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누가복음강해

(누가복음16:16) 복음의 율법적 딜레마

이요나 2009. 11. 11. 14:17

(누가복음16:16) 복음의 율법적 딜레마

 

( 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서론) 이 말씀은 14장으로부터 이어진다. 바리새인의 두령의 집에 점심식사를 초대받으신 예수께서 먼저 바리세인과 율법사들에게 잔치의 초청자와 초대자의 도리에 대한 비유적 정의를 통하여 유대인들의 잘못을 책망하셨고, 15장에서는 세리와 죄인들을 향하여 한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 오기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하신 사랑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16장부터 18장까지의 대상은 제자들이다. 16 제자의 청지기적 삶의 지혜를 언급하셨고, 17장에서는 말씀에 대한 순종적 삶의 중요성과 그 결과를 말씀하셨다. 또한 18장에서는 제자의 삶에 있어 기도의 중요성과 순수성 그리고 영생을 위한 희생적 봉사의 삶의 절대성을 말씀하셨다. 이 모든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이끌어갈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말씀이다. 주님의 앞에는 예루살렘에서 받아야 할 십자가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I. 불의한 청지기 비유(1-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3)

 

A.   청지기의 직분은 무엇인가? (1-2)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자이다. 그는 재산을 잘 관리하는 책임도 있고 또 재산을 효과적으로 늘려 주인에게 이익을 안겨 주어야 할 관리직이다. 만약 청지기가 게으르던지 재물에 욕심을 갖고 있다면 그는 청지기 직책을 더 이상 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모두 재물에 대하여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재물은 삶의 가장 큰 도구이며 세상에서 자기를 지키는 실제적인 파워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로 오늘날 관료들 사이에서 부정부패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청지기가 불의하다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까? 그것은 불을 보듯이 더 이상 그 직책에서 파직 당하고 허비한 주인의 재물을 배상하여야 할 것이다. 그의 축재한 재물은 다시 빼앗기게 될 것이며 그의 불의한 일들은 세상에 들어나 사람들 속에서 얼굴을 들고 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만약 주인에게 자신의 불의가 들어 났다면 그는 속히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다.

 

오늘 비유에 소개된 청지기는 자신의 불의가 주인에게 들통나자 앞으로 살아갈 날을 생각하여 궁리를 하게 된다. 그는 관리직 출신이라서 땅을 팔 힘도 없고 또 그동안 쌓아 온 체면이 있어서 빌어 먹지도 못한다. 이에 그는 묘안 짜 내어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일일이 불러다가 기름 백말을 가진 사람은 오십말이라 증서에 쓰게 하고 밀 백석을 진 사람은 팔십이라 증서를 작성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주인의 말이다. 주인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롭게 한 것을 보고 칭찬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이는 그의 불의를 칭찬한 것이 아니라 그가 행한 행동이 자기의 앞날을 예비한 것이기 때문에 칭찬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며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보다 더 지혜롭다 하셨다. 이 말씀 역시 세상 사람들을 칭찬하는 말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본래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오직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아간다.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은 세상 사람들도 자신들에게 닥칠 일들에 대하여 지혜롭게 대처를 하는데 하나님의 자녀 곧 빛의 자녀들은 장래의 일을 예비치 못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B.   제자는 하나님의 나라의 청지기이다

계속하여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9) 말씀 하셨다. 이 말씀은 좀 난해한 말씀이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니 그리스도의 종된 우리에게 불의한 재물을 모으라는 말씀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재물의 속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재물은 사람의 마음을 악하게 하고 더럽게 하지만 그 재물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로서의 지혜를 요구하신 것이다. 만약 우리의 재물을 팔아 의로운 일에 쓴다면 그것에 대한 선한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사도의 반열에까지 오른 위로의 사람 바나바를 보게 된다. 그는 자기의 밭을 팔아 사도의 발 앞에 두었다. 이는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 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10) 하셨다. 이는 복음의 제자들이 삶의 우선순위에 관한 말씀이다. 우리는 오직 복음전도라는 사명에 불타 영혼구원에 매진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서 아주 평범한 일들 곧 사람 살아가는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옆집에 밥을 먹는지 한 아이가 돈이 없어 공부를 하지 못하는지 이런 것에는 전혀 관심치 않는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의 먹고 사는 삶에 관심을 갖는다면 그는 모든 것에 충성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재물에 아까워하여 이웃의 굶주림을 외면하면 그는 더 큰 불의에 빠지고 말 것이다.

