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환난이 필요했을까?
(고후 1: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고린도후서를 읽으면 거대한 강을 만나는 느낌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바울의 편지가 묵묵히 하늘의 뜻을 품고 흐르는 강물 같기도 하지만 순간순간 격동의 파도를 일으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울의 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는 곳은 바로 고린도후서이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하여 길 떠나보낸 어린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을 엿볼 수 있으며 과년한 딸을 시장 한 복판에 내놓은 어미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바울은 1장에서 '위로'라는 단어를 9번 사용하였다. '위로'라는 '파라클레시' 원어는 보혜사 성령과 같은 어근을 가진 말로서 '옆에서 부른다'라는 뜻이다. 고난 받은 사람 옆에 자신의 고통을 알아줄 사람이 옆에 서있다면 그보다 더 큰 위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로란 어떤 책망이나 고통이나 환난 가운데 필요한 것이다. 기쁨에 차있을 때에는 위로 같은 것은 전혀 필요 없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환난과 고통이 발생 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 그처럼 하나님의 은사와 능력이 넘쳐났던 고린도교회 제자들에게 왜 환란이 왔을까 싶다.
고린도교회는 복음을 영접한 후 하나님의 많은 은사를 받아 자신들의 믿음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갖고 의기양양했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세상 가운데서 막 살아가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라는 영광된 위치에 있었다. 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은 실로 놀라웠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바울은 "너희가 사람이 아니로다" 책망하였고, ‘너희로 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가운데서 더렵혀졌다’ 책망하며 그들의 잘못된 모습을 일일이 벌거벗겨 놓았다. 그들은 편지를 읽으며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아야 했다. 정말 하나님은 고사하고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들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들 중에는 옛 생활을 벗어버리지 못한 채 아직 음행에 빠져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고 심지어 아버지의 첩과 통간을 한 신자도 있었고 부부간의 문제, 성찬을 함부로 나누는 문제, 예언과 방언과 통역 은사의 남용과 남녀 권위의 무질서 등등 일일이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교회와 성도들 앞에서 왕노릇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너희가 우리 없이 왕노릇하였도다’(고전4:8) 책망하였다. 이 말은 자기들에게 나타난 지식과 능력이 자신들에게서 나온 것처럼 자랑하였다는 말이다. 오죽하면 바울은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후 1:14) 하였다.
끝으로 바울은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 1:24) 하였다. 이 말씀 속에는 그들이 은연중 바울의 지도 밖에 있기를 원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어쩌면 이런 일들은 사역의 초기 단계에 있는 자들의 영적교만이 아닌가 싶다.
오늘날 코로나 펜데믹 이후 우리 교회 모임은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며 정부로부터 통제를 받는다. 전도도 할 수 없고 하나님 앞에 예배도 드릴 수 없게 되었다. 이는 교만에 빠졌던 교회를 낮추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 자성하고 회개하자. 그래야 주의 위로가 임할 것이다.(이요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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