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고린도전서

(고전6:12) 육체의 탈출이냐 초월이냐?

이요나 2007. 2. 27. 12:41

(고전6:12) 육체의 탈출이냐 초월이냐?

 

(렘6: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오늘은 고린도전서 6장 두번째 시간입니다. 우리의 목요저녁 예배는 날이 갈수록 무르익어가고 있는 듯 합니다. 교단 교파를 초월하여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귀를 기우리는 젊은 형제 자매들 속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육체의 한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믿음의 시선들을 발견합니다. 바울과 동시대에 살던 철학자 세네카는 "인간은 악을 사랑하며, 동시에 미워한다" 말하며 자신을 가리켜 "호모 논 토레라비리스" 즉 "용서 할 수 없는 인간" 이라고 자책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 동산에서 내어 쫓으실 때에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것에 대해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지만 아직 우리는 가죽 옷을 완전히 벗어버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스스로 죄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고자 하는 육체의 욕구를 탄식하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고 외쳤습니다. 우리 또한 매일저녁 같은 울부짖음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6:9-10)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유업이란 상속자라는 의미로 천국을 상속받는 것을 의미합니다(눅12:32, 마24:34).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에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들어 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는 내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많은 예언과 능력을 행하였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내가 도무지 너를 알지 못한다 하시며 "불의한 자여 나를 떠나라"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불의(the unrighteous)한 자란 외적인 면과 내면적인 모든 도덕적 품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21절에서 탐욕, 원한, 투기, 교만 등의 심령에 속한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거론한 내용 중 그 어떤 것 한가지를 행하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바울은 먼저 미혹을 받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미혹이란 속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속임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성도들 사이에서 만연되고 있는 것입니다. 정명석이는 여성신자들을 질병 검사라는 미명 아래 여러 명을 세워 놓고 성추행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임에도 해외까지 자진하여 찾아가 수청을 드는 여대생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얼마 전 SBS에서 정명석 교주의 성추행 사건을 폭로하기로 하자 전국에서 수 천명의 신도들이 여의도로 몰려와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웃기는 일은 자칭 구세주라는 정명석이는 홍콩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국제미아가 되어 수배 중에 있습니다.

 

