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고린도전서

(고전3:19-20) 탱자탱자 하지 마라!

이요나 2002. 11. 9. 10:36

(고전3:19-20) 탱자탱자 하지 마라!

 

(고전3:19-20)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바 지혜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셨고 또 주께서 지혜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오늘은 고린도전서 3장 두번째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고린도교회의 개척 상황과 부흥의 원인을 살펴 보았습니다. 바울은 사도로 부름을 받은 후 바나바와 안디옥 교회를 개척후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브르기아 그리고 갈라디아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유럽의 전신인 마게도니아로 건너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어 빌립보를 중심으로 데살로니가 일대를 지나 아가야, 아덴, 그리고 고린도 지역에 이르러 교회를 개척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지역에서 세력을 잡고 있던 유대인의 대적과 우상숭배자들의 극심한 훼방을 받았던 바울은 그리스도의 오심까지 어떤 세대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온전한 복음의 터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사도적 역활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도약적 비전을 품은 바울은 심기일전하여 하나님 앞에 서원을 세운 후 이미 복음의 기틀을 이룬 유대와 아시아 일대의 형제교회를 방문하여 용기와 힘을 얻고 에베소에 와서 3년을 정착하여 그 뜻을 펼치게 됩니다.

 

실라와 디모데 그리고 아굴라 부부와 함께 1년8개월 동안 개척하였던 고린도 교회에는 아볼로가 사역을 하고 있었고 얼마후 그들로부터 많은 문제점들이 보고되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영적인 축복을 받아 부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 그들의 믿음의 상태가 어린 아이와 같다는데 있었습니다. 만약 어떤 일을 할 때 아직 그 일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널리 확장된다면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속히 어떤 조치를 통하여 바로잡지 않으면 않될 것입니다.

 

1절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바울은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한다"하였습니다. 이것은 1장에서 언급한 그들의 상태와는 전혀 상반된 말입니다. 바울은 1장5절에서 너희가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다고 언급하였습니다. 이 말들을 종합하면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지식과 지혜를 받은 능력의 소유자이지만 날카로운 칼을 들고 서 있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위험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2장14절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였다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육신에 속한 자는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택하심의 은혜를 입어 많은 성령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더우기 그들을 위하여는 바울과 함께 동역하던 복음의 증인들과 당대 능력있는 학자 아볼로를 통하여 엄청난 복음의 비밀들과 지식을 전수받은 하나님의 성도들입니다. 이들을 향하여 바울은 너희는 더이상 신령할수 없다 너희는 육신에 만족만을 채우고자하는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 부재를 거론 한 것으로 이러한 짓꺼리들을 하는 너희는 "사람도 아니다"(4절)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육신에 속한 자라고 하는 말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가장 커다란 욕이며 모욕적입니다. 우리는 자라오면서 부모들에게 이러한 말을 많이 들어 왔습니다.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그의 부모나 스승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말을 들으면 모욕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이들이 충분한 교육과 경륜을 통하여 세상사는 이치를 터득할만한 나이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우유병을 물고 다딘다면 그것은 그들의 부모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참을 수 없는 모욕인 것입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만화를 좋아하였습니다, 그 습관은 중학교 3학년까지 끝나지 않아서 중학교 삼학년 때에도 방과 후가 되면 만화방에서 살았습니다, 매일 밤 12시가 다되어 들어 오는 나를 더이상 참지 못한 어머니께서 "아니 네가 지금 초등학생이냐 네 나이가 지금 몇살인데 만화방이란 말이냐?" 하고 빗자락으로 때리셨습니다. 요즘에는 머리가 다 큰 놈들이 우유병을 입에 물고 다니고 있습니다.

 

