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20:18) 신학논쟁
(눅 20:18)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우리가 공부할 누가복음 20장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내용들이 질문과 답변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런 관계로 어떤 학자들은 이 장을 ‘문답의 날’(The Day of Questions)이라고도 하였다. 어쨌든 우리는 본 장의 내용들을 통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경이 증거하는 올바른 신학적인 토대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I. 성령론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께서 곧 함락될 예루살렘을 바라 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면서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다. 일이 이쯤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그리고 백성들의 장로들이 모여 예수를 죽일 꾀를 구하나 백성들이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으로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20장 서두에는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하였다. 그들의 말 속에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권세는 율법에 정한 자신들이라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이에 예수님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물으셨다. 그들에게 있어 참으로 답하기 난감한 질문이었다. 만약 그들이 하늘로부터라면 그러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사람으로부터라고 말하면 백성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는 고로 돌로 칠까 두려워 하여 ‘어디로인지 모르겠다’ 답하였다. 이에 주님도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8) 하셨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다. 이들과 더 이상 말싸움을 하기 싫으셨을 것이다.
사람이 상대에 대하여 불신을 하게 되면 그가 하는 어떤 말이라도 그대로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서기관들은 처음부터 올바른 답변을 원한 것이 아니라 성전 관리와 종교적 활동에 관한 모든 권세가 율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자기들에게 있음이 은연 중 과시하며, 능히 예수께서 답변을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요한의 세례를 언급하시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권세를 말씀하시니 그들은 도리어 할 말을 잃은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질문하신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하신 질문은 신학적인 질문이다. 그들이 다른 의중을 갖고 질문을 하였듯이 예수께서도 그들이 능히 답변하지 못할 질문을 하신 것이다. 사실 요한의 세례는 종교적 관례가 아니라 성경적 계시를 따라 나타난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으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신적 증거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 일들을 예고하셨고 또 주께서 천사를 통하여 그의 출생을 고지하셨으며 실제로 요한의 세례를 통하여 증명되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오늘 우리들이 행하는 모든 예배와 교회의 활동들이 성령에 의한 것인지 사람의 생각을 따른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하늘로부터의 권세라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한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누가 하나님의 뜻과 다른 일들을 행하였다면 그가 행한 모든 일은 그가 책임져야 할 것이다.
II. 그리스도론(9-18) ‘집 모퉁이의 머릿돌’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17)
A. 포도원 비유
예수님은 비유로서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가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소출의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세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성경 역사 속에 펼쳐진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과 그의 선지자들의 일들을 말씀하신 것이다.
후일 초대교회 때에 스테반 집사도 이 일을 증거하여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이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행7:51-53) 증거하였다.
계속하여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13-16) 하셨다. 이 일은 곧 예수께서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또 그 후에 있을 하나님의 판단에 대한 예수님의 예고인 것이다.
B. 모퉁이돌과 머리돌
이 때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주께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예수님은 “그러면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은 어찜이냐”(17) 하셨다.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은 사실 시편 118편에 기록된 말씀이다. 또한 이 말씀은 성전 건축 때에 그대로 발생된 일이기도 하고 또 고대 피라미드의 역사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건축양식에서 잘 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사실 주께서 말씀하신 모퉁이돌과 머릿돌은 같은 돌이다. 이는 피라미드의 건축 구조이기도 하다. 피라미드는 모퉁이 돌과 머리돌이 똑 같은 구조로 지어지는데 다섯개의 면이 정삼각형으로 이루어져 머리돌은 다섯번째의 모퉁이돌이 된다. 사람들은 이를 우주의 구조라고도 하고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으로도 묘사한다.
이스라엘 전승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고 있는데, 성전 공사를 할 때 채석장에서 석공들이 돌을 다듬어 성전건축 현장으로 보내지는데 처음에 보내 온 돌들 중에 전혀 도면과 맞지 않는 돌이 끼어 있어서 건축자들은 이 돌을 계속 밖으로 밀어 내었다. 드디어 성전이 건축되기 직전 성전 모퉁이에 머리돌을 세우려 하니 돌이 보이지 않았다.
