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고린도전서

(고전11:17) 그 나물에 그 밥이 아니냐?

이요나 2007. 2. 27. 12:48

(고전11:17) 그 나물에 그 밥이 아니냐?

 

(고전11: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조리어 해로움이라

 

고린도전서 11장 두번째입니다. 다음 주부터는 고린도전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성령은사에 대하여 공부하게 되겠습니다. 저 역시 이번 고린도전서 강해를 하면서 미처 깨닫지 못한 하나님의 은혜를 접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제가 알고 있던 고린도서는 무질서한 교회의 문제점과 그 대책들을 기록한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그 보다는 심각한 내용들이었습니다. 제가 새롭게 발견한 내용은 그 문제들이 성도들에게서 발생한 것이라기 보다 복음사역자들의 성경적인 무지에서 발생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고린도 교회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풍요롭고 여유로운 생활을 하던 중상류 층의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에 휩쓸려 자기 좋은대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인품은 세상사람들의 가치기준보다 낮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아 성령의 은사를 받고 그 능력으로 교회에서 높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은혜로운 생활은 교회에서 덕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온전한 사람들에게 올무가 되기도 하고 교회의 걸림돌이 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하늘의 신령한 능력을 받았다고 해서 오랜 세월동안 세속적으로 살아온 삶의 방법과 습관들이 금방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는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였지만 덕망있는 문벌과 가정에서 도덕적 교육과 많은 학문의 터득으로 고귀한 인품의 소유자로 존경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의 문에 들어가 성령의 인침을 받고 그 능력의 나타나심으로 고귀한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우는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시건방지고 무지몽매한 종교 열성분자로 보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오늘날 우리의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와 지도자들을 하나님의 온전한 자들로 이끌기 위하여 다각적으로 발생된 문제들을 지적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고귀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기업을 물려받을 상속자로서의 규범과 질서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렸듯이 고린도 교회는 지역적 특색으로 말미암아 우상에 대한 경계가 안일하였고 또 음행에 대한 태도도 분명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 앞에서의 남녀들의 권위적 질서가 바로서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남녀의 외적인 차림과 습관에 대하여도 언급하며 세상 사람들 가운데 이목을 받지 말아야 할 윤리적인 것을 가르치며 11장 16절에서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 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고 단언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신학적으로 상황윤리라고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울은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한다"라는 강한 어조로, 지금부터 거론하는 것은 사도로서의 명령으로 교회들이 자각하고 지켜야할 규범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않는다" 말하며 "이는 저희 모임이 유익이 못된다" 하였습니다. 다시말하면 "너희가 저희와 함께 교회에 모임에 유익하지 못한 일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니 그 나물에 그밥이 아니냐?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서신을 이해할 때 "너희"와 "저희"를 구별할 수 있는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사복음서에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천국의 비밀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비밀로 되었다" 하셨습니다. 로마서 1장을 보면 바울은 1절부터 17절 사이에 로마교회의 제자들을 가리켜 "너희"라는 호칭을 11번 사용하였고 또 18절부터 32절 사이에 "저희"라는 호칭을 11번 사용하므로 너희와 저희를 분별케 하엿습니다. 이러한 문맥은 바울 서신 전체에서 두루 나타나 있어 이것을 잘 살핌으로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18절에서 "교회 모임에 발생한 분쟁"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분쟁'이란 말은 이미 1장10절에서 피력된 것으로 고린도서를 쓰게된 동기이기도 합니다. 사도시대에 교회에 분쟁이 발생한 것을 생각할 때 사단의 첫번째 책략이 교회를 분열시키는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 모임에 발생된 문제를 거론하면서 "첫째" 라는 수사를 달았습니다. 그러나 뒤에 둘째라는 수사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서열상의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으로 우리는 바울이 거론하고 있는 분쟁이 뒤에 거론되고 있는 만찬과 관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19절에서 그들 모임 가운데 발생한 분쟁은 결국 '편당'을 만들게 되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바울은 10장에서 이미 성찬에 대한 정의를 말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당시 성만찬 의식은 교회시대에서 커다란 신학적인 이슈가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초대교회에서 커다란 이슈가 되었던 성만찬 기념이 오늘날 교회 의식 가운데서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내가 대강 믿노니"라는 말을 통해 여기서 말하는 '편당'(schisms)은 분열(divisions)이 아닌 감정적 대립으로 나타난 파벌(parties)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모임 가운데 발생한 서로의 내적 불만들이 쌓여 발생한 감정적 불화였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말하므로서 교회 안에서 성도들의 모임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 위하여 서로 다른 의견의 대립도 필요함을 역설하였습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 모임 안에 발생된 편당으로 아직 교회가 분열될 조짐은 없었지만 교회안에 서로 불평불만을 가진 세력이 발생한다는 것은 매우 염려스런 일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20절에서 성도의 분당 행위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육체의 소욕으로 규정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편당'이라는 성경적 어원을 '바리새파' '사두개파' '해롯당'이라는 말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행15:5). 이들은 한 하나님을 섬기며 자신들이 추구하는 신학적 대치로 분열된 조직으로 모두 한 유대교 속에 존재하였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오늘날 각 교단 안에 또 다른 교파를 이룬 것과 같다고도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편당이 왜 생겨났을까요?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울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이는 취함이라" 말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그 당시 교회의 모임 속에 행하여진 만찬은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행하는 성찬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연회 또는 회식과 같다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더나아가 22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원인은 결국 각 성도들의 세상의 사는 환경과 처지에 따라 발생된 그룹에서 출발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저녁이면 친한 사람들과 함께 모여 저녁만찬을 즐기는 '에라노스'라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은 오늘날 회식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습관은 성도들은 교회 모임에서도 이어져 각자 준비해 온 음식을 지고 나와서 저녁 예배 후에 함께 애찬을 나누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것을 '아카페' 즉 '애찬'이라고 하여 교회에 모일 때마다 각자 준비된 음식을 가지고 나와 나누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주의 만찬'이라고 언급하므로 성도간에 모여 함께 예배하며 음식을 나누는 교제의 모임은 매우 중요한 것임을 시사하였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저녁 만찬은 하루의 삶 속에 가장 성스럽게 지켜온 정찬이기도 했습니다.