교회에는 아직 담배를 입에 물고 사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담배에 대하여 말하면 간혹 어떤 사람들은 성경 어디에 담배 피지 말라고 써있느냐고 종지목을 대기도 합니다. 이것은 애들이 할말 없을 때 써먹는 억지생떼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가관인 것은 어떤 신학적인 문제가 나오면 입에서 게거품을 물고 열변을 토한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말이나 하지 못하면 중간이나 가지.... 에궁 이들에게는 더이상 말이 필요없습니다. "니들이 게맛을 알어?" 이 말 외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고린도성도들이 이 말을 듣는 이유는 분쟁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나는 바울계열이다. 나는 아볼로 제자다하고 서로 경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나는 장로교파다, 감리교파다 순복음파다, 이 시작은 서로 의견을 달리한 사람들로부터 시작된 것이므로 결국 고린도교회에서 아직 성장하지 못한 육신에 속한 어린 아이들이 2천살이 되도록 살아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사도시대로부터 교회 명칭은 계보간의 파벌형 명칭이 아니라 지역적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된 본질적으로 하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너희가 성령을 받으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지 장로파나 감독파 성결파나 순복음파가 되리라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서울 갈보리 채플을 개척하면서 사람들로 부터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당신네 갈보리채플은 무슨 파냐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2천살 애늙은이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고린도교회 말고 너희가 아직 어린아이라고 취급된 다른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교회가 아니라 유대인들로 구성된 히브리 교회였습니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은 성민으로 율법과 예배를 맡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니 시세말로치면 모태 신앙인 셈입니다. 그러면 모합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5장 12절에서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인지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하였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과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라"(히6:1-2)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듣기에 따라 알만한 처지에 있는 것들이 돌대가리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탱자탱자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모두 자아도취에 빠져 술 취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장하지 못하고 어린아이가 된 이유는 성경의 말씀을 올바로 배우지 못하여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변하지 못하고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데 있었습니다. (에궁 니들이 게맛을 알긴 뭘 알아?)

 

5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시누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말하며 그 대상을 바꾸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바울은 그들을 지도한 사역자들 즉 아볼로나, 바울이나, 게바나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성도들의 믿음의 본이 된 사람들이었음을 설명합니다만 문맥의 흐름을 따라 살펴보면 그 말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더럽게 되는 이유에는 사역자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게 팥나는 원리입니다, 분명이 알아야 할 것은 고린도 교회를 지도한 바울의 동역자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그들의 잘못된 사역으로 교회가 더러워지는 그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6절에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성장의 근본적 원리를 설명하며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을 위해 쓰시는 관리자요 도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교회의 성장은 심는 자와 물주는 자에게 있지 않음을 강조하며, 주께서 관리자로 세우신 사역자들이 무엇을 먹였는지에 대하여는 분명한 상과 벌이 있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 어린아이의 사람됨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으되 그 부모가 그를 무엇으로 키웠느냐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양적인 성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인 온전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즉 심은대로 거두리라는 하나님의 원리를 설명한 것입니다.

 

바울은 "네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10절)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근본을 언급한 것으로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복음의 터를 바꿀수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후일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터를 임으로 바꿀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의 가라지 비유와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아는 많은 이단들은 그 터를 임의로 바꾸어 자기들의 집을 짓고 있습니다. 통일교는 예수님 자리에다 문선명이를 갖다 놓았습니다. 또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의 자리를 슬며시 사람들 자리에 옮겨 놓았습니다. 어느교는 예수를 낳은 여인이 성도들의 앞을 막고 있기도 합니다. 이것은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이 거룩한 하나님을 욕되게 하려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 버린 것입니다.

 

바울은12절에서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집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말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리라 "고 증언하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성령세례란 주께서 복음의 증인을 세우기 위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능력을 부어 주신 것이며, 불세례란 그 부름을 받은 자들의 온전한 사역을 위한 공력의 시험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이것은 택하신 자들이라도 그들이 한 일에 대하여 주께서 불세례를 통하여 검증을 하실 것을 말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성경의 모든 믿음의 조상들이 시험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시기 전에 성령에 이끌려 40일동안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과 같으리라" 라는 말씀입니다. 불에 타 없어지는 것과 불이 났는데도 타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오히려 불의 연단을 받아 더욱 정결하고 완전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구약성전에서 사용되는 은그릇은 일곱번 불에 구운 것으로 정결케 하였으며 좋은 그릇은 풀무불에 구어냅니다.

 

성경은 성도들의 연단을 은이나 금을 연단한 정결한 그릇에 비교합니다. 이와 같이 불 세례를 통하여 복음의 일군들을 온전케 하십니다. 또한 잘 한 일은 응당 상금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누가 그 아품과 고통의 세월을 인내하고 달려 나가겠습니까? 후일 바울은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4) 하였고 모세를 믿음을 가리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11:26)하였습니다.

 

저는 30살에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성장에 가장 열정적인 교리를 갖고 있는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집사와 선교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신학을 하였습니다만 후일 내가 발견한 나의 믿음은 하나님의 것이 아닌 세상의 지혜와 지식들이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굉장한 믿음을 가진 사람같았는데 실상은 빈 깡통이었습니다, 사실 십여년 동안 내가 먹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신학적 교리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 성장에만 급급한 교회들의 경쟁에서 비롯되었으며 또한 근본적인 문제는 신학교 교육과정에 있습니다.

