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고린도전서

(고전4:21) 니들 종아리 좀 맞을래?

이요나 2002. 11. 12. 14:27

(고전4:21) 니들 종아리 좀 맞을래?

 

이제 우리의 성경공부는 고린도전서 4장입니다. 3장에서 바울은 성도와 사역자들의 위치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바울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인 성전으로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역자들에 의하여 집을 지어간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바울은 3장에서 자신과 함께한 복음의 일군을 하나님의 동역자라 하였고 자신들의 사역을 농부와 지혜로운 건축자에 비유하였습니다. 바울이 사역자들을 농부에 비교한 것은 농작물의 성장이 농부들의 심고 물을 주는 열정적인 노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천혜의 혜택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며 자신들을 하나님의 동역자라 하였습니다.

 

농부는 풍성한 추수를 위하여 하나님의 천혜를 기원하며 합심하여 심고 물주며 농작물을 키워 나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풍선한 추수가 농부들의 노력에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역자들의 전도와 노력으로 한 영혼을 구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예정된 하나님의 긍휼하신 사랑과 은혜로 구원되는 것과 같과도 같습니다,

 

또 바울이 자신을 지혜로운 건축자에 비유하였습니다. 여기서 지혜로운 건축자란 모든 설계와 제작을 맡은 제작자이며 책임자임을 의미합니다. 과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짓게 하셨을 때 모든 양식을 주신후 그 일들을 위하여 지혜를 주신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따라서 건축자는 주인과의 계약에 따라 그 터에 맡는 집을 설계하고 디자인하여 합당한 인력과 재료를 준비하여 집 주인의 예정에 맞추어 공사를 마무리 하여야 합니다. 또한 건축 공사의 가장 중요한 것은 터를 닦는 일입니다. 바울은 "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문선명 그리스도라는 터에 집을 짓기도하며 정명석 그리스도라고도 하고, 하나님 어머니라는 터까지 나왔습니다.

 

오늘 4장에서 바울은 자신들을 가리켜 "그릭스도의 일군"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사용한 일군이란 단어는 배의 가장 밑에서 노를 젓는 노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고대 영화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당시 배 밑창에서 노를 짓는 노예는 일체 자유가 없는 예속된 종으로 권리와 자유가 박탈된 상태입니다. 그들은 죽어야 풀려 날 수 있는 처지입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집을 관리 감독하는 청지기의 직무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직책도 종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요셉은 시위대장 보디발의 청지기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나누어주는 자"(dispenser) 즉, 하나님이 계시하신 진리를 나누어 주는 자라는 의미를 부각하였습니다. 어떤 종파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성례(카톨릭의 성찬식)라고도 주장하는데 그것은 자신들만의 성직자로서의 특권의식을 주장한 것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은 2장에서 하나님의 계시인 복음을 비밀이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단언하였습니다. 여기서 문맥상 "그리고"라는 단어는 "이 땅에서"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충성이란 자신과 주인 사이의 권위의 질서를 말하는 것으로 사역상 부여된 권위를 남용할 수 없음을 전제로 합니다. 계속하여 바울은 이러한 자신들의 충성에 대하여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사람들은 남의 하는 일에 대하여 판단하기를 좋아합니다, 자신의 일은 판단받기 싫어하면서도 남의 일들은 이렇쿵 저렇쿵 판단하기 일 수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 하노니"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복음 사역자들의 직분과 사역은 성도들이나 또는 세상으로부터라도 판단받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의로움(justification)은 오직 공의로 판단하시는 주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들어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5절)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6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의 책임이 아볼로에게 있지 않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개척한 이래 고린도교회는 아볼로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교세가 확장되면서 분열의 조짐이 생겨 아불로의 입장이 난처해졌습니다. 우리는 아볼로의 난처한 입장을 16장12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볼로는 자신이 심은 것이 잘 자라도록 물을 준 하나님의 동역자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아볼로는 바울의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서 신학문과 율법에 능통하여 이미 자신이 연구하고 터득한 지식으로 하나님을 증거 하였습니다(행18:16 이후 참조). 그러나 후일 아굴라를 만나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을 사도들에게 맡기셨음을 깨닫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성령으로 하나되었습니다. 따라서 아볼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지혜를 따라 성경을 가지고 그들을 가르쳤습니다(행18:28)

 

바울은 "누가 너희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뇨 내가 받았은 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경륜을 가추지 못하였을 때 나타나는 미완성의 교만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아직 완전한 지식에 이르지 못하였을 때 그 조금 터득한 지식에 도취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쥐꼬리만한 학문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나 또한 내 앞에 두신 갈보리채플의 아버지들을 통하여 받은 지식을 가지고 아직 내 안에서 나의 영이 미처 깨닫지 못한 미완성의 것들을 가지고 탱자탱자한 것을 돌이키면 정말 얼굴이 부끄러워집니다, 오늘 바울의 말은 나를 책망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바울은 "너희가 이미 배부르고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노릇 하기를 원하노라"(8절)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부모와 스승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자신의 자녀들이 왕이 되는 것은 자신이 함께 왕노릇하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스스로 높이 올라 왕노릇하는 것은 아비와 스승에 대한 모욕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왕노릇하기까지의 자신들의 희생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며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하며 후욕을 당한 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 즉 참고 비방을 당한 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10-13). 여기서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였다"는 것은 갖은 독설을 퍼붓는 자들을 위해 기원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주께로 받은 규범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하며" 라고 말하여 자신들의 생활을 위하여 친히 일하지 않을 권리도 있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들이 이처럼 희생을 아끼지 않는 것은 주께서 미말(최 극단의 상태)에 두어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 거리가 되게 하셨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나는 이 말씀을 읽으며 나는 오직 나의 잘됨을 위하여 밤과 낯을 가리지 않고 세상의 시달림과 모욕을 마다하셨던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내 어머니는 자신의 목숨으로 나의 수치를 대신 하시며 오직 아들의 영광을 소망하셨습니다. 이토록 오늘날 우리가 복음의 진리 속에서 화평을 누리기까지는 사도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잘나서 이처럼 부요하게 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다"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12절에는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기록되었습니다. 전후 문맥을 따라 우리는 가르치는 자들에 의하여 권위의 질서가 깨어질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볼로가 잘못 가르쳤다는 것이 아니라 삶의 경륜을 이루지 못한 지식은 사람으로 교만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권위와 질서의 균형이 깨진 고린도교회에 복음 안에서 나은 아들 디모데를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바울과 함께 생사고락을 하며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진리를 전수받은 디모데는 살아있는 복음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2장에서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과 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2:22)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자신의 지식에 자아도취 되어 스스로 자랑에 빠진 말쟁이들에게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말쟁이 김용옥이의 교만을 보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학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식을 폄하하려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의 말작란에 도취되어 박수를 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 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내가 매를 가지고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의 마음으로 나아가랴 묻고 있습니다. 내 개인적으로는 가시나무 회초리를 몇단 지고 가서 피가 나도록 때려 주었으면 합니다만,,,,잘난척 하는 넘들에게는 종이리가 약입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