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고린도전서

(고전1:9) 코이노니아의 진정한 의미

이요나 2002. 10. 13. 20:09
(고전1:9) 코이노니아의 진정한 의미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1:9)



오늘은 고린도전서 시작 세번째 시간입니다. 결실의 계절에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면서 이 여행이 마출 무렵이면 나타날 풍요로운 하나님의 이삭을 생각해 봅니다. 아마 바울도 그러한 소망을 갖고 이 편지를 썼을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 9절에서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이 글을 읽으면서 세상에서 아무런 유익함과 소망도 없는 악의 삶을 살고 있던 나를 불러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교제케 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성경의 "교제" 라고 기록된 헬라어'코이노니아'(koinoaia)라는 단어는 영어나 우리 말로 그 의미를 정확히 번역할 수 없습니다. 우리말로는 친교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만 이것은 번역이 아니라 해석에 가깝습니다. 코이노니아는 친구 사이에 경함하는 우정의 관계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은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4:4)말하였습니다.



우리 몸의 각 지체들은 각 부분별로 매우 중요한 독립성을 갖고 있으면서 서로 밀접하고 깊은 관계 속에서 하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어느 부분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귀한 지체입니다. 따라서 우리 몸의 각 지체들은 독립성과 일체성 속에서 서로 아끼며 깊은 이해 속에서 긴밀한 관계를 갖고 서로를 돕고 있습니다. 또 부부는 어떻습니까? 부부는 마음과 몸 그 모든 것에서 일체성과 단일성을 갖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적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코이노니아(koinoaia)는 우리 각 사람의 지체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는 성체(聖體)로서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으로의 초대인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처럼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입었습니다.



더우기 세상에서 버림받은 쓰레기 같은 존재들이 이러한 관계를 갖었다면 정말 그 은혜는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무한한 기쁨이요 영광이라고 말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고린도교회가 하나님으부터 받은 은혜(카리스)가 무엇인지를 살펴 보며 그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한 그것은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하여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전1:5-7)고 언급하였습니다. 그들의 지식은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바울은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든 일"을 언급하며 "구변과 모든 지식"이라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여기서 구변이란 헬라어의'로고스'로서 지혜로운 말을 의미하며 고린도 성도들의 지혜로운 설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모든 지식에 이르도록 풍만한 지식을 구사할 수 있는 설교의 능력을 받았던 것입니다. 나는 미국 갈보리채플을 방문할 때마다 신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갈보리채플 사역자들의 놀라운 지혜와 지식의 설교에 놀라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으면 나타날 수 없는 능력입니다. 이와 같이 고린도 교회는 그 모든 일에서 부족함이 없는 상태로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고대하는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친히 그리스도로부터 책망할 것이 없는 자라고 증언 하였으니 더이상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잘못된 점들을 지적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고린도서를 이해하는데 가장 큰 열쇄가 됩니다.



바울은 그들의 분쟁의 소식을 듣고 먼저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라라"고 언급하였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앞서 말한 그리스도와 코이노아를 이룬 지체들에게는 어패가 있는 말들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지체와는 친교를 이루지 못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원인은 먼저 그들의 말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이란 일상적인 말이 아니라 복음의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말은 정말로 능변하였지만 무엇인가 서로 앞뒤가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 부름을 받고 같은 성령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면 그들의 가르침은 성령안에서 일체성을 갖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 서로 다른 견해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 부름받은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각 교파를 따라서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구원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갖고 있으며 어떤 교회는 성령세례와 은사에 대하여도 다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오심을 고대하면서도 주의 날에 대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이로서 각 교회들이 사분오열하여 여러 교파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나는 지금 분열된 교회들이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의 관계를 갖고 있는 일체된 교회가 분열된 원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할 자가 없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서 한 성령의 인침을 받은 지체들입니다. 그 지체들이 오늘 바울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같은 말(지식, 그리침, 설교)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분쟁은 서로 다른 마음 다른 뜻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다른 마음과 다른 뜻은 서로의 목적에 촛점이 마추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이란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갖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체된 지체이기 때문이지요. 마가복음 12장에서 주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서기관은 목숨과 뜻을 지혜라고 대답하여 예수님으로부터 "가 하나님의 나라가 멀지 않도다" (막12:34)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는 지체로서의 한 목숨 한 뜻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분쟁은 그리스도인에 되기 위한 계보간의 알력 다툼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바울에게 나는 아불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며 서로 도토리 키재기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는 갈보리채플을 개착하면서 이것을 실감하였습니다. 믿음생활을 잘하던 성도들이 미국에서 어떤 사람들이 오면 모두 그곳으로가서 줄을 서기 시작하합니다. 그 이유는 나는 정통 코스타메사 갈보리채플의 파다, 나는 척 스미스 목사님으로부터 직접 안수를 받았다. 나는 갈보리채플 성경대학교를 나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럴때마다 우리 교회에는 몇번씩 커다란 소용돌이가 일어나 몇몇 사람들이 시험에 빠지곤 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아직도 우리 가운데 비일비재합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 되기 위하여는 먼저 세례라는 관문을 통과하였습니다. 예수께서도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막16:16) 하셨고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던 날 베드로는 공회 앞에 담대히 서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행2:38)말하였습니다. 그르므로 세례란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관문이며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싯점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말하며 예수 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기를 권하니 그들이 세례를 받고 성령 충만함을 받았다고 증언 하였습니다(행19:2-6). 그러나 이것은 부르신 자들의 구원의 확증과 성령의 선물을 받기 위한 과정이지 위대함을 더하기 위한 것은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명예와 얼굴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들로부터 여김을 받기를 좋아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하려 함이라"(17절)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세례의 무익함을 말한 것이 아니라 세례의 본질을 설명한 것입니다. 세례의 본질은 사람으로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 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는데 있는 것이지 그 세례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자격증은 아니였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게 이러한 특별한 증세가 많이 일어난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사랑하신 것만은 틀림없는 가 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분쟁의 결과 나타난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