 

고대 이방인들은 재물의 신 곧 맘몬(Mammon)을 섬겼다 세상이 재물을 신으로 섬기는 이유는 어느 시대, 어느 국가, 어느 종교이든 재물은 힘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전쟁이 그치지 않으며 서로 재물을 쌓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므로 주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를 지고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하셨고 바울은 재물은 우상숭배라고 증거했다

 

그러면 주님은 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하셨는가? 재물은 이 세상이 있는 동안에만 사용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사실 천국에는 재물이 필요 없다. 천국은 열두 보석들로 기초석을 이루었으며 우리가 가는 길은 정금으로 만들었고 우리가 들어갈 문은 한 진주로 세워졌다. 또한 세상은 재물의 많고 적은 것으로 판단하지만 천국은 사람을 재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에게 있어 재물은 불의한 재물이 아니라 참 재물로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데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하셨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제자들은 돈의 노예가 되지 말고 물질을 관리하는 지혜를 가지라는 말씀이다. 아무리 작은 돈이라도 한끼의 밥을 먹일 수 있으며 작은 돈을 모으면 아프리카 난민을 도울 수 있고, 고아를 키우고 공부 시키며 혼자 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장차 그리스도의 나라가 올 때 그의 나라의 통치를 우리에게 맡길 수 있겠느냐는 말씀이다.

 

끝으로 주님은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913) 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들으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헌금에 치중하며 많은 재물을 쌓아 두고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들은 여러 곳에 선교헌금도 하고 있지만 실상 눈가림이다. 그들은 화려한 대형 교회를 짓고 기도원을 짓느라 혈안이며 화려한 주택을 꿈꾸고 외제차를 선호한다. 그들은 입으로 교회부흥을 외치지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생각지 않는다. 나는 이들이 어디로 갈 것인지 알고 있다. 설혹 그들이 귀신을 쫓고 예언을 하고 능력을 행하였을지라도 말이다(참조; 7:21-23)

 

II. 천국에 대한 율법과 복음의 관점 도덕적 관점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6)

 

A.   율법과 유대인의 재물관

서두의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이란 주석은 매우 흥미롭다. 따라서 이 단락의 말씀들은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우상이 될 불의한 재물에 눈독을 드리는 종교지도자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의 근거를 지적하신 것이라고 하겠다.

 

예수님은 그들을 바라보며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고 말씀 하셨다.  아마 오늘날도 이 말씀을 들으며 양심이 찔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사람들 앞에 존경을 받고자 하는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한다는 것은 도덕적 윤리상 잘 어울리는 말은 아니다. 이것은 오늘날 국회의원들이나 정부 각료들이 돈을 좋아한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적 통념이지 실상 고위직에 오른 사람들일수록 돈을 좋아한다. 그리므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뇌물 수수 사건은 끊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관념적 사고가 생긴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 안에서의 평강이며 그들의 소망하는 평강은 부귀와 선을 연관하여 생각했다. 따라서 유대인에게 있어 부귀는 선한 징표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물질적 번영은 곧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하는 율법적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 자부하며 의인의 소망을 가진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었다. 그들은 율법을지킴으로 의로운 삶을 추구하였고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했다. 원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죄성의 인간들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고 의롭게 살아가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본성이 죄로 가득한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기 위한 율법적 방편을 택하여 율법에 약속된 십일조를 드리고 성전을 향한 열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추구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연히 자기들에 유익이 되는 율법만을 중히 여기고 자기들에게 불리한 율법들은 그 해석을 달리하는 방편을 만들었다. 이것이 토라이며 미쉬나이다.

