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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1:4)기쁨이 충만게 하려

이요나 2005. 7. 11. 11:45

(요일1:4)기쁨이 충만게 하려 [MP3]

 

(요일1: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이제 요한일서를 공부할 차례입니다. 이제 두달 후면 우리는 계시록을 공부하게될 것입니다. 10년의 목회에 이제야 계시록까지 달려 왔다는 생각을 하니 지난 세월이 허망해지기도 합니다만 오늘의 나 된 것을 생각할 때 은혜와 감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요한이 이 글을 쓸 당시는 교회탄생 1세기를 맞는 시대로서 교회는 네로황제 이후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해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날이갈수록 부흥되어 빠른 속도로 전세계로 전파되어 나갔습니다.

 

각 처에서 교회들이 부흥되어 나가는 동안 예수 그리스로로부터 친히 세움을 받은 사도들과 그들에게 세움을 받은 차세대 지도자도 나이가 들어 한 사람씩 세상을 떠나고 교회는 날이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되어 많은 지도자들이 요구 되었습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교회는 새로운 지도자들을 세워졌고 전 세계 가운데서 서로 얼굴을 모르는 제자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사도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복음의 위하여 균형있는 가르침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거짓교사들이 만연하고 이미 교회 가운데 잘못된 지식이 유포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교회의 박해시대에 살고 있던 사도 요한의 서신에서 박해에 관한 위협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위협이 외적인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의 교회의 문제는 외부에 발생된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분열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3장에서 만일 나라가 서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으며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하셨습니다.

 

오늘  요한일서를 공부하는 우리는 먼저 복음의 시작 1세기 말에 서있는 사도요한이 이 글을 쓴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에 촛점을 마추고  1세기를 맞는 한국 교회안에 발생된 문제점을 되돌아 보며 우리가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어디서 떨어져 나갔는가 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서신을 쓰면서 그 목적을  세가지로 말하였습니다. 첫번째 이유로 '내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라'(1:4)이라 하였으며  두번째 이유로 '내가 이것을 씀은 너희로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2:1)하였으며 세번째 이유로 "너희에게 이것 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5:13)하였습니다.

 

*말씀과의 관계

사도 요한은 1절에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태초란 시간과 공간의 출발지인 천지창조의 이전을 말합니다. 따라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은 창세기와 또 요한복음과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기원이 되심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먼저 그와의 관계가 '들음'에 있음을 언급하였습니다. 사실 사도들의 경우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음에도 들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가 이 땅에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이셨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로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비롯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라 기록한 것입니다. 

 

계속하여 사도요한은 '눈으로 본 바'라 증거 하였습니다. 여기서 '눈으로 보다'(horan)라는 말은 육체적인 시각으로 본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상태가 아닌 시각으로 살핀 모습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뒤에 나오는 '주목하고'라는 말과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주목하고'(데아스타이)라는 동사는 어떤 사람이나 물체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을 때까지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눅7:24) 물으신 것은 단순히 시각적인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가 광야에서 본 세례 요한의 실체가 무엇이냐를 물으신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1장에는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은혜 위에 은혜더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말씀도 눈으로 보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의 영광에 실제로 참여한 상태 즉 그 영광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 것입니다.

 

요한은 계속하여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하였습니다. 사실 사도들은 주님과 함께 살며 또 그가 부활 하신 후에도 주를 만져본 사람들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나를 만저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의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0)하시며 그들과 함께 생선과 떡을 드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 당시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 당시는 헬라의 그노시스 사상이 편만하던 때라 사람들은 육체는 더러운 것으로 여겨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로 비화시키려 하였습니다. 더구나 유대사상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그노시스 사상과 결탁하면서 교회에서의 잘못된 지식들이 확장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증거의 목적

