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고린도전서

(고전7:32-34)이궁 마누라에 폭 빠져 버렸군

이요나 2002. 12. 21. 13:12
(고전7:32-34)이궁 마누라에 폭 빠져 버렸군


우리의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되었습니다, 국민은 개혁과 변화를 선택하였습니다. 희비가 엇갈리는 가운데 잠을 이루지 못한 분들도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오직 한마음으로 우리가 선출한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쳐 새로운 21세기 국가 대게를 이끌어 가야 할 것입니다. 어제 칼럼을 통하여 대통령선출에 대한 나의 견해에 대하여 많은 분들로 부터 찬반의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논쟁은 이제 더이상 우리에게 유익하지 못합니다. 당선된 사람이나 낙선한 사람이나 모두 우리의 지도자 반열에 오른 사람들입니다. 서로 합력하고 마음으로 모아 새 국가 건설에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제 우리 모임은 선거를 마치고 관악산 산행을 나섰습니다. 벼르고 별르던 산행인데 저는 불행하게도 사무실을 지켜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행이 이렇게 목요 예배 준비를 위한 칼럼을 쓰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 볼 목요 저녁 성경공부는 고린도전서 7장 두번째 시간입니다. 지난번에 우리는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사도로서의 견해에 대하여 살펴 보았습니다. 그중에 분명한 것은 절대로 이혼을 해서는 않된다는 원칙입니다. 그것은 결혼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시로부터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동성애자들의 합법적인 결혼을 할 수 있도록 성전환자의 호적 정정을 합법화 하였기 때문에 앞으로 결혼시 자매님들은 염색체 판별 확인서를 필수로 첨부하는 시대가 올지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이 나라는 악해져 버렸습니다. 나는 지금 성전환자를 합법화한 재판부에 헌법소원을 내려고 기도 중에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뜻을 같이 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동참을 하여 주시고 법률에 관한 지식과 재판에 관한 상식을 가진 분들께서는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오늘 우리는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7:20)라는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있습니다, 바울은 17절에서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말함으로서 이것은 모든 크리스챤에게 해당되는 메시지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 사도는 할례자와 무할례자에 관한 종교적 견해를 거론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민이라 불리는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간의 가장 큰 장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대는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가 교회 안에서 계속 마찰을 일으키고 있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이 있었고 그 율법은 하나님이 친히 그의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수천년 동안 지켜온 것으로 율법은 그들의 생활의 방편과 수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하여 유대인은 철학적 사상과 보편적인 세상의 지식으로 생활을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성도가 되었음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성도 사이에는 자연적으로 마찰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궁국적인 문제는 성도는 할례를 받아야 되는가 아니면 받지 않아도 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오늘날 물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않받아도 되는가와 같은 미묘한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할례 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를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라"(19절)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할 것을 분명히 하므로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마찰과 갈등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궁국적으로 율법과 하나님의 계명은 같은 맥락이지만 바울의 말하는 의미 속에는 습관적으로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유대인의 속성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은 신령한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문제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인이 되고자 하는 속성에 빠져 있었습니다. 율법으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것이며 율법은 의인된 자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 문제는 각 종파간의 종교적 의식의 마찰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개신교가 수용할 수 없는 카톨릭의 많은 종교의식들 그리고 각 개신교 간에 침례와 성찬례와 안수에 대한 다른 견해들은 교회의 일치에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바울은 종과 자유자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그당시의 사회적 구조를 이루는 성도들의 신분의 문제를 언급한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할례에 관한 것은 성도간의 종교적인 마찰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면 종과 자유자에 관한 메시지는 사회의 신분의 문제를 다룬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문제는 오늘날 우리 교회에 새로운 쟁점으로 부각할 소지가 있습니다. 점점 세상은 빈부의 격차를 더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국가의 자연 발생 사회구조 현상인데 최근 공산주의의 붕괴로 더욱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세상은 지금 급속도로 물질만능시대로 달려 가고 있습니다. 모든 정치와 이념은 결국 부와 명예를 성취하기 위한 통로가 되고 있으며 이제 국가 경영은 종교적 문제와 이념적 경지를 넘어 경제적 지위에 그 우선을 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으로 말하자만 육체가 자신의 의지와 종교적 경계를 지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일에 대해 성경은 이미 창세기 10장을 통하여 함의 자손 니므롯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니므롯은 하나님의 정하신 질서를 넘어 자기의 위치를 떠나 신의 경지에 오르려고 바벨론 성을 구축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다시 하나의 인류를 구축하기 위하여 바벨론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셈과 야벳이 시날평지로 내려 가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세계는 하나의 언어를 가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제 얼마 더 지나면 니므롯은 다시 시날 평지에 바벨론 성을 구축할 것입니다. 주께서는 이미 사람이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말씀하셨고 또 내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7:21) 말하여, 사회적 구조 속에 생성되는 신분을 인정하면서도 그 구조적 제도에서 벗어 날 수 있다면 그 길을 선택하라고 권면 하였으며, "주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7:22-23) 말함으로 종이나 자유자나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종임을 말하였습니다.