 

따라서 그들은 선지자 학개로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학개1:6,9) 하신 말씀을 두려워하며 말라기 선지자의 말씀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3:10) 하신 말씀에 관심을 가져왔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16) 하셨다. 이 말씀은 이해하기에 따라서 커다란 갭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사실 매우 두려운 말씀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천국 입성에 대하여 시대적 획을 그이신 것이다. 이제는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서 천국에 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입성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이 말씀에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니라(17) 덧붙이셨다. 어떻게 생각하면 복음으로 천국에 들어 가되 율법은 다 지켜야 한다 하신 말씀과도 같다. 그렇다면 더 힘든 세상이 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상고해야 할 것은 율법과 유대인의 시대는 죄인 된 신분으로 죄성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내리신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씀을 지킴으로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태어남으로부터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율법이란 열가지를 지키다가 한 가지를 범하면 앞에 것이 무익하고 결국 율법의 요구대로 사망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몸으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도말하여 의인으로 살아 갈 새로운 은혜의 길을 여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는 율법의 마침이라 기록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율법의 한 획도 떨어트림이 없이 성취할 수 있을까? 이는 인간으로 불가능하다. 이는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로 주신 의인의 법 아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살므로 율법과는 상관 없는 복음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복음의 시대에 살면서도 계속 율법적 생활을 한다면 이는 큰 문제이다. 이는 예수께서 성취하신 율법을 다시 이끌어 내어 율법의 요구를 자신의 몸으로 마치려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율법적 딜레마인 것이다.

B.   순결에 대한 율법적 관점

예수님은 이 말씀을 설명하시기 위해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 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18) 하셨다. 오늘날 이 말씀은 받기 매우 힘든 말씀이다. 사실 구약에도 이처럼 단호한 말씀은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변함없는 성경의 가르침이다. 예수님은 여기서 절대로 이혼을 할 수 없음을 전재하신 것이다.

 

사실 이 말씀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사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도덕적 순결이었다. 이를 위하여 율법은 인간의 삶 속에서 돌출되는 변수를 위해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 ( 24:1)라고 피할 길을 허락하였다.

 

여기서 수치되는 일이란 무엇을 말씀하신 것일까? 사실 이 말씀은 부부가 한 몸을 이루는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여기서 수치되는 일이란 당연히 음행이나 간음을 뜻한 것이다. 그당시 율법적 대가 샴마이(Shammai)학파는 이 주장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힐렐(Hillel)학파는 이것을 남편에 대한 여자의 불경, 곧 외간 남자와 말을 하던가 수다스럽던가 남편에 대해 불손한 모든 행위로 간주하였다. 그런 연고로 유대인들은 아내를 마치 한 몸이 아닌 부속물로 여기게 되었고 자기의 좋은대로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였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예수님은 창조로부터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남자가 그 아내와 한 몸을 이루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짝지은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 증거하셨다. 어떻게 보면 복음이 율법보다 더 강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복음은 율법보다 더 강력한 능력을 갖고 있다. 그 말씀 속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능력되신 성령이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C.   복음의 관점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윤리와 도덕에 관한 복음적 관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복음의 세계에서는 율법을 지킴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성취될 수 있다. 이는 율법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셨으므로 그를 믿는 우리는 그의 은혜로 주신 복음을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 가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주를 믿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날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야 하는 갭이 있다. 내 영이 주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내 삶 속에서 내 생각과 마음이 온전히 성화되어야 할 책임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믿음의 결국은 혼의 구원이다(벧전1:9) 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가 도달해야할 곳은 이 세상이 아닌 영혼의 본향 곧 천국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며 잠시 거하는 이 세상 장막에서 살았다고 증거하였다(11장 참조). 이와 같이 우리도 잠시 동안 육신의 장막에 거하여 오직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복음에 책임을 다하여 오직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D.   복음의 적용; 거룩한 삶

이에 바울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10:4) 하였고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 4:24) 권고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의 성결한 삶을 위하여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 6:19) 하였고 우리 육신의 정욕을 위하여는 다시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딤후2:22) 경계하였다.

 

이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은 너희의 거룩함이니 너희가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살전 4:3-6) 하였다. 만약 우리가 주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상실한다면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거할 길이 없다.

 

그러면 우리가 이처럼 거룩함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늘에 있는 본향에 넉넉히 들어 가기 위함이다. 바울이 이를 증거하여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6) 기록하였다.

 

III. 영혼의 종착역   회개의 실패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29)

 

A.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영혼의 문제이다

이제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종착역에 도착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영혼의 종착역에 대해 설명하신 것이다. 우리가 인생을 다 산 후에 짐승들과 같이 죽어 땅으로 내려 갈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 놓으신 천국에 들어 갈 것이다. 그곳에는 슬픔과 고통이 없으며 오직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한 가운데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소망을 갖고 열심히 믿음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소망과 꿈은 우리만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은 여기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여기서 부자는 앞에서 언급된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일 수도 또 그들의 두령일 수도 있다. 어쩌면 오늘날 돈을 좋아하는 거대한 목사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지금 거지 나사로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그러나 나의 이러한 형편은 내게 아직 버려야 할 것이 남아 있는 것인도 모른다.