 

우리가 국문학과를 들어 가면 국문학을 전공한 교수로부터 국문학에 필요한 전반적인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렇게하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아 자신도 또 하나의 지도자가 됩니다. 그런데 신학교만큼은 다릅니다. 성도들은 신학교에 들어가면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완벽하게 배우는 것으로 압니다만, 부끄럽게도 신학교에서는 성경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학을 하면 전보다 성경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신학에서는 신구약 개론과 설교학, 전도학, 교회 성장학, 상담학, 성령론, 조직신학 등을 배웁니다. 그런데 신학을 졸업하면 그것을 쓸 데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시험 볼 때만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갈보리채플로 전향한 이유는 물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계셨지만 성도들에게 오직 성경전체를 심도깊게 풀어서 가르치는데 매력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 서울 갈보리채플에 나오는 성도들은 그러한 매력에 도취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내가 미국 갈보리채플을 방문하여 놀란 사실은 미국 내 수천개의 교회 분포를 갖고 있으면서 더우기 미국 최대교회 25개중 13개를 석권하고 있는 교회가 교단을 이루지 않고 개교회적 독립된 교회를 견지하면서도 모두 한 형제교회로서 아름다운 교제를 하고 있다는 것과 신학교가 없이 자체 내의 성경전문학교를 통하여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16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다시 언급됩니다. 거기서는 성적인 타락과 관계되어 사용되었습니다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밭이며 집인 하나님의 성도들이 더러워 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여기서 성도들에게 자신들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임을 자각 시키고 있습니다. 사실 목사들은 성도들을 너무 무시하고 얏잡아 봅니다. 늘 자신의 수족으로 생각하며 책망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계속하여 바울은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고 경계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도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길 좋아합니다. 온전히 깨닫지 못한 부분을 가지고 탱자탱자하기 일 수 입니다. 작년에 KBS에서 공자를 강의하던 김용옥씨가 요즘 다시 나타나 금강경을 강해합니다. 그런데 배꼽을 잡을 일은 그는 꼭 자신의 강의에다 성경을 끄집어 내어 탱자탱자합니다.

 

얼마전에는 보살이 식후 발을 씻었다는 말에 세례요한의 침례를 끌어다 붙이며 정화를 통한 부처와의 일체를 설법하며 이것이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로 전승하는 원리라고 하였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몽학선생의 탱자탱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지식이 성경의 지식에 이르지 못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유식함을 성경의 높이까지 끌어 올리려 탱자탱자합니다.

 

바울은 계속하여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리라"말하였습니다, 여기서 "궤휼"이란 간교하다는 말에서 파생된 말로서 교활하고 야비한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교회성장에 치우쳐 정말 세상의 도리에도 부끄러운 일들을 많이 합니다. 전도를 해오면 경품을 주기도 하고 헌금왕까지 세우는 판입니다. 또 성도들의 잘못된 허물이 나타나도 그에 합당한 말씀을 피해버리기까지 합니다.

 

바울은 "또 주께서 지혜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하였습니다. 여기서 "헛 것"이란 방향을 잃어버린 상태 즉 허망한 상태를 의미 합니다. 자신은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고 수많은 교회를 개착하고 또 엄천나게 큰 교회의 총수가 되었다 해도 후일 주께서 오시는 날 자신이 생전에 피땀으로 세운 것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불 타버린체 오직 자신만이 불구덩이에서 빠져 나온 모습이라면 그 얼마나 수치스런 모습이겠습니까? 아마 그는 생전에 자신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라 하여 박수와 갈채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얼마나 허망된 일일까요?

 

끝으로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이 얼마나 위대한 선포입니다, 성도들의 존재가 이처럼 새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사실 성도들은 시간과 물질과 봉사를 갈취 당하고 있습니다. 마치 성도들은 목사들을 섬기기 위하여 있는 존재같이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와 정반대입니다, 성도는 위대한 존재입니다. 다윗은 성도는 존귀한 자라고 노래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천사들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영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집 곧 하나님의 성도들을 위하여 택하심과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서 잠에사 깨어나 거짓에서 벗어나야 하며 진리 가운데로 들어 가야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그의 제자들을 위하여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나이다"(요17:17) 기록하였습니다. 아멘, 아멘 주여 부디 주의 뜻을 이루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