세번째로 종말의 시대에 바울은 처녀로 사는 것이 옳으냐 결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이혼자들이 다시 결혼을 하는 것이 좋으냐 혼자 지내는 것이 좋으냐 하는 문제를 거론하였습니다. 이것은 7장 앞부분에서 언급된 원칙에 부연된 설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앞에서는 혼인에 대한 성경적인 기본적 질서와 원칙을 말한 것이고 후자는 임박한 환난의 시기에 결혼에 대한 바울의 권면입니다. 바울은 29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라고 언급하며 몇가지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삶의 지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바울의 메시지는 임박한 환난의 시대에 살아 가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메지지임을 생각하여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메시지는 고린도교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임박한 환난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를 향한 메시지라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어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에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7:29-31)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종말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의 형태를 언급한 것입니다. 바울은 먼저 아내 있는자들을 향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나름대로 한가족이 평온한 생활을 하는 성도들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바울은 "아내 있는자는 없는자 같이 하라" 말함으로 남자 성도들에게 이기적인 세태에서 벗어나 고아와 과부들을 향한 신앙적 포용력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혼을 하고 있습니다. 또 실직과 경제적 파탄으로 가출하는 남자들이 많아짐으로 거리에는 노숙자의 물결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남아서 자신들의 삶을 지켜 가야 하는 홀로된 고아와 과부들입니다. 바울은 가정을 지키는 신실한 가장들에게 주변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하여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하고 말하였습니다. 매매란 이익의 수단을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요즘 무슨 일만 있으면 매점매석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혼란에 혼란을 더하고 민심을 흉흉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말이 오면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쓰지 못하고 각 사람의 정해진 길로 가야만 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쌓아두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 메시지는 세상사람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믿는 성도들을 향한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끝으로 바울은 임박한 종말의 시대에 누구를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가에 촛점을 마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바울은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하여 마음이 나누이며"라고 말하여 앞에서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라고 언급한 부분을 주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 목요예배만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은 2년전 우리가 처음 모일 때의 취지는 말씀 안에서의 아름다운 삶을 창조하기 위한 첫걸음이였습니다. 참으로 많은 형제들이 우리의 모임을 사랑하며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기에 힘써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가운데 결혼한 사람들은 얼굴조차 볼 수 없습니다. 아내가 있는 자는 없는 자처럼 하라 하였고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처럼 하라고 하였는데 하루도 빠지지 않던 사람들이 결혼을 하자마자 코빼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에 " 장가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7:32) 기록한 바와 같습니다. 혹시 이 메시지를 듣고 있는 여러분들도 뻔할 뻔자가 될 것은 틀림없습니다(웃음..)



바울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7:35)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분요함이 없게 한다는 말은 혼란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성도의 유익함 삶과 이치에 합당한 삶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사는 지혜를 말한 것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혼기를 노친 처녀들과 과부들의 재혼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먼저 바울은 혼기를 노친 딸을 둔 부모들에게 홀로지내게 하는 것도 또 결혼을 하게 하는 것도 죄가 아니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처녀 딸을 시집 보내는 자도 잘 하거니와 시집 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한 것이니라" 말하여 종말의 시대에 가장을 중심으로 온 가정이 말씀안에 거할 것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결혼 전에는 자녀들이 부모의 슬하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가정의 문제는 혼인을 하지 않은 자녀들이 부모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임으로 살아 가려는 데 있습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을 이루라"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결혼 전까지는 부모의 인격적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과부들에 대하여 바울은 "남편이 살 동안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혼녀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사별한 미망인에게 말한 것입니다. "매여 있다"라는 말은 굴욕적이고 억압적인 지배 형태를 말한 것으로 자유를 상실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상황이라고 이혼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의도는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말하여 재혼보다는 혼자 사는 것이 더 좋다고 권면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자기도 아내와 사별한 것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글을 보니 이요나는 정말 내가 혼자사는 것이 하나님 뜻인가 혼란스러워 지기만 한다, 그러나 난 분명히 내 가슴에 들어 오는 여인을 만나면 가차 없이 장가를 들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