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강좌/성령은사

(지혜의은사2) 교회의 분쟁을 해결하는 지혜의 은사

이요나 2000. 8. 4. 13:16
(지혜의은사2) 교회의 분쟁을 해결하는 지혜의 은사

*서론*
오늘은 지혜의 은사의 두 번째 시간으로 이방인 선교의 전초지 안디옥 교회에 발생된 교회의 문제와 그 문제를 해결한 지혜의 은사를 살펴볼까 합니다. 모두 사도행전 15장을 펴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에 핍박이 일어나자 믿는 많은 유대인들이 이방 세계로 나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단의 핍박이 오히려 온 세상 속으로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바나바가 세운 이방교회의 전초지 안디옥 교회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내려 오게 되었습니다. 본문 서두에는 "그들이 형제들을 가르쳤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데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생각하겠습니다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과연 복음은 누구에게 맡겨진 것일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바울의 증언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절에서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인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하였다"하였고, 6절에서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자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명하다는 이들"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바울과 과거에 가말리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던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제사장들도 있었을 것이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6장 7절에는 "허다한 제사장들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였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주로부터 성령세례를 받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누가 가르치느냐? *
지난 연말 김용옥 교수의 노자와 21세기는 우리에게 많은 논란이 되어 왔었습니다. 나 또한 칼럼에서 김용옥 교수는 성경을 가르칠 수 없다고 주장하여 몇몇 목사로부터 주목을 받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분명한 것은 김용옥 교수뿐만이 아니라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 즉 주로부터 성경의 말씀을 가르치도록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은 성경을 바로 가르칠 수 없습니다. 혹시 어느 누가 병을 고치는 은사를 받았다 해도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기름을 부으시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너희 안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으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수 없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성령께서는 친히 그들을 가르치시어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제도 속에 속한 사람들이 사도와 예언자와 전도자와 목사와 교사입니다(엡4:11) 그렇다고 지금의 목사나 교수가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가 오랜 세월 공부를 하여 석박사가 되었어도 주의 부르심과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하였다면 그는 기름부음이 없기 때문에 그는 성경을 온전히 가르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18장에 나오는 아볼로를 통하여 증명되고 있습니다. 바울도 사도행전 19장에서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세례를 받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을 누가 가르치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치중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떻게 가르치느냐하는 방법론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누구로부터냐"는 더욱 중요합니다. 또한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하여 오랜 세월 지켜 온 율법의 고정관념에서 금방 해방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갈보리채플의 한 사역자가 되어 그들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수용하는데는 꽤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주님의 법칙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믿는 유대인들이 주축이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도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것과 주께서 미리아신 자들을 성령으로 인치시고 충만케 하여 복음의 증인으로 세우신 것과는 아주 다른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주께서 친히 세우신 사도들과 함께 한 성령으로 한 몸을 이룬 그리스도의 사람들에 의하여 이끌어 가도록 인치신 공동체인 것입니다.

*구원논쟁 *
에베소서 4장에는 "그러므로 주도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주께서는 그의 전지하심과 미리 아심 속에서 부르신 아들들로 성령으로 하나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 복음의 증인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한 증인이 성령과 사도들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나와 같이 있었음으로 나를 증거하리라"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교회는 부모가 목사가 되어서 세습되는 것도 또한 내가 지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전지하신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미리 아신 자들을 부르시고 택하셔서 그의 이름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성령으로 인치셔서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에서 내려 온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 형제들에게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수천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온 구원의 교리였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이적과 함께 교회의 탄생 이 후에도 그들 속에서 그 문제가 패러다임 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지요.

이처럼 우리 안에 내재된 고정관념은 쉽게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고정관념에서 해방되기 위하여도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 교회들은 아직까지도 이러한 문제에서 완전히 해결을 보지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이들이 주창한 구원에 관한 교리의 문제로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커다란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이 문제를 예루살렘의 지도자 회의에 상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는 늘 불의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 구원교리 문제를 예루살렘 공회에 상정하자 믿는 바리새인들이 일어나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들 중에는 바울과 동문 수학하던 바리새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누구냐? *
성경은 사도들과 장로들이 많은 변론을 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얼마나 심각한 문제일까 생각해 보십시오. 이 회의에서 결의되는 결정에 따라서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가 확정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 문제가 바리새인 쪽으로 기울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은혜는 일순간에 무너지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한 것을 율법으로 마치려하느냐"고 책망하였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일어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셨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내 입"이라는 말과 "복음의 말씀" 그리고 "들어 믿게 하시려고"와 "나를 택하셨다"고 일관 되어진 문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복음을 누구에게 맡기었는가에 대한 것을 확증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셨다"라는 말은 '너희가 하는 논쟁이 무엇이냐'고 반박하는 것입니다. 즉 '너희가 누구인데 이러한 논쟁을 할 수 있느냐?' 고 묻는 것입니다. "나를 택하셨다"라는 주의 주권에 관하여는 그 아무도 베드로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었다"고 자기가 실제적 체험을 토대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증거 *
그들 속에는 믿는 바리새인들 중에는 제사장도 율법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그들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여전히 민족지도자였고 예루살렘의 주축 구성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권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주로부터 세움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비록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 제사장들이 후일에 예수를 믿어 같은 형제들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복음은 처음부터 그들에게 맡기어진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 택하심에 대하여 언급을 한 후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 하시고 믿음으로 저희의 마음을 깨끗이 하여 저희와 우리들을 동일하게 여기셨다"고 증거한 후 다시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고 힐책하며 이 땅의 모든 인간도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킬 수 없음에 증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받는 것임을 거듭 확인 시켰습니다.(행15:7-11)

