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흔적들

<밀레니엄 단상> 천년의 사랑

이요나 2009. 12. 23. 19:15

<밀레니엄 단상> 천년의 사랑

1999 12 27 (다음넷 2000년 칼럼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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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청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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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칼럼가를 거닐다가 어느 청년이 쓴 칼럼을 읽다가 울어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아버지에 대하여 썼습니다. 그 제목이 "나는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였습니다.

그 청년의 글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간질병 환자였습니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는 전도지를 들고 길에서 전도하다가 갑자기 딩굴기 시작했습니다. 시장 통에서 장사하는 옆집 할머니가 달려와 전해 준 말을 듣고 단숨에 달려간 그 아이의 입에서는 "아빠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소리 없이 터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글을 읽고 얼마를 울어야 했던지.. 그날 나는 그 글로 하여 체면이고 뭐고 차릴 정신이 없을 만큼 울었습니다. 내 가슴속에서 내 아버지의 진정한 사랑이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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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에 불어 온 근대화 바람은 우리로 하여 현대를 살아가기 위한 방법과 수단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러나 먹고 살아가야 하는 투쟁은 우리 삶 속에서 진정한 삶의 근본 "사랑"을 빼사 가고 말았습니다. 사랑에 대한 개념은 있는데 사랑의 삶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진정 무엇을 추구하는 것일까요? 자기의 이상을 달성하는 것일까요? 명예일까요? 아니 물질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어느 시점에 와서 자신을 돌아 볼 때 우리는 결국 허무에 도달하고 맙니다. 우리는 물질세상 속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찾아 헤매는 가운데 진정한 삶의 목적과 근본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생은 이 땅 위에 사는 동안은 시작과 끝이라는 일직선상의 한정된 시간과 공간 속의 삶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논리적인 공식이 아니고 나의 의지와 조물주의 섭리에 의하여 시작되고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삶을 영유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 아니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사랑의 완성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인간의 형상 속에 내재한 삶의 근본인 사랑이 우리 삶 가운데 회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지난 세기 동안 우리 민족은 타민족으로부터의 주권 유린과 동족상쟁의 격동의 세월, 그리고 독재자들로부터 인간 본연의 사랑의 감성이 훼방 당하고 봉쇄당하며 유린당해 왔습니다. 그 세월을 벗어나고자 우리 민족의 입에는 빨리 빨리 라는 민족성 용어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1세기를 뛰어 넘어 새롭게 다가오는 천년의 시각 앞에 우리는 지난 세월의 아픈 상처를 모두 털어버리고 화해와 용서로 용납하고 뜨거운 심장 속에 내재한 사랑의 진실을 회복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성취될 것을 믿고 나의 인생 경륜 속에서 깨달은 "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천년 사랑"을 회상할까 합니다.

-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


내 기억에는 왜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기억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석꾼의 아들로 조강지처의 상처로 두 번의 결혼을 하셔야 했던 아버지는 일곱의 아들에 딸 하나를 두셨습니다. 그 중에 아버지의 5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머니에게는 장남이었습니다. 그런 덕에 나는 장남의 특별한 대우 속에 성장했습니다.

 

어머니가 시집 오셨을 때는 이미 아버지가 노름으로 그 많은 땅을 다 팔아 드셨고 어머니는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 우리를 키웠습니다. 제 기억에는 어머니는 안해 본 장사가 없으신 것 같았습니다. 닷새마다 열리는 장터 한 모퉁이에서 술 빵(막걸리로 부풀려서 만든 빵)을 쪄서 파시기도 하셨고, 장릉산 유원지 철이면 음료수 자판을 벌리시기도 했습니다. 또한 동네 어귀 빈집을 얻어 보신탕 집을 열기도 하셨고, 그러한 틈에도 인근의 혼수감은 도맡아서 짓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그러한 노력으로 만석꾼이 아들들보다 더 깔끔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다 아버지께서 들어오시는 날이면 불도 지피지 않은 냉방으로 쫓겨나서 안방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귀를 막고 있어야 했습니다. 아버지와의 싸움은 늘 어머니의 일방적이 승리로 끝났습니다만 난 그 때마다 속절없이 아버지가 불쌍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훤출한 키에 아주 잘생긴 분이셨고 근동에서 온유한 인품으로 칭송이 자자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런 중에도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시사철 깔끔한 한복으로 지어 입히셨습니다. 아버지의 밥상은 늘 겨란 찜과 생선토막이 올라왔고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버섯을 넣어 끓인 된장찌개를 빠트리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상반 된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께서 진짜로 아버지를 미워하시는 것인지 사랑하신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을 본 일이 한번도 없습니다. 일이라는 것은 새벽부터 밤까지 어머니가 도맡아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밤이 새도록 사랑채에서 바둑을 두시던가 건너 마을로 골패와 장기를 두러 다니시느라 늘 집을 비우셨습니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어머니가 시집오셔서 나를 낳을 때까지 아버지는 노름에 미쳐 하루 밤에 땅 한 마지기씩 팔아 드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빈털터리가 된 지금은 바둑으로 소일하고 계시고 삼 남매와 함께 먹고 살기에 힘이 빠진 어머니는 아버지를 보기만 하면 싸우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의 푸념을 들으시며 한 마디도 못하고 슬그머니 방을 나가시는 아버지의 멀쑥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자식의 공부를 생각하신 어머니는 서울로 이사 오시면서 아버지를 시골 큰 형님 댁에 떨치시고 우리 형제들만 데리고 이사 오셨습니다. 단칸방인 이유도 있었지만 어머니에게는 아무것도 하시지 않는 아버지가 너무 야속하고 화가 나셨던 모양이셨습니다.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정녕 사랑이 없으신 잘못 만난 부부인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싸우셨고 이렇게라도 헤어진 것은 어쩌면 잘 된 것이라고까지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내 나이 서른이 다 되도록 일할 곳을 찾지 못하고 거리를 방황을 하던 나를 두고 세상을 떠나시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사시는 시골 산 모퉁 자락으로 가셔서 누우셨습니다. 차마 마지막 숨을 아버지 앞에 보이고 싶지 않으셨는지 아버지가 사시는 집을 멀리 바라보는 산모퉁이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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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날 밤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을 비비며 어쩔 줄 모르고 우시는 칠 십의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후 내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의 산소를 지키셨습니다. 지금은 강화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산턱에 나란히 누어 천 년의 사랑에 들어 계시지만 초등학교 시절 어린 나는 늘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면서 난 커서 결혼하지 않을꺼야 하고 다짐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 이미 오십이 넘었습니다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국 다음 천년의 영원한 사랑으로 입실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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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 나이 오십이 넘어 아버지의 나이가 된 후에야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발견하였습니다. 만석꾼이의 아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나약하게 성장하신 아버지와 억척같이 자식들과 함께 살아 보려던 어머니.. 어린 자식들 눈에 늘 다투시던 그들에게는 두 분만이 감내할 수 있는 사랑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사랑을 지속할 수 없는 감당키 어려운 환경과 자식의 장래를 향한 소망 가운데 삶의 분노가 있었을 뿐이지요
.

목사가 된 후 나는 하나님의 아카페 사랑을 배우면서 나는 과연 자식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내 어미의 사랑 같은 것이 있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한 나는 자기를 뿌리치고 떠난 여인의 산소를 지킬만한 아버지의 애절한 사랑이 있는가 생각해 봅니다. 이 두 분의 순애보가 오십이 넘어서 다음 천년을 바라보는 이 못난 아들의 가슴에 살아서 통곡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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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여 내 어머니여 당신은 사랑이셨습니다.



1999
년을 보내며, 통곡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