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고린도전서

(고전6:5) 바보 크리스챤

이요나 2002. 12. 13. 11:59

(고전6:5) 바보 크리스챤

 

(고전6: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말하노라 너희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그 말이 사실이냐? 자기 형제들 사이에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단 말이냐?(킹제임스 성경)

 

바울은 6장에서 고린도교회에 발생된 세번째 악한 일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 고린도 교회의 첫번째 악은 분쟁과 분열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 한 성령의 인침을 받은 하나님의 성도들이 자신들과 관련된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분열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분열을 획책하는 사단의 최대 전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악은 아직까지도 우리 교회 가운데 남아 있어서 교파별로 갈등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두번째 악은 윤리적인 문제로 성적 타락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입은 성도로서 가장 중요시 되는 성결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의 능력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은 성도들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사단의 공략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은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제 본문에서 지적하는 고린도교회의 세번째 악은 성도들의 문제를 세상 사람들 속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소송 문제였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한 이러한 문제는 고린도지역의 환경과 시대적 풍조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교회란 세상 가운데 세워진 하나님의 집으로서 지역적 환경과 시대적 배경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세상 가운데서 공존하여야 학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온전한 믿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영적 지식과 말씀에 대한 순종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당시 교회는 탄생된지 겨우 50여년의 세월이 지난 때로서 아직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되지 않았던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 당시도 구약의 성경이 있었지만 그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유대인에게 주신 율법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삶의 방법과 풍습과 관습 그리고 철학적 사고가 다른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의 율법을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를 통하여 직접 주신 계명과 삶의 규범이 있어 그들은 그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지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인이라 칭함을 받은 하나님을 모르고 육신의 소욕의 이끌림대로 살아 오던 이방인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도 수천년 동안 지켜오지 못한 율법을 지키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이러한 문제가 발생되었을 때 베드로가 일어나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누냐"(행15:10)고 책망하였으며, 예수님의 형제이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야고보의 입을 통하여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라"고 편지함으로 종결지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계속 문제가 발생되었고 그 때마다 이방인 사도로 부름을 받은 바울은 교회를 위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지 않으면 않되었습니다. 이렇게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유업을 받을 하나님의 교회 즉 성도들의 스스로 지켜야 할 신약성경이 쓰여진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규범이며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 하나님의 성도들이 그의 나라가 임하기 까지 지켜야 할 규범이라고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고린도 교회의 세번째 악으로 책망을 받은 성도간의 소송 건에 대하여 살펴 보겠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규범과 율례들이 모두 경전에 기록되었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동체 안에 공회를 세우고 의결기관으로 장로들을 두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은 삶 속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공회의 장로들이 율법에 기록을 따라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으로 새롭게 탄생된 공동체로서 그들에게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규범이 아직 주어지지 않은 때였습니다. 물론 주께서 오시는 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들인 성도에게 더이상의 문제는 있을 수 없겠습니다만 그의 날이 이르기까지 이 땅의 성도들의 삶 속에서 발생되는 문제들을 해결하며 살아야만 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배워 나갈 것입니다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주신 성령의 은사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었습니다.

 

그당시 아덴을 중심으로 고린도 지역 일대에는 소송법이 아주 잘 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헬라의 철학과 지식을 바탕으로 지식을 추구하며 살아 오던 이방인들에게 소송은 고품격 생활방법을 이루는 법치적 바탕이었습니다. 따라서 문제가 발생되면 그들은 으례 법정에 소송을 하고 양자가 모두 그 소송을 위해 중재인을 선임하고 양자 중재인 합의 하에 공정한 판결을 해줄 제삼의 중재인을 선임하였습니다.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십인회의 주재로 60세 이하의 시민으로 구성된 공정 중재인를 선임하여 판결토록 하였습니다.

 

공정 중재인으로서의 선발은 시민의 의무로서 규정되어 일단 선임되면 중재인으로 의무를 하여야 하며 그 판결의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30세 이상의 아덴 시민 속에서 차출된 배심원들에게 송치되었고 배심원들에게는 소정의 수고료를 지불하였습니다. 배심원은 작게는 201명에서 401명으로 구성하였으며 1천명에서 6천명에 이르는 배심원 판결을 요한 사건도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적인 소송 사례들로 인하여 그 당시 헬라 사람들은 소송 그 자체를 삶의 한 방법으로 즐기고 있었습니다.

 

오랜 관습으로 이러한 생활을 하던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교의 성도가 되자 성도들 가운데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할 때에도 그들은 생활 관례를 따라 소송을 제기하고 승소를 위해 자기편의 중재인을 찾아다니며 거드락거리며 뽐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 비일비재 하게 발생되다 보니 교회 성도들 간에는 자연히 중재인 또는 배심원을 중심으로 둘로 갈리게 되고 대립되는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또 교회 안에서까지 자신의 승소를 위한 운동이 전개되어 자연히 교회 안은 늘 이러한 소송 건으로 술렁거렸습니다.

 

바울은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1절)책망하였습니다. 여기서 '불의한 자'(the unjust)라는 말은 이방인들의 속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라는 칭호는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칭할 때 사용되는 어법이였습니다. 갈라디아 2장15절에는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기록되었으며 바울은 로마교인에게 "불의로 진리를 막는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선언하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불의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 사악한(wiched)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2절)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도(satint)란 불의한 자와 대치되는 그리스도인을 지칭합니다. 예수께서는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또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라(마41-42 참조)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음란한 세대의 구원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복음의 전도와 하나님의 기름부음 속의 지식에 있음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의 날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성도들 영광에 관한 것으로 바울은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하였고 또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딤후 2:12) 말하였습니다. 다니엘도 그날을 예언하여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신원하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가 나라를 얻었도다"(단7:22) 하였습니다.

 

또 주께서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로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19:28, 눅22:30)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날의 영광에 대하여 바울은 "모든 일을 그의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다"(엡1:11)하였으며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6)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처럼 성도의 권세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가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5절)고 책망하였습니다. 전후의 문맥을 따라 읽어 내려가면 참으로 부끄러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형제가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소송이란 판결을 받아야 끝이 나는 것입니다. 결국 누군가 하나는 범죄자로 낙인이 찍혀야 하는 것입니다. 재판 중 서로 자신들이 이기기 위하여 모든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입증이 될만한 상대의 모든 약점과 허물을 들추어내어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결국 이긴 사람이나 진 사람이나 똑 같이 자신들의 허물들이 들어나 망신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라고 할 때 삶 가운데서 발생된 문제를 형제들 서로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의 법에 의뢰하여 세상의 풍조에 이끌려 다니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을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 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말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직까지도 우리 교회 안에서 이러한 소송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각 교단 내에서도 총회장직을 놓고 재판을 하기도 하고 교회 분열에 따른 재산 분쟁이 일어 나기도 합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기독교 델레비 방송국 사건은 정말 세상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으며 얼마전 대형교회 목사의 성도 추행 사건은 그 판결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정말 세상 사람들도 하지 않는 일들입니다.

 

만약 교회 안에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면 먼저 각자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허물을 고하고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판결을 구했다면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 그리스도의 이름 속에 서로의 허물이 덮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며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에궁 싸우지 말거라 너희는 크리스챤 바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