 

만찬의 풍경은 생각만 하여도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교제의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Agapae'라고 불리울 만한 가치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날 같이 삭막한 인심 속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풍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너희가 함께 모여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 말하므로 사랑을 나누는 애찬의 모임이 오히려 성도간에 불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넘치는 주의 만찬의 시간이 날이 갈수록 변질되어 끼리끼리 모이는 세상사람들의 회식과 같은 사교 연회처럼 되어갔기 때문입니다. 후일 'Agapae'(성만찬)은 교회사 속에서 엄청난 문제로 두각되어 결국 카르타고 공회의에서 금지 시키고 말았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대형교회의 어떤 선교회 모임에 참석해 보신 일이 있는지요. 물론 교회에 따라 다르지만 각 선교회마다 매월 돌아 가면서 거대한 행사를 갖기도 하며 유명한 목사를 초빙하여 애찬의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정말 각 교회의 크기에 걸맞게 모임의 규모도 달라서 어떤 모임은 정말 세상의 그 어떤 연회보다도 성대히 치루어집니다. 특히 연말 연초 또는 무슨 절기 모임이면 유명인사와 목회자 연예인까지 둥원하여 거대한 파티를 열기도 합니다.

 

물론 모든 교인들이 회비만 내면 참여할 수는 있습니다만 선교회 가입비가 선교회의 규모에 따라 100만원에서 천만원까지 라고 할 때 이러한 모임에 참여한다는 것은 정말로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일류 호텔에서 열리는 만찬예배임으로 복장 또한 갖추어야 하므로 평범한 사람들은 생각도 못하는 모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각 선교회 회원들은 그러한 모임에 초대받은 사람이라는 특권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선교회 임원들은 당회장 목사에게 특별 기도를 받게 한다는 명목으로 가입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23절에서 26절까지 주의 만찬의 의미를 다시한번 기술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약 성경 중 제일 먼저 언급된 성만찬에 대한 신학적 서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서술한 성만찬 기록을 통하여 먼저 자각하여야 할 것은 주께서 그의 몸을 깨뜨리고 그의 생명의 피를 흘리신 그 사역적 의미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들어 성찬의 의식적 기념행사를 강조하고 있는데, 사실 10장과 11장 전체 문맥을 따라 생각할 때, 바울의 분명한 의도는 주의 몸과 피를 흘려 몸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의 참여를 역설한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모임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이 변질되고 있음을 언급하며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자유함과 잘못된 의식으로 하여 성도들 자신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사람들이며 또 세상 가운데서 어떤 위치의 사람들인지의 의미를 상실하고 오히려 교만해져서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사교적 모임으로 변질되고 있음을 책망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주의 징계가 있을 것을 말하고 있으며 그 징계는 우리가 서로를 살피지 않은 결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여러 가지 징계(약한 자와 병든 자, 잠든 자)는 우리로 세상 사람들과 함께 멸망 받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우리의 모임을 잘 살펴 세상과 주님으로부터 판단 받지 않는 온전한 성도의 모임이 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이요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