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고린도전서

(고전10:7) 먹고 마시고 뛰놀고 싶었느냐?

이요나 2007. 2. 27. 12:44

(고전10:7) 네가 먹고 마시고 뛰놀고 싶었느냐?

 

(고전10:7) 저희 중에 어떤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종말의 시대를 사는 주의 형제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구약의 사건들을 상기시키면서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11절)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은 성령으로 감동케하여 쓰신 예언의 말씀임을 먼저 기억하여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역사를 지나간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로 생각하고 그 말씀들의 상징적인 의미와 믿음생활의 적용점만을 생각한 나머지 성경의 말씀 전체가 우리의 삶과 직결된 예언의 말씀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은 그리스도의 오심까지 그날을 고대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온전케 하기 위한 예언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10장 서두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말하여 지금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일들은 성도들이 꼭 알아야 한다는 중요성을 더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논법은 그의 서신에서 4번 거듭되고 있는데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세례와 성령의 신비에 대하여 꼭 알아야 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성도들로서 필수 사항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1장 25절에서 유대인의 전인 구원을 역설하였고 데살로니가 전서 4장13절에서는 교회의 휴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4가지 설교를 살펴 보면 두 가지는 유대인과 관련된 하나님의 섭리이고 둘은 교회시대의 나타날 중요한 신학적 요소입니다, 또한 이것은 오늘날 교회들의 논쟁점이기도 합니다.

 

그 첫번째가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10장으로 바울은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이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를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때에 율법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택하시고 부르신 자기 백성들을 약속하신 안식의 땅에 들이시기까지 신령한 능력으로 인도신 주의 역사를 설명한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하여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말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접근해 오는 율법적 제재의 행위들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0장 전체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멸망을 받아야만 했던 범죄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율법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려면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란 무엇인가요? 율법은 백성들의 행위에 대한 판결로서 정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율법은 백성들의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즉 은혜의 진실을 망종의 자유함으로 여긴 결과 그리스도의 날까지 천사들의 중보의 손을 빌어 죄의 멍에를 걸어 두신 것입니다.(갈3:19 참조).

 

바울은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이스라엘의 범죄를 고발함에 있어 먼저 "우상숭배"를 거론하였습니다. 십계명에도 우상숭배에 대한 경계가 제일먼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임을 의미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짐승들에게 있어서는 이 문제가 거론될 수 없습니다. 짐승들에게는 먹는 것과 성적욕구만 충족시키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로부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영혼이 있습니다. 이 영혼의 호홉이 아담의 범죄로 단절된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인간들은 영혼의 갈급함에 미혹되어 피조물의 형상을 따라 우상을 만들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 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인간은 사단의 미혹을 받아 그 예배함이 인간의 욕정과 결부되어 자신들의 욕정을 만족시키기 위한 예배의 도구가 되어 음행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를 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32장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따라 광야 있을 때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산에 오르고 백성들은 모세의 오기가 더딤을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금붙이를 모아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뛰놀았습니다. 오늘날도 우상들의 축제들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두 먹고 마시고 춤추며 뛰어 놀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이것을 논하는 것은 어느새 이러한 풍조가 하나님의 교회에 유입되려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크리스마스는 어떻습니까? 성경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 성탄절을 기념하기 위하여 갖가지 장식들을 세우고 먹고 마시고 뛰놀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고대 유럽의 조상들이 니므롯의 시대로부터 전래되던 다신과 번성의 축제인 농신제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탄생을 기념한다면 우리는 그의 제사도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육체로 오신 것은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을 수 없는 분이시며 영존하신 하나님이시며 만물을 창조하신 자이십니다.

 

바울은 16절에서 이러한 이방인의 축제들이 교회에 유입되려는 위험을 다음과 같이 경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계속하여 바울은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라고 의미심장한 말로 경고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께서 친히 자신을 생축으로 드려 피로 세우신 교회에 또다시 우상의 지식이 유입되려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오랜 세월 동안 어떠한 형상 앞에서 먹고 마시며 뛰놀고자 하는 속성이 관습화 되어 있었으며 사단은 그속에서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7절에서 이스라엘이 멸망하게된 두번째 원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이 말씀은 민수기 25장 9절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서 이방인 선지자 발람의 유혹에 이끌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의 여인들과 간음을 하게 되어 하나님의 진노로 염병으로 이만 사천명이 죽은 사건을 말한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발람은 이방인의 선지자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노래하던 자라는 것입니다(민24장 참조). 또한 우리 모두가 이방인으로 부름을 받은 종들이 아니겠습니까?

