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흔적들

[스크랩] "나는 더이상 게이가 아니다" 김유복 형제의 생애를 지켜보며

이요나 2016. 8. 16. 17:06

"나는 더이상 게이가 아니다" 김유복 형제의 생애를 지켜보며
 
(요일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지난 화요일 효드림요양원 원장님으로부터 요양 중인 김유복 형제가 위득하다는 전화가 왔다. 미국을 다녀 온 후 일처리에 밀려 병문안을 하지 못하여 얼굴을 본 지 달 반을 훌쩍 넘은 터라 가슴이 덜컥했다.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 요양원을 방문할 겨를도 없이 순천향병원 응급실로 모시게 하고 교회형제들과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다. 만약 그 사이라도 소천한다면 죄인이 될 것 같은 마음이 앞섰다.
 
병원 응급실은 위급환자들로 가득찼다. 김유복 형제는 내가 도착하기 전에 위급조처치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보호자가 없는 상황이라 생명에 위급상황이 올지도 모르는 다음단계는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얼굴을 보자 그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애처러운 눈초리로 고통을 호소했다. 응급처치는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상황이이 연출되고 있었다.
 
담당의사는 유복형의 현재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이미 폐혈증이 한참 진행된 상활이라 기도를 확보하고 가래를 빼 내기 위해 호수를 삽일 하는 수술을 애야 하고 소변이 나오지 않아 이대로 방치하면 오늘을 넘기기 어렵다고 했다. (이것이 마지막 여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복형제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중환자실에서 얼굴을 마주한 유복형제는 생명을 위한 긴급처치로 만신창이가 된 채 호흡보조기 틈으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 잠든 얼굴은 내가 지켜본 십여년의 병상 중에 가장 편안했다.
 
참으로 기구한 인연이다. 충무로에서 의상실을 운영하던 시절, 게이 절친들과 콩자반이라고 불리는 선배가 운영하는 금호동 게이 선술집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런 술자리를 좋아한 것은 아니지만 마침 대구의 대안 형제가 올라와 선후배 지인들을 초청한 자리였기에 함께 갔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방문이 열리며, 붉은 집시 옷을 걸친 남장여인이 작은 손부채를 들고 현란한 몸짓과 낭낭한 목소리로 ‘키사스 키사스’를 부르며 등장하였다. 마루바닥을 굴러대는 그의 폼이 상당히 요염했다. 그 당시 밤마다 명동거리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여장남자가 있었지만 술집에서 여장을 하고 노래와 춤을 추는 사람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비록 선술집이지만 대중가요에서부터 엥카(일본대중가요), 라틴, 팝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게이들만이 할 수 있는 특유한 눈짓과 제스츄어로 사람들을 매료 시켰다.
 
유복형제의 본명은 김유복자이다. 어머니가 유복형제를 임신한 상태에서 아버지께서 작고하셨기 때문에 이름을 유복자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가 없는 균형을 상실한 환경 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일찍 가장을 잃은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시어머니에게 맡긴 채 밤낮으로 일을해야만 했다. 아무도 놀아 주지 않는 외딴 집 마루바닥에 덩그만이 내어버린 채, 그는 어려서부터 혼자서 말하고 혼자 노래하며 스스로 자기만족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처음만난 유복형제의 웃음 속에서도 무서운 냉정함이 엿보였다. 어쩌면 애정을 상실한 성장과정 속에서 자란 그는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을 받고자 노래와 춤을 추는 예기와 같은 여장남자의 길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유복형제는 경남상고를 나왔다.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번듯한 유복형제는 학교에서도 상당한 인기 있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미 여자를 사랑할 수 없는 동성애 성향의소유자가 되어 있었다. 이미 은밀한 곳에서 남자와의 욕정을 즐기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에게 유일한 재산은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는 MBC 방송국 전속가수로 입사하게 되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자랑할만한 이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시탐탐 남자를 탐익할 수밖에 없는 동성애 욕정은 아직은 퇴패행위로 규정된 사회의 시선을 넘지 못하고 퇴사를 당해야 했다. 이것이 그가 게이들이 모이는 선술집에서 노래를 하게 된 동기이다.
 
어머니의 죽음.. 그 인고의 세월 속에서 서른살이 되던 해 나는 이태원에 들어와 15평 남짓한 카페를 열었다. 그것이 한국최초 여장남자 게이바 열애클럽의 시작이다. 처음에는 게이들이 드나드는 카페로 시작했지만, 과거 의상실을 경영할 때 알던 고객들과 연극인들과 방송인들이  드나들면서 그 당시 유행하던 가라오케를 설치하고 카페 안에 작은 무대를 만들었다. 그때 생각난 사람이 김유복형제이다.
 
