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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4:21)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이요나 2005. 9. 5. 17:07

(요일4:21)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MP3]

(요일4: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이번 주간에는 무등산 제일 기도원에를 다녀 왔습니다. 일본에서 사역하고 있는 제자 장청익 목사가 40일 금식을 하고 있기에 격려도 할겸 나 또한 3일 금식이라도 하며 은혜의 시간을 갖고자 동참하였습니다. 일본에서 21일 금식을 할 때에는 거침없이 한 것 같은데 이번엔 3일도 힘이 들었습니다. 주변에 장기 금식하는 목사님들만 계셔서 참으로 민망하였습니다.  5월16일로 끝나는 장청익 목사의 승리를 축원합니다.

 

요한일서 4장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앞에서 적그리스도의 영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후반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내용들은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라 생각게됩니다만 사실 우리는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있어 실패를 하고 있습니다.

 

I. 하나님의 영과 미혹의 영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이 이로써 아느니라(4:6)

 

사도요한은 1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이라고 말한 부분에 대하여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spirit)이란 히브리어로 '루아크'로서 문자적으로 바람, 숨결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생명의 영'이라는 의미로서 동물에게도 소유한 '혼'(soul) 즉 '네페쉬'와는 또 다른 속성입니다.  동물에게 있는 혼은 육체가 죽어 흙으로 돌아가 그 존재가 영원히 상실하게 됩니다(전3:21)

 

오늘 성경이 말하는 '영'이란 인간을 창조할 때 하나님의 형상 즉 미학적이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지식적 속성을 가진 '하나님의 영'을 주신 것으로 천사의 영이나 사단의 영과 같이 영원한 영인 것입니다. 따라서 영이란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정신 즉 혼적인 부분과 다른 신적인 요소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하는 것은 영과 혼은 한켤레 신발과 같아서 서로 유기적인 관계 속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든지 그것을 믿어 의지대로 실행하면 그의 영이 그의 의지를 따라가데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너희 생각을 잘 지키라 이에서 생명이 난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거짓 선지자'란 이미 예수께서 언급하신 말씀입니다. 사도요한은 지금 예수께서 후일에 나타날 것이라 예언하신 거짓 선지자가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2절에서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창조시 넣어주신 하나님의 영인 '영'(a spirit)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사람들 속에 있는 영은 예수를 믿기전까지 사단의 영 속에 속하여 사단이 이끄는 데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가가의 대속으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광을 위해 보내신 보혜사 성령이 함께 하여(요14:16) 사람들을 예수를 믿도록 인도하고 또한 그를 믿는 자들 속에  거하시어 그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보혜사가 우리 안에 들어 오면 우리는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오신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원자(메시아)이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땅에는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요한은 3절에서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하였습니다.

 

물론 적그리스도는 그의 때에 나타날 이 세상의 절대적 통치자입니다. 그러나 사도요한은 여기서 그 배후에 역사하고 있는 영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이것을 우리에게 말하는 이유는 그 당시 이미 헬라에 만연되어 있던 그노시스 사상이 그리스도교에 유입되어 예수의 실체에 대하여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물체는 악하기 때문에 예수께서 육체로 오실 수 없다고 주장하며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 때에 비들기 형상으로 임한 하나님의 영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이미 떠나 버려 더이상 이적을 행할 수 없어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라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신 것도 실상이 아니라 비들기 형상으로 임한 가시적인 영이라 말하며 십자가 상에서 주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하신 말씀을 들어 자기들의 주장을 증명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인 일들에 대하여 심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뿌리가 아직까지 이 땅에 이어내려와 그리스도의 교회를 훼방하고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사상을 그대로 이어 받은 집단들을 크게 말해 여호와의 증인들과 몰몬교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문선명의 통일교에 해당합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개조한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을 말하면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 즉 구세주라고 믿지 않으며 실패한 영혼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일은 많은 신학생들 가운데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신 사실들을 부인하며 더나아가 부활에 대하여도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사상들이 자유주의 신학 속에 만연되어 마치 자신들이  신사고적 개혁주의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4절에서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하였습니다. 자녀라는 호칭은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인지요. 마치 하나님께서 아들아 하고 부르는 음성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의 음성을 들을 때 이러한 위로의 마음을 갖게되는 것은 우리가 믿을 때 그의 아들의 약속대로 그의 영이신 보혜사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계속하여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하였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진리를 말할 때 전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또 그 진리를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이러한 일이 예수께서 고향에 가서 가르치실 때에도 나타났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을 기이히 여기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지식을 전달할 때 믿지 않는 이유는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내가 믿고 있는 지식과 상반될 때 두번째는 그 지식을 전하는 사람에 대하여 너무 잘 알 때 그리고 세번째는 그 지식을 전하는 사람에 대하여 전혀 모를 때 믿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 고향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그에 대하여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메시아인 것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며 바리새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속한 비밀들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믿지 않은 것이며 적그리스도의 영들에게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지식과 너무 상반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 것입니다.