이렇게 하여 대적자들의 입이 막히자 바나바와 바울은 그동안 이방인 중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들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의 증언이 끝나자 예수님의 동생이며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가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하나님이 저희를 권고하셨다" 참으로 일의 과정이 물 흘러가듯이 질서 정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의 증거 *
야고보는 이 모든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증언하므로 이 일들이 하나님의 계시로 이루어 진 것임을 증명하며 "아모스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행15:14-18)고 증언하므로서 이스라엘의 문제와 이방인의 문제점을 모두 해결하고 다시 "이 모든 것이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다"라고 확증을 지었습니다.

어쩌면 베드로의 증언은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온 지도자들을 서운하게 하고 반감을 사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또 바울과 바나바의 증언은 수천 년 동안 선민(選民)의식을 갖고 살아 온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에 상처를 갖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방에서의 복음활동에 있어서 분쟁의 씨앗은 계속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은 택한 백성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중심으로 살던 민족이요 이방인은 하나님을 모르던 백성들로 자기들의 생각과 세상법에 의하여 살 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민족간에는 서로의 풍습과 문화와 언어의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월드컵이 열리기전 우리나라의 개고기 문제에 대하여 유럽국가들간에 문제가 거론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엿습니다. 사실 중동 이슬람국에도 미국의 유명한 버스 회사 그레이하운드는 있습니다. 십여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도 운행되던 버스입니다. 이 버스회사의 화사 로고는 달리는 개입니다. 그런데 회교도들에게 있어서 개는 죽음의 사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그레이하운드 버스는 있어도 로고는 들어 가지 못햇습니다..

요즘 911 미국 테러 사건이후 문명의 충돌이라는 말이 많이 나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격히 말하여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문화의 충돌입니다. 문명은 삶 속에 녹아 내린 현대 과학과 문화를 이야기 합니다. 그러므로 문명의 이기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풍습과 윤리와 전통에 의히여 다른 나라의 문화를 그대로 받아 드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사실 얼머전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빨간색은 금기시 되어오던 색갈입니다. 붉은 색은 죵교적으로는 십자가요 이념적으로는 공산당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마귀의 색갈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월드컵으로 인하여 붉은색은 악마와 십자가와 이념을 초월하여 세상 사람들이 하나로 화합하는 축제의 색갈이 되었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복음의 활동과 지대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변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주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도들에게 주신 그리그도의 권세였지만 수천년 동안 벽이 되어 온 민족간의 풍습과 윤리와 문화의 벽을 해걀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이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가 일어나서 이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분쟁의 씨앗 *
유대인에게는 이방인의 습성 중 받아드릴 수 없는 율법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많은 것 중에서 그들이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짐승을 피째 먹는 것과 목을 매달아 죽은 저주의 것을 먹는 것과 그리고 음행이엇습니다. 다른 것들이야 이해하고 넘어 간다고 해도 이러한 문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던 일들이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야고보에게 지혜의 말씀을 주셔서 이 문제를 해결하게 하셨습니다..

야고보는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은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합니다. 야고보 자신이 내 의견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말을 합당하게 받아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어떤 의견에 잘 화합하지 못하는 유대인 지식인들이 한 마음이 되어 야고보의 의견에 만장일치로 받아드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의 은사입니다.,교회의 분쟁거리를 해결하기 위하여는 인간의 생각으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의 분쟁의 배후에는 영적인 존재가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디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와 장로와 온교회의 이름으로 각 교회에 공문을 띄우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유다와 실라를 보내기에 일치 가결하였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은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노라"(행15:19-29)

여기서 여고보가 한 말들을 살펴보면 주께 돌아 온 이방인들 속에서 아직 온전해지지 않은 부분들 즉, 유대인들에게 지탄받고 있는 우상에 관한 그들의 생각, 음행의 생활, 그리고 목매어 죽은 것들을 취하고 생명의 피를 소홀히 하는 이방인들의 습관에도 제동을 걸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은 모든 것은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문제의 쌍방을 모두 경책하고 권면하여 그들을 모두 하나님에게 돌아오게 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을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양쪽을 다 버리지 않고 다툼과 혼란 속에서 하나님의 빛이신 질서 속으로 이끄시는 지혜야말로 오직 전지하신 하나님의 지혜의 영이신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전체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