사도요한은 2절에서 "이 생명이 나타나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생명의 나타남이란 실존적인 존재를 언급한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잠시 설명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헬라의 그노시스 사상을 교회에 전이 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당시 만연된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관련하여 발전된 헬라의 그노시스 이론을 신봉하여 영은 거룩하고 육체는 더럽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모든 물체 뒤에는 그 실체인 원초적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육체도 물체로서 거룩할 수 없다고 단정하여 육체 안에 갇혀있는 영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 영은 지식을 통하여 더욱 온전하고 거룩해 질 수 있으며  인간의 육체 안에 갇힌 영을 해방 시키기 위해서는 고도의 지식을 통달한 철학자들만이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오늘날로 이러한 사상이 우리 교회안에 남아 있어서 신부와 목사만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으므로 고해성사를 통하여 죄의 고통을 벗을 수 있고 또 목사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미치게 된다는 허망한 거짓말을 유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귐(Fellowship)

사도요한은 3절에서 "우리가 보고 들음 바를 너희에게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하였습니다. '사귐'이란 단어는 '코이노니아'로서 그리스도인의 친교를 의미합니다.

 

내가 갈보리채플에 오면서 가장 인상깊게 받은 말이 '펠로우쉽'이라는 말입니다. 갈보리 채플 펠로우쉽, 크리스챤 펠로우십과 같은 말은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그리 친숙하지 않은 단어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예배, 기도, 믿음이라는 말로 일관을 하고 있습니다만 갈보리채플 사람들은 펠로우십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보고 들음을 너희에게 전하는 것은 친교를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에 관해 눈으로 보고 주목하여 살펴보고 손으로 만진바 된 것을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우리와 친교를 갖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간단하게 말하자만 그들이 보고 마음으로 알고 피부로 느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전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와의 친교를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예배와는 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대상으로 나아가는 것에 비하여 펠로우십이란 내가 알고 확증할 수 있는 것을 갖고 나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는 증언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들과의 사귐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으로 연결 되는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떠나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14:11) 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그를 위하여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며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귐이란 생명의 말씀과의 사귐인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며 "아버지께서 내게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깨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줄도 믿었사옵나이다"(요17:8) 기도하시며 '저희를 진리로 거룩히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하셨습니다.

 

*메시지를 기록한 첫번째 목적

4절에서 사됴요한은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로라"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음식을 만들던가 또 열심히 돈을 버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 사용 목적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음식을 맛있게 먹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어머니의 마음은 기쁨에 충만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목사들이 설교 준비를 하는 목적은 먼저 자신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목사들이 토요일이면 설교 준비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합니다. 나는 그 말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목사가 되지 말았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까지의 목회 생활 속에서 설교준비를 하는 시간만큼 소중하고 기쁨에 충만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만약 내게 이 시간들이 없었다면 오늘까지 지탱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설교란 다 거기서 거기인데 왜 설교준비에 시간을 허비하느냐 의아해 합니다.

 

 그들은 유명한 설교자들이 이미 준비한 설교문을 갖고 거기에 살을 붙여서 아주 은혜롭고 목적에 알맞는 설교를 준비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은 참으로 위대한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남의 설교를 자기의 설교로 만들 수 있는 재주가 있다니 말입니다.

 

나는 한편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거의 일주일을 소모해야 합니다. 틈틈이 성경말씀과 주석을 살피며 머리 속에서는 자는 동안에도 그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이 의미하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에 전전 긍긍합니다. 그리고 내가 살피고 깨달은 내용을 정리하여 인터넷에 올리는 시간은 정말 한없이 즐겁고 또 경건해집니다.

 

나는 처음부터 인터넷에 원고를 올리는 습관을 갖어서 다른데 원고를 준비하면 왠지 글이 잘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관계로 갑자기 인터넷이  중단되던가 웹에 문제가 발생하면 한두시간 쓰던 원고가 날라가 버려 책상을 치며 괴로워 할 때도 있습니다만 내게 있어서 설교를 준비하는 시간은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할 귀중한 시간입니다.

 

내가 이처럼 설교준비에 많은 시간을 드리는 것은 그 무엇을 깨닫기 위한 열망도 있습니다만 가장 큰 원인은 그 시간이 기쁨으로 충만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이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의무가 되어 결코 기쁨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내게 있어 이 시간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독대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사도요한은 여기서  이 일을 자기 개인의 이야기로 하지 않고 '우리'라는 복수를 칭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처음부터 공동체로 출발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처음부터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함께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