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고린도전서

(고전1:30) 잘났군 잘났어!

이요나 2002. 10. 25. 11:32
잘났군 잘났어!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여 함이니라"(고전1:30-31)



올해는 가을 들판을 보기도 전에 추위가 몰려 올려나 봅니다. 젊을 때에야 요정도는 지내기 딱 좋은 때였습니다만 허리 부러진 100살이 되고보니 무릅이 절로 시려옵니다. 다윗이 늙어 기동하기 쉽지 않았을 때 아들 솔로몬이 童女 아비삭을 이불 속에 넣어 준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내 나이 앞으로 얼마나 살런지 모르겠지만 아들커녕 마누라도 없는 내 신세는 동지섯달 추운밤을 어찌 보랠런지,,,,(궁시렁을 떨어 봅니다)


오늘은 고린도전서 1장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제 1장을 마쳤으니 언제쯤 고린도서를 끝내고 갈라디아 교회를 방문하게 될지 시작도 않해서 마음만 바빠집니다. 나야 나의 할 일을 위하여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이 글이 인터넷 상에 올라가서 아무도 보지 않은채 냉대를 받고 있는것은 않은지,,,, 그래도 호산나넷 칼럼에서는 오백여명의 독자들이 다녀가고 있으니 적잖게 위안이 됩니다.



이왕 글을 보았으면 젊지 않은 나이에 독수리 발톱을 휘날리며 장장 2시간에 걸쳐 성경여행 칼럼을 쓰는 나를 생각하여 점이라고 찍고가면 내 마음이 한결 따뜻해지련만...언젠가 이 글도 쓰지 못할 때가 오면 어쩔까 싶어 겁이 납니다.(헉..요건 협박인감??)



26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을 향하여 "형제들아"라고 부르는 바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요즘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성도를 보고 부르는 호칭과는 아주 다른 느낌입니다. 사실 우리 교회 속에서는 형제라는 호칭이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교회에는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전도사님, 목사님, 사모님만 있지 형제라는 말은 사라진지 오랩니다. 어쩌다가 형제님이라는 호칭을 쓰게 될 때에는 상대의 이름이나 직분을 모르기 때문에 사용하는 대중적인 호칭이 되었습니다. 아니면 갑자기 태도를 변하여 상대를 엄격하게 다를 때 사용하는 단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의 음성은 마치 자기와 피를 나눈 형제들을 부를 때의 느낌입니다.



바울의 신분으로 보자면 감히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로서는 감히 바라보기 조차 어려운 높은 위치입니다. 그런데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주 천한 신분의 사람을 가리켜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호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위층에서 아랫신분의 사람을 비아냥대는 호칭이 아니라 피를 나눈 형제로서의 사랑의 호칭인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세상의 지혜와 능력이 없는 자들로 그들의 출신 역시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을 페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말하였습니다. 이글은 언제 읽어도 나를 위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가 고린도서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들의 신분이 흡사 나와 같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말씀은 초기 갈보리채플의 사람들을 칭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1960년대 미국 갈보리채플은 히피들의 집단지였습니다. 그당시 세상에서 소망을 얻지 못하고 거리로 나와 동가숙서가식하며 살던 젊은이들이 예수운동의 물결을 만나 구원을 받고 오늘과 같은 미국 최대의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이러한 부름이 없었다면 그들과 나는 감히 어떻게 하나님의 종이라 불리우는 자리에 설 수 있었겠습니까?



나는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척스미스 목사의 제자 마이크 멕킨토시 목사(샌디에고 호라이즌 채플 담임/'영혼의 회복' 참조)를 만나곤 하는데... 그를 만날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신비의 능력을 생각하게 됩니다. 척스미스 목사의 간증을 들으면 젊은 시절 막이크 메킨토시를 처음 대할 때 이 청년은 회복 불능의 사람이 되어 버렸다고 생각했다고 하였습니다. 오랜 세월 그를 지켜 보면서 그가 온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마이크 멕킨토시 목사는 미국 샌디에고를 중심으로 가장 활력있는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갈보리채플에 소망을 가진 것도 회생불능의 인생을 살던 시절 그들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분으로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신비의 능력을 소망하며 달려 온지 10여년이 지난 후 나는 내게 다시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이제 또 다시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신비의 체험을 소망하는 젊은이들을 바라봅니다. 나는 한국에 나와 갈보리채플 개척을 하며 많은 젊은이들을 만났습니다. 최근에 만나는 젊은이들이야 모두 유수한 교회의 청년들이지만 나의 마음을 불타게 하는 젊은이들은 세상속에 버려진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볼 때마다 나의 심령은 통곡을 하며 또 그들을 대하는 나는 일치의 양보도 없이 그들 속에 역사하는 악한 영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그들 각자 걸머지고 해결하여야 할 멍에이지만 이 멍에에 대한 책임은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평안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은혜의 빛입니다. 그 이유는 주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채칙을 맞으며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고 또 먼저 주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그들을 중보할 책임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직 주의 말씀하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언젠가 필이 나타날 그리스도의 인내의 영광을 바라보며 나의 채칙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26절에서 먼저 "육체를 따라"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여기서 육체를 따라라는 표현은 다음에 나오는 지혜와 능력과 문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것이 아님을 의미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앞 문단에서 세상의 지혜에 대하여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21절) 라고 언급하였습니다.


바울의 주장은 하나님의 지혜를 알기 위하여는 세상의 지혜와 문벌과 학문과 능력이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잘난넘이나 못난넘이니 그 기준은 세상의 육체를 따라 혈통과 가문과 학별과 출신과 능력과 재능을 따라 생긴 것이지 하나님의 기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제로'로서 오직 그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세상의 지혜가 필요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은 세상의 지혜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불의한 청지기가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비유하셨습니다. 따라서 세상을 살아가자면 세상을 지혜를 터득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혜로는 하나님의 세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율법학자인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거급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는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 대하여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3)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세상의 지혜로 들어 갈 수 없는 하나님의 권세에 속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인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지혜를 혈통과 사람의 뜻을 따라 깨달을 수 있다면 수천년동안 하나님의 율법을 공부하고 지켜 온 유대인들을 누가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지 못하고 지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지식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거부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이는 아무육체라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하였습니다.



흥미로운 말씀이 1장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바울은 선포입니다. 이 말은 위에서 거론한 그들의 신분과 정반대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분명히 거룩하지 못하였고 지혜롭지 못하였고 능력 또한 없는 미련하고 천하고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으로 말하지만 쓰레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비밀이며 하나님의 지혜에 속한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처럼 그의 복음을 위하여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은 세상에서의 그들의 모습이 어떠했던지 천지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예정된 것입니다. 그의 목적은 부르신 우리로 그의 기업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바울은 "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2) 증언하였습니다.



바울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하여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 증언하였습니다. 우리가 창세전에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었던 자녀들이라면 어찌 우리가 땅에 속한 자들이 되겠습니까? 또한 어찌 세상의 지혜로 살아 갈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의 성품을 따라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에 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세상의 죄에 물든 우리에게 그 의로움에 들어가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구속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죄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는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