건축자들은 채석장으로 사람을 보내어 머리돌을 보내 달라고 하니 그것은 공사를 시작할 맨 처음에 제작하여 다른 돌들과 함께 보내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찾아 보니 자기들이 내다 버린 돌이 바로 모퉁이의 머릿돌인 것이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미 현실 속에 있었던 일이었으며 이 말씀이 또 그들 속에서도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은 가리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계 22:13) 증거하였다. 알파와 오메가란 헬라어 알파벳의 시작 음과 마지막 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모든 말과 문화와 역사이시며 태동과 종결이시며 출발과 마침이심을 언급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후일 베드로 사도는 이 일을 증거하여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행 4:11) 하였으며 바울은 그리스도를 말하여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 1:15-17) 증거하였다.
성경에서 머릿돌은 특별한 은유와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먼저 베드로 사도의 증언과 같이 이는 반석 곧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반석을 말하여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하셨고 바울은 “다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10:4) 증거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되신 반석에 대한 증거는 신약에서만 언급된 것은 아니다. 야곱은 임종을 앞두고 열두 아들을 예언할 때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창49:24) 하였고 후일 모세도 이스라엘을 인도하며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신32:4) 찬송하였으며 다윗도 노래하여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18:2; 시19:14) 기록하였다.
또한 주님은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로 가루를 만들어 흩으리라”(18) 하셨다. 여기서 ‘깨어질 것’이란 뜻은 ‘박살 나다’라는 뜻이며 ‘가루를 만들어 흩으리라’는 말은 ‘쭉정이를 키질하여 가루로 날려 버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누가 반석되신 머리돌 위에 스스로 떨어지면 그는 자신의 고집과 세상적인 삶이 깨어질 것이라는 것이며, 만약 돌이 그에게 떨어지면 그는 쭉쩡이를 키질하여 날리는 것처럼 버림을 받는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이중적 예고를 포함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이를 해석하여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딛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에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벧전 2:7,8) 증거하였다.
이러한 예고는 비단 신약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찍이 모세는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신32:15) 기록하였고 이사야는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사 8:14)라고 증거하였다.
또한 다니엘 선지자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을 구체적으로 말하여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단 2:34,34)라고 증거하였다.
그러니 이제 종말을 사는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바울 사도가 다시 우리를 권고하여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9:32,33) 증거하였다. 그로므로 이제 당신의 차례가 된 것이다.
III. 교회론(19-26) ‘세상과 천국’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A. 바리새인들의 질문 – ‘세금의 문제’
예수님의 이러한 비유의 말씀을 들은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은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임을 알고 즉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백성들이 함께 하므로 두려워하였다. 이에 그들은 예수를 총독의 치리 권세에 맡기려는 음모를 세우고 정탐군을 보내어 예수님의 말을 책잡게 하였다.
이에 그들 중 한 사람이 주께 나아와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참으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나이까 불가하나이까” 하고 물었다. 참으로 고약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오늘날도 이런 무리들이 있다. 누가 주의 말씀을 바로 말하고 가르치려 하면 영락없이 신학자들이 달려들어 무지한 말로 하나님의 사람을 시험하려 한다.
B.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그들의 간계를 잘 아시는 예수님은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물으셨다. 그들은 ‘가이사의 것입니다’답하자 예수님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하셨다. 참으로 지혜로운 답변이다. 그 누구도 옴짝달싹할 수 없는 답변을 하신 것이다. 동일한 돈임에도 불구하고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있으니 말이다.
예수님은 앞에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눅16:11) 하셨다. 이 말씀은 불의한 재물을 중히 여기고 쌓으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인 되신 하나님을 섬기지만 세상살이에도 충실하여야 할 것은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라는 말씀은 이 세상 가운데서의 교회의 위상을 언급하신 것이다. 사람들 보기에 교회는 이 세상 가운데 속한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는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 책망하였다.