바울은 11절에서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과거 성향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음란을 먼저 거론하였습니다. 여기서 음란이란 단어는 남창을 의미하는 아주 불쾌한 말입니다. 이 말이 먼저 거론된 것으로 보아 고린도 지역이 얼마나 패역한 곳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그들 중에는 우상숭배자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고린도에는 아프로디테라는 여신을 섬기는 커다란 신전이 있었고 수천명의 창녀들이 사제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간음과 탐색(여색을 탐하는 것)은 자연적인 환경이라 하겠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동성애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가 나오면 필자는 정말 가슴이 무너지며 머리에 커다란 돌을 맞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동성애는 헬라시대로부터 상류층에서 은밀히 즐겨오다가 로마시대에 와서는 황제에서 일반에 이르기까지 만연된 염병이었습니다. 헬라철학의 대가 소크라테스까지 동성애를 즐긴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고 로마의 최초의 15명의 황제 중 14명이 동성애에 빠졌음이 로마사 속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바울이 이 글을 쓸 당시 황제였던 네로는 스포러스라는 소년을 사랑하여 거세시켜 결혼식을 올리고 새 궁전을 지어 주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네로는 그 후 피타고라스라는 남자와 결혼하여 그를 남편이라 호칭하였습니다. 네로의 뒤를 이은 오도 황제는 네로가 거세한 스포러스를 후궁으로 맞이하였고 후대의 하트리안 황제는 안티누스라는 비두니아 청년과 살다가 그가 죽자 그의 동상을 세우고 그의 이름의 별을 짓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은 어떠한 가요? 이미 유럽에서는 동성애 결혼 법안이 제정되고 있고 동성애자들은 국가 경영 지도자급 선거에도 도전하고 있으며 성직자들 중에는 이미 잠정적 묵인의 사건이 되고 있습니다. 보수적인 기독교에서 동성애를 수용하여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고 AIDS확산 금지 대응책의 일환으로 동성애자들 사생활 보호정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얼마전까지 비판의 목소리를 갖고 있었던 우리나라도 이제는 거세한 동성애자들이 티비에서 박수를 받고 있으며 코믹프로에서는 여성남자의 켈릭터가 빠지면 진행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 교회에는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원어에 두 단어 사이 접속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둘은 한 켤레 구두임이 틀림없습니다. 또 그 사람들 속에는 술취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끊임없이 술을 마신다는 의미(메토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석회 암반 지역으로 상수도 시설이 부족한 고린도 일대 사람들은 어른에서 아이까지 물을 섞은 포도주를 식탁의 음료로 사용하였습니다. 결국 그러한 식생활로 하여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습관적 알콜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후욕하는 자와 토색하는 자라는 표현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후욕(플레오넥테스)이란 단어는 공격적인 획득욕을 의미하며 토색(할팍스)이란 말은 움켜잡는 정신을 의미합니다. 두 말 다 모두 정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이 거론한 불의한 일들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서신(갈5:19-21)과 에베소 교회에 보낸 서신(엡5:5)에서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또 그의 영적인 아들 젊은 목사 데모데에게도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딤전1:10). 바울이 지역과 민족과 풍습이 각기 다른 이방인들에게 동일한 내용의 편지를 쓴 것은 그만큼 바울이 살고 있는 시대에 과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천년동안 바울의 가르침을 받은 우리 교회들이 그러한 문제에 대하여 매우 둔하여져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둔하여진 것뿐이 아니라 매우 관대해져서 그러한 문제에 스스로 기피하며 도리어 의연한 태도를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적은 누룩이 온통 온 몸에 퍼져 그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할만큼 무기력증에 결려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절망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은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11절)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가인의 범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함의 패역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혹시 내 속에 뱀의 후손의 피가 흐르지 않는가 고민할 때도 있습니다. 아마 바울의 편지를 받은 고린도교회가 그런 기분이 아니였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인이라는 칭호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바 씻음(washed), 거룩함(sanctified), 의롭다 하심(justified)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혈통 속에 흐르는 육체의 저주들은 모두 끝났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세 단어는 모두 능동태가 수동태가 아닌 중간태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능력과 권능적 의미에서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중간태인 것은 인간의 책임이 있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깨끗 하려는 마음의 의지가 없이는 하나님의 씻음은 없습니다, 거룩하여지려는 마음과 소망이 없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임하지 않습니다, 의로워지려는 마음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13절에서 그 시대의 잘못된 철학적 사상을 염두에 두고 한가지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그 당시 사람들은 육체 더 나아가 물질적인 것 모두 더럽다는 의식을 가졌고 오직 영이 정결하면 된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헬라의 그노시스 사상이 만연되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자신들이 동성애와 같은 음란을 일삼고 있었으니 자신들을 합리화하기 위한 궤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먼저 음식물과 배의 관계를 설명하며 하나님이 폐하실 것이라 말했습니다. 이 말은 그노시스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듯합니다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인간의 삶에 지속될 일들 즉, 먹고 마셔야 하는 의식적인 관계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하게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말하여 주의 영이 영원히 우리 안에 함께 하실 것을 기록하였습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주께서 죄성에 빠진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고 우리 몸을 거룩히 하시려고 성령을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몸을 위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몸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19절에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와 같이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고전6:12)고 의미 심장한 말을 합니다. 이것은 자유자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내가 아무에게도 제재를 받지 않는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용납할 수 있는 여유와 자유함을 가진 자로서 이것은 육체를 탈출한 그리스도의 정결한 몸을 가진 자만이 말 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몸의 소중함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내가 주장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몸을 학대하여 창기와 같이 몸을 더럽히려는 습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세상 사람들일진 데 우리는 할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은 하나님의 성도 그리스도인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디 당신의 몸의 귀히 여겨 정결한 신부의 몸을 주께 드리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