 

나는 가끔 많은 목사들로부터 질물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매우 신령한 사람들처럼 여기며 성경을 많이 읽고 아는 것처럼 자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몇마디 나누다 보면 이들은 가징 기초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잘못된 지식들은 사람들을 미혹하는 첫걸음인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이미 2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지식에서 많이 떨어져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누가 자신은 많은 것을 알고 또 교회에서 최고의 권위자라 해도 그들이 하나님의 뜻과 가르침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결국 아이들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상실로 나타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II. 하나님은 사랑이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4:16)

 

사도요한은 앞에서 적그리스도에 대한 경계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이단성과는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각 교회간에 분쟁의 소지가 되고 있는 이단 규정에 관한 것은 교리적인 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면 하루속히 성경의 가르침을 깨우쳐 신학적 균형을 잡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일들이 있을 것을 예상하여 서로 발을 씻기라 당부하시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적그리스도의 발단이 잘못된 지식 가운데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육신적 생각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은 그의 영혼을 지키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그로하여 사도요한은 2장에서 아직 성숙하지 못한 교회를 향하여 성령의 기름부음 가운데 거하라 한 것입니다.

 

이제 요한은 7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기록하였습니다.

 

4장에서 요한은 16절에서 다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말하라 하면 추상적이고 경험적인 답변을 말할 뿐 그 사랑의 실체를 말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말로 쉽게 표현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하여 요한은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하였습니다.

 

제자 중 빌립이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한 바 있습니다. 그때 주님은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8-9) 하셨습니다.  

 

주님은 계속하여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못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하시며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우리 생활 가운데 나타나야 할 것을 간접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오늘8절에서 요한 사도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의 행위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을 언급한 것입니다. 인격이란 가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체로 나타나는  삶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9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의 인격으로 나타나신 실체이심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계속하여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우리에게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신 것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모두가 상대적입니다. 사랑에는 부모와 자식간에 희생적인 사랑인 필레오가 있고 또 남녀간의 육체적 사랑인 에로스가 있습니다. 물론 이 모든 사랑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주신 것이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사랑의 표현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 즉 '아가페'안에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께 떨어져 나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승의 자랑에 빠져 조건적인 사랑에 치우치게 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하게 된다면 우리안에 활동하는 필레오나 에로스적인 사랑이 모두 그의 뜻 안에서 균형을 갖게 될 것입니다.

 

서도는 11절에서 우리에게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의 속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서로간에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은 주는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주는 자가 받는 자 보다 복이 있다 하셨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그 은혜로 나타나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이것은 일방적이 되어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사랑할 때 그 댓가를 바라고 하여서는 않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즉 아가페의 첫번째 정의입니다. 요한은 9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어떤 댓가를 바라지 않고 나타나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표현은 자기의 유익과 관계없이 선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타나야 하는 속성을 언급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사랑은 서로 사랑하라 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알게 하심.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그의 뜻대로 실천할 수 있을 까요? 이에 대하여  요한은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는 줄을 아느니라"(13) 하였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시면서 보혜사 성령을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우리 안에 거하셔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또 그의 뜻대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10) 증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는 성경적 원리는 아주 간단 명료합니다. 요한은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하였습니다. 누가 가르쳐 줄 것도 없이 그의 영이 우리안에서 그의 사랑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증거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을 것을 믿을 수 없으며 알지 못하는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 나의 죽은 영혼을 살리시고 지금도 우리 안에서 영으로써 그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계신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17절에서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여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심판날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함에 대한 주의 판단이 계실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반듯이 다 주의 심판대에 나아가 각 사람이 행한 행위대로 판단을 받을 것이라'(고후5:10)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께서 행하신대로 행한다면 우리의 사랑이 세상 가운데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요한은 18절에서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 뒤에는 형별이 있음이라 두려워 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용기를 언급한 것입니다. 사랑의 용기는 어머니 속에 강열합니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로 발을 딛이지 못하는 것은 시련과 고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두 사단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부한다면 그는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수 없느니라"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다시 형제 사랑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대상을  언급한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말씀과 위배된 것 같습니다만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으면서 정작 주의 형제간에는 시기와 질투로 다투고 경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형제 사랑이 어떻게 실천되어야 할 것인지 깊이 생각하여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먼저 주의 가르치신 말씀을 다시한번 상고해야 할 것입니다. 5장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