IV. 부활론(27-40)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37)
A. 사두개인의 질문 – ‘부활의 문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책잡는 일에 실패를 하자 사두개인들이 나섰다. 사두개인은 제사장을 중심으로 구축된 종교세력으로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그 위세는 대단하였다.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보다 현실적인 종교그룹으로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모세가 우리에게 써주기를 “사람의 형이 만일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라”(신25:5)하였는데 만약 칠형제가 있어 맏이 자식을 두지 못하고 죽어 둘째와 셋째와 그 일곱이 다 첫째의 아내를 취하였으나 자식이 없이 죽었다면 부활의 때에 그 중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주님은 ‘이 세상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함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함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하셨다.
B. 성경의 무지 종교그룹
계속하여 주님은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눅 20:37,38) 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이 모세의 글을 이끌어 내신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신봉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여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다”(마22:29) 하셨다. 유대교를 이끌어 가는 제사장 그룹이 성경을 알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신 것이다. 이는 한국을 대표하는 교단이 성경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여 교회의 휴거와 천년왕국을 부인하는 것을 책망하신 것과 같다.
여기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무슨 뜻인가? 이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나 혈통적 자손이 아닌 하나님을 아는 믿음의 승계자인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거룩한 자의 아들을 믿는 자들과 영원토록 함께 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1) 증거하였다.
V. 성경론 - 논리학의 4법칙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43)
A. 다윗의 논중
이제 더 이상 아무 질문도 할 수 없게 되자 예수님은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41-44) 하셨다.
B. 논리학의 4법칙
여기서 우리는 어떤 사실을 증명하려면 논리학의 4가지 원칙을 지켜야 하는데 ‘사물의 정체는 그 자체가 드러내 준다’(요일5:20)는 확인 곧 긍정의 법칙이며 두번째로는 ‘자신이 아닌 것은 될 수 없다’(롬11:6; 딛3:5)는 모순(부정)의 법칙이며 세번째는 ‘두 가지 정반대로 상반되는 주장이 있을 경우, 하나가 사실이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다’(요일1:5~10) 라는 중간입장 배제(양시양비 불가)의 법칙이며 네번째로 충족시켜야 하는 것은 ‘충분한 사유의 법칙’으로 모든 결론은 그 결론을 충분히 정당화시켜 줄만한 근거에 입각하여야 한다 (행5:33~39). 이처럼 성경은 예나 지금이나 장래의 그 모든 것을 완전하게 증명하고 있다. 오늘 주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VI. 목회자 윤리관 – 종교적 관행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47)
주께서하신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46,47) 하셨다.
이 말씀은 매우 흥미로운 말씀이다. 앞에서 언급한 말씀과는 전혀 관계없는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은 20장 전체를 여는 열쇠에 해당한다. 동일한 이스라엘 민족으로 조상으로부터 동일한 시대를 살며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지도자들이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일하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높은 지위를 누리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할 때 과연 하나님의 아들 곧 우리의 주께서 오시기를 고대하는 자들이 누구이겠는가? 과부처럼 힘없고 의지할 것 없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아닌가? 과연 자기의 왕국을 건설한 문선명이가 예수의 다시 오심을 바라겠는가? 정명석이가 주를 바라겠는가? 그들에게는 그날이 심판의 날인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가? 오늘날 하늘 높은줄 모르게 치솟는 대형교회들은 어떤가? 그들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분변하여 복음의 메시지를 주의 백성들에게 모두 가르치고 있는가? 그들은 시장에서 문안을 받으며 당회장실 높은 곳과 잔치의 상석에 앉아 미사려구를 사용하며 길게 기도하여 오직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는 여인들의 가산을 삼키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므로 오늘 예수께서 그의 교회를 이끌고 갈 그의 제자들에게 이것을 당부하신 것이다. 이에 이사야 선지자도 말하여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 (사1:23) 하였으며, 다시 성경이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약1:27) 증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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