그 당시 김유복 형제는 지인 자매가 운영하는 한남동 카페 휘가로에서 웨이터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만나자 쾌히 열애클럽으로 왔다. 그는 자기의 재능을 인정해 주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김유복 형제에게 특별한 무대 드레스를 지어 주고 연극학교에서 배운 솜씨로 특유한 분장을 시켜 무대에 세웠다. 그때부터 그는 김마리네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비록 작은 술집이었지만 말이다.
 
그 당시 열애클럽은 비록 여장남자 게이클럽(트랜스잰더 클럽)이었지만 여장을 한 게이들 노래와 춤과 재담을 곁들인 페키지 쑈를 볼 수 있는 일본인 관광잡지에까지 소개된 명소 중의 하나였다. 연예인들을 비롯하여 사업가, 정치인 방송인 작가 등 한국의 명사들이라면 한번은 찾은 특별한 유흥업소였다. 김유복 형제는 열애클럽의 메인싱어로서 페키지 쑈의 중심이 되어 후일 열애클럽 동경지점 벨라미 클럽에까지 원정을 가기도 했다. 이 때가 그에 인생에 있어 가장 황금기였다.
 
그 당시 지인들과 열애를 방문한 가수 패티 킴, 현미, 임희숙 씨와 같은 중견 가수들도 김마리네의 노래를 들으며 절대음감 소유자라고 극찬을 했다. 그러나 동성애자의 밤은 피지 못하고 지는 꽃과도 같다. 풀어내지 못하는 욕정을 밤거리에 쏟아 내는 어둠의 자식들이다
 
그들은 고객들이 던져 준 몇 푼의 팁이 모이면 욕정을 불태워줄 남자를 찾아 나서야만 한다. 그렇게 개이들은 스스로 비굴한 성 노예가 된다! 창조적 영혼을 상실한 그들의 더러운 육체의 인생은 다람쥐 채바퀴 돌 듯 비참하게 이어간다. 김마리네의 인생도 화려한 조명 속에서 좀먹어 가고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시간에 예수의 이름이 그에게 찾아 왔다는 것이다.
 
그가 열애클럽에서 노래를 불러야 하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예수를 믿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오늘에까지 이요나 목사와의 끈질긴 인연의 다리가 된 것이다
 
88 올림픽 이후 난잡해진 이태원 유흥가를 정비하기 위해 노태우 정부는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하였다. 그로인해 나는 밤마다 경찰과의 전쟁을 치루어야 하고 그러는 사이 벌금전과는 늘어나 결국 구치소 생활까지 했어야 했다.
화려한 조명 속에서 밤의 여왕처럼 군림했어도 결코 행복하지 않은 게이 삶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때 내게 다가온 복음의 소망은 자유였다. 돈으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나에게 자유함이 없었다. 영혼의 갈급함에 견디지 못한 나는 결국 이태원을 떠나 동경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곳은 죄가 합리화된 더욱 뜨거운 지옥이었다. 그럼에도 그곳에는 복음의 생수가 흐르고 있었다.
 
내가 서울을 떠난 후 정신적 지주를 잃은 유복형제는 거리의 낭인이 되어 구원의 믿음을 상실한 체, 그는 퇴기(退妓)처럼 트랜스젠더 클럽의 뒷방마마로 전전하고 있었다.  
    
그후 1995년 5월
내가 갈보리채플 목사가 되어 돌아 와 그를 찾았을 때에는 쪽방에 누어 흡사 귀신의 몰골로 신음하고 있었다.  나를 만난 그는 다시 믿음을 회복하였다. 그의 인생에 처음으로 찾아 온 거룩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개척 2년만에 교회 문을 닫게 되자 유복형제는 미안하다는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다시 세상을 돌아 갔다. 다시 옛생활로 돌아 간 것이다.
 
그후 7년 후 다시 만난 유뵥형제는 척추수술 후유증으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장애인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의 보호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통장을 털고 후원금을 모아 재수술을 하였지만 결국 더 악화되어 간병인의 도움으로 연명하다 지난 겨울 더욱 심해져 지인이 운영하는 효드림요양원에 입원했었다. 요양원에 가기를 죽기보다 싫어했지만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팔개월 남짓.. 이제는 중환자실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오늘 그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제 길고 고달픈 인생을 정리하려는 순간이다. 어쩌면 그에게는 살아 있는 세월이 지옥일 것이다. 그것은 하늘 저편에 우리 모두가 소망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생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 때문이다. 사단에 사로잡힌 한 영혼이 하나님의 품에 온전히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환란과 애통의 세월을 살아야 하는지..
 
죽음의 문턱을 헤메는 유복형제를 지켜보는 내 마음이 더 견디기 어렵다. 그러나 그는 나보다 주님을 먼저 만난 자가 될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다시 그를 만날 것이며 평안과 자유의 은혜 속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 참으로 긴 인생 여정이었다. 주님 저의 영혼은 평안케 하소서 아멘 아멘 (이요나)



















출처 : Coming Out Again(탈반시티)
글쓴이 : 요나짱 원글보기
메모 :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