 

예수께서 비유하신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 옷을 날마다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다. 그의 아비와 다섯 형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는 죽어서 음부로 내려 갔다. 음부는 땅 속 깊은 곳에 범죄한 영혼을 위해 예비된 지옥이다. 한편 나사로는 병들어 헐었고 그 상처를 개들이 핥았다. 나사로는 부자집 대문에 누워 그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였다. 그가 대문에 누어 있었으니 부자와 그의 식솔들이 드나들며 보았을 것은 당연하다.

 

B.   영혼의 세계

그러나 나사로의 수명이 다하여 죽으매 그 영혼이 천사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음부로 내려가 그곳에서 고통을 받았다. 흥미롭게도 그가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보니 멀리 아브라함의 품에 나사로가 안식을 누리고 있는 것을 보고 불러 말하여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이 여겨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24) 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불꽃 가운데서 고민한다는 말이다. 살아서 우리가 불꽃 가운데 있다면 뜨거워서 타 죽을 것인데. 그것에 육신이 죽어 영혼이 내려간 곳이니 그의 혼이 뜨거운 불에서 고민을 받는 것이다. 이에 아브라함에 답하여 얘 너는 살았을 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25)하셨다. 여기서 언급된 위로나 고민이나 모두 우리 영혼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계속하여 아브라함은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가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26) 하셨다. 흥미로운 것은 지옥과 천국이 서로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이며 건너갈 수 없다는 것이다. 혹시 여러분은 군대에서 훈련 중 멀리 길 가에 서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사람들을 보았는가? 갈증 속에서 물을 보고도 마실 수 없다면 그 영혼의 고민을 더욱 클 것이다.

 

아브라함의 말을 들은 부자는 이제 체념한 듯이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27) 하였다. 부자는 그곳에서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형제들을 위해 대책을 강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후회는 시간을 잃고 말았다. 이므 그는 영원한 형벌의 시간에 들어 왔기 때문에 시간을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그의 마음이 형제들이라도 구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에 아브라함이 답하여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어다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이는 복음의 시대가 아니라 율법의 시대다. 그러나 율법의 시대에도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고 또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들을 죄에서 돌이키려 책망하셨던 것이다. 부자도 율법을 보았고 선지자의 말씀도 들었으나 그는 자기에게 만족할만한 말씀을 들었고 자신의 영혼을 위한 권고는 거절했던 것이다.

 

이에 부자가 말하여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하였다. 부자는 여기서 회개에 관한 말을 하고 있다. 음부에 내려간 부주에게는 회개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회개에서 실패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말하여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31) 하였다. 이것이 영혼이 돌이키는 회개의 원리인 것이다. 만약 오늘을 사는 당신이 살아 생전에 온전한 회개를 이루지 못하면 당신의 영혼은 회개의 시간을 상실하여 생전에 지은 죄값을 받게 될 것이다.

 

C.   우리의 적용

어쩌면 예수를 믿은 당신은 나는 율법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고 복음의 시대에 살고 있으니 구원받은 나에게 이것은 해당되지 않는다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부자는 아브라함을 보고 아버지라 하고 있다. 그가 부르는 아브라함은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다. 그도 살아서 율법을 부분적으로 지키고 부분적으로 선지자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권고를 받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돌이킨 심령으로 말씀의 권고를 받아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훗날 당신의 영혼도 이 부자와 같이 동일한 말을 하게 될지 모른다.

 

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 율법의 거침을 받을 자신이 있는가? 당신의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있는가? 아직도 당신은 먹고 마시며 일락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아직 낯이 남아 있을 때 온전한 회개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밤이 되면 회개할 시간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의 삶이 여러가지로 부족하고 육신에 병이들었다 해도 복음 안에서 주의 뜻을 기리는 당신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당신의 영혼은 살아서 위로를 받고 죽어서도 안식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주님 나는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찬송하나이다. 내 영혼이 주의 말씀 속에서 안식하고 있아오니 아직 나로 이루지 못한 복음의 책임을 다 이루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