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첫 장에서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라는 놀라운 증거를 보게 된다. 이는 사람의 지혜로 이해하기 어려운 증거이다.
요한은 처음부터 “로고스 곧 말씀”을 우리에게 소개하면서 표현을 하였다. 그는 첫 시작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증거했다. 이는 ‘말씀은 태초부터 계셨다’는 증거이다. 우리로서는 이해 불충분한 헬라어 “로고스”는 흥미있는 헬라 개념적 역사를 가지고 있다. 주전 560년 에베소에 헤라클레터스(Heracletus)라는 철학자가 살았는데, 그는 온 우주는 계속적으로 변화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똑 같은 상태로 머무르거나 정지된 상태로 있지 않다고 가정했다.
그는 그것을 묘사하여 말하기를 만일 흐르는 시냇물에 발을 넣었다가 빼내었다가 또다시 발을 넣을 때, 사실은 조금 전에 발을 넣은 시냇물과 똑 같은 물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움직이며, 모든 것은 변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정지되어 있거나 똑 같지 않다고 했다. 그때 누가 “만일 모든 것이 계속적으로 변화 상태에 있고, 순간에서 순간이 똑 같은 것은 어느 것도 없다면 어떻게 당신은 세계를 완전히 혼돈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는가 라고 질문하면 그는 그것은 “로고스”라고 답하였다.
그는 ‘사물에 계속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만 만물의 질서가 있으며 그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로고스이다. 로고스는 만물의 질서를 확립한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서도 우연히 생기는 일은 하나도 없으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목적이 있다. 또한 우리 삶에 벌어지는 모든 일은 계획과 목적이 있다. 그런데 그 계획을 짜고 목적을 조절하는 분이 로고스라고 증거했다.
또한 그는 각 사람은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선천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있어, 당신이 잘못했을 때, 옳은 일을 했을 때 그것을 안다. 우리에게 그것을 알게 하는 그가 곧 로고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로고스 곧, 말씀’은 헬라철학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다. 후에 스토아 철학파가 나타났으며 그들은 우주의 질서와 별들이 충돌하지 않음을 보았고, 개개의 유성들이 궤도를 따라 돌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때 그들은 각 천체나 모든 만물들과 우주의 질서를 보고 우주의 배후에 만물의 질서를 잡고 있는 것이 ‘로고스’ 혹은 만물의 배후에 있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헬라철학에서는 만물이 형태로 존재하기 전에 생각이 먼저 존재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여, 피아노가 있다할 때 그 피아노 존재를 이룬 생각이 있고, 부품들을 뜯어 맞추는 과정이 있고 그런 후에 우리가 형체를 보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형체의 배후에는 생각이 있고, 그 생각은 로고스라고 했다.
여기서 요한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형체의 배후에는 생각이 있다면, 그 모든 생각의 배후에는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증거했다. 그러나 헬라철학은 생각하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다만 모든 것이 생각으로 시작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생각 그 자체가 창조의 파워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요한은 그 생각의 배후에는 생각하는 분이 있어야 하며 따라서 그 생각 곧,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로고스는 바로 하나님이시며 또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 했다. 이와 같이 사도요한은 헬라 철학의 로고스를 사용하여, 태초에 로고스가 계셨다고 증거했다. 또 이 말씀은 성경의 첫 부분(창세기)과 대단히 흡사한 것을 볼 수 있다. (이요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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