로 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어야 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날이 갈수록 부자가 되고 있다. 또한 부자들이 교회에서 큰 세력들을 갖고 있다. 그들은 마치 교회에서의 지위가 의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그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히5:12) 증거하였다.
그의 질문에 답하여 예수님은 “네가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누어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셨다. 이는 영생을 소망하는 그에게 영혼의 숙제를 내 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 청년은 큰 부자이므로 심히 근심하며 돌아 갔다. 그에게 있어 현실의 부귀는 영혼의 문제보다는 더 소중하였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목사들이 즐겨 설교제목으로 삼는 말씀 중의 하나다. 또한 많은 이단들은 이 말씀을 들어 성도의 마음을 협박하여 재산을 팔아 교회에 내도록 종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갈망하고 있는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그가 율법을 다 지키면서도 영생의 확신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갈급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해답은 오직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뿐이다.
또한 주님은 장차 종말의 때에 나타날 교회 현상을 언급하신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른 곳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여 사람들은 그 하는 일에 복을 받아 잘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물이 많을수록 사람들의 생활과 마음이 둔해져서 영생에 대한 갈망을 갖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왕의 신하가 주를 믿게 된 것은 그의 아들이 죽어 갈 때이다. 또한 회당장 야이로도 그의 무남독녀 외 딸이 죽어갈 때에야 주 앞에 엎드렸다. 이와 같이 유복한 생활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생각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들은 현재의 풍족한 생활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근심하며 돌아 가는 유대교 관원을 바라보며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셨다. 이에 제자들은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하였다.
이 말씀은 재물이 있는 자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재물의 속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날이 갈수록 세상은 물질주의가 팽대해져 사람들은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돈에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모든 것을 돈으로 사고 돈으로 해결하려 하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재물은 그의 우상이 되고 만다. 결국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은 종교활동에 필요한 주체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이 재물은 우상숭배라 한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예수님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말씀하셨다. 이처럼 사람들은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 곧 율법사 서기관, 제사장과 같은 바리새인들이 모두 부자였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이런 논리가 통하는 교회가 우리 주변에 많은 것을 본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하였다. 이로 보건대 사도들은 정말 위대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유대교로부터 출교를 당하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으니 말이다. 이들의 말에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로 받고 내세에서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하셨다.
금세에 있어 배로 받는다는 주님의 말씀은 참으로 흥미롭기만 하다. 과연 제자들은 후일 무엇을 배로 받은 것일까? 그들은 주를 따르는 거룩한 무리의 사도로서 존경과 영광을 한 몸에 받았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수천의 형제 자매와 부모형제들을 새롭게 만났다. 그들이 비록 원수들에게 쫓기며 목숨까지 버려야 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영혼은 평안을 누렸다.
V. 말씀에 대한 오해(31-34)
(눅18:34)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자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하신 후 계속하여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 나리라” 하셨다. 이 말씀은 구약의 시편과 이사야서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누가는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음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고 주석을 달았다. 이는 제자들이 구약에 언급된 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눈 앞에 닥쳐 왔는데도 제자들은 그 일을 알리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때를 따라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며 감추어진 계시로서, 계시란 오직 때를 따라 부르신 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성경의 비밀이다. 물론 제자들은 예수께서 고난 받으신 후 성령의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터득하였다.
오늘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성경 말씀에 대하여 알만큼 안다고 자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율법에 기록된 것을 어려서부터 지키며 존경받은 유대교 지도자로 살아 온 부자 청년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것인지를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가끔 인터넷에 올라온 유명한 목사들의 설교를 들으며 과연 이 사람은 성경을 알고 있는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의 설교에서 성경에 기록된 복음의 계시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장차 올 그리스도의 날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면서도 그 믿음이 말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여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히4:1,2) 증거하였다.
VI. 믿음의 긍극적인 비전 오해(35-43)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1, 42)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누가복음 18장 마지막 문단에는 거지 바디메오에 관한 내용이 기룩되었다.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갈릴리를 출발하신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지나 유대에서 가장 낮은 지역 여리고에 오시게 된 것이다. 이제 주님의 마지막 여행은 여리고를 지나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지역인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비된 고난을 받으시게 된다. 주님 앞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느려지고 있는 순간이다.
예수님의 일행이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자 소경이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누구냐 물었다.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라 하니 소경은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쳤다. 그러자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지 말라 꾸짖었다. 그러나 그는 더욱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쳤다. 이에 주께서 그를 데려 오라 하셨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물음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소경인 것을 아시는 주께서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대답하였다. 이는 당연한 답변이었다. 소경이 보기를 원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에 예수께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셨다. 오늘 이 짧은 대화는 선문답과도 같다. 문맥을 따라 생각할 때 깊은 메시지가 숨겨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여야 한다. 예수께서 그의 믿음을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과연 앞 못 보는 소경이 어떤 믿음을 가졌던 것일까? 또한 이 말씀을 통하여 오늘의 당신의 믿음의 현실과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소경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소리를 외쳤다. 여기서 다윗의 자손이란 예수님의 역사적 족보를 말한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이 말한 바 다윗의 씨로 오시기로 언약된 메시야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큰 소리로 외친 것은 그는 이미 나사렛 예수께서 메시아인 것을 알고 있었음 알 수 있다.
우리가 요한복음 1장의 나다나엘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날 수 없다고 믿고 있었고, 예수님은 이미 유대교에 의해 사마리아 사람 귀신의 왕이라 정죄되었던 때이다. 그러나 그는 나사렛 예수께서 오시기로 언약된 다윗의 자손 메시야인 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한 그의 답변이다. 이것은 주님의 얼굴을 보게 해달라는 의미 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는 주의 제자가 되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누가는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았다’ 기록하였다. 그의 소망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소망하였던 것이다.
누가는 그의 이름조차 기록하지 않았지만 이 소경은 디메오의 아들 바디메오이다. 흥미롭게도 ‘디메오’란 ‘명예’란 뜻입니다만 그는 걸인이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주님은 저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그 사람이나 그 보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셨다. 이것으로 우리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불구자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멸시 속에서도 바디메오는 최고의 명예를 얻기까지 그 소망을 접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오늘 당신의 믿음의 목적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혹시 요술쟁이와 같은 능력 있는 선지자가 되고 싶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주님은 당신을 향하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 내가 너를 전혀 모른다 하실 것이다(마7:22). 어쩌면 로또라도 당첨되게 해 주시기를 바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당신은 천국에 들어 가지는 못할 것이다. 혹시 위대한 당신은 야고보나 요한처럼 영광의 날에 주의 오른편과 왼편에 서게 해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 세상에 대하여 눈먼 나는 오직 주를 보기를 원한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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