 

이로서 우리가 살펴 볼 것은 주께서 택하신 자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신비의 능력만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행하는 그들의 행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히13:7) 말하였습니다. 또한 주께서는 불법을 행하는 선지자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 하셨습니다(마7:23). 이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였던지간에 다시 새롭게 할 수 없이 타락한 자들로서 장차 맹열한 불의 심판을 받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히6:6, 10:26).

 

바울은 계속하여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당한 자들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민수시 21장 4-6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광야생활의 어려움을 인내하지 못하고 인도자 모세를 불평하다가 생긴 사건으로 결국 하나님께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불만하는 이들에게 불뱀을 보내어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긍휼의 종 모세는 이 때도 백성들을 중보하여 놋뱀을 높이 세워 그를 보는 자들로 구원을 얻게 하였습니다. 오직 장대에 높히 달린 놋뱀을 보는 자는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다.

 

끝으로 바울은 원망하다가 멸망을 받은 자들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오늘날 우리 사역자들이 유심히 살펴 보아야 할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민수기 16장을 인용한 것으로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의 반역입니다. 고라는 르으벤의 자손 다단과 아비람을 부축여 이스라엘 총회의 유명한 자 250인을 충동하여 모세를 거역하였습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남입니다. 따라서 고라와 아비람은 이스라엘 총회에서 나름대로 얼굴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지도자인 모세와 제사장에 대한 불만입니다. 자신들도 레위 족속으로 혈족을 따라 같은 반열에 오른 사람들인데 왜 너희는 하나님을 대변하여 설교를 하면서 편하게 먹고 살고 왜 우리는 성전의 관리 봉사만 하여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모세의 말에 따라 각자의 향로를 들고 하나님께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 땅의 입을 열어 고라와 그 일당들을 모두 삼켰읍니다.

 

요즘 우리들은 교회생활은 어떻습니까? 얼마나 불평불만을 하고 있습니까? 그 불만이 어디로부터 나나타는 것입니까? 선한 성도들로부터 입니까? 아닙니다. 각자 택함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로부터 비롯됩니다. 아직 그리스도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 자들의 불만과 불평과 불숭종으로 비롯되고 있습니다. 이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사사오열로 분열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날 이글을 보는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어리석은 자들이라 말 할 수 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유일한 민족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혈육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자로 성별되어 하나님을 예배할자로 부름을 받았으며, 의로운 자로 살아갈 하나님의 신령한 율법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이 땅에 누가 이스라엘을 송사할 입을 갖었겠습니까? 오늘의 우리는 과연 그들보다 더 성실하며 선한 행실의 열매를 먹고 사는 자들입니까? 우리를 향한 은혜가 그들보다 부족하였습니까? 우리는 원래부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바울은 14절에서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 다시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멸망의 역사를 설명한 것은 결국 종말의 시대를 사는 오늘의 우리를 향한 씀이었기 때문입니다(11절). 그러면 바울이 이처럼 염려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아닌 그들의 믿음 생활 속에서 또 다른 우상들이 탄생되려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15절에서 "나는 지혜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고 의미심장한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이 말 속에는 바울의 염려가 강하게 서려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축복의 잔 즉 주께서 잡히시던 날 제자들에게 베푸신 성만찬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17절) 말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거룩한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 속에 수천년동안 행하여 온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와 사랑과 화합의 날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교회 안에 자유함을 빙자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종교적 의식으로 바꾸려는 어떤 사람들이 나타나고 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18절에서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 말하여 율법 시대의 종교의식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자신을 드림으로하여 이제 더이상 제단은 필요 없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두 그의 은혜로 지성소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들 속에서 변천하는 우상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이것은 우상의 정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무엇이던지간에 우리로 우리 주 예수 앞에 거치게 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하나님을 향한 제물이라할지라도 그것은 우상의 제물이며 또한 그들은 우상에게 절하고 있는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을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말하며 그 말에 의심을 품는 자들을 향하여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 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말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당신은 지금 하나님 앞에 당신의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날마다 드리는 새벽예배는 무엇이며 금식은 무엇이며 산에 올라 허공을 치는 그 의식들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주를 위한 것입니까? 축복을 위하여 드리는 헌금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당신의 예배입니까?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23절)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 앞에 내가 나를 위하여 그 무엇을 하였다면 그것은 우상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끝으로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던지 마시던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하라"(31-33)고 명하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으로 채우신 축복의 잔을 다시 나를 위한 제물로 사용할 것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우상을 섬기다 멸망을 당한 이스라엘과 같이 영영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 우상은 당신으로하여 그속에서 먹고 마시며 뛰노는 중에 간음하며, 주의 말씀을 시험하고, 원망하며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의 지혜를 받은 우리는 오늘의 이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지식을 터득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여 나로 하여 오늘의 말씀을 알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영광 홀로 받으시옵소서.

 

*첨부된 화일을 보시면 척 스미스 목사의 영어 원문 텍스트를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