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고린도전서

(고전11:16)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요나 2007. 2. 27. 12:49

(고전11:16) 변명의 여지가 없다

 

(고전11:16)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오늘은 고린도서 11장입니다. 11장은 앞장의 연결구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10장 후미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본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이러한 말을 하게 된 동기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출발한 지 얼마 안되어 교회안에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되었습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야 항상 문제가 발생되게 마련이지만 하나님의 성전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11장에서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발생된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저 바울 사도는 교회 안에서의 권위의 질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안에서의 권위에 관한 것이기도 하고 성도들의 윤리적인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1절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자기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빌립보 교회의 주제이기도 하며 바울 서신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말을 상고할 때 우리는 과연 우리와 같은 범인들이 바울과 같은 경건한 삶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두렵기만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면서 올바른 성도의 삶을 위하여 여러가지 규례를 말하였습니다. 그러한 규례들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지표가 되는 규칙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는 성경에 기록된 가르침 외에 많은 규칙들이 있습니다. 예배 시간을 지켜라, 정숙하고 돌아 다니지 말라, 너무 다른 사람들에게 충동적인 언행을 하지 말라, 등 등,,,우리 갈보리채플이야 다른 교단처럼 특별하게 규칙을 정하지는 않습니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규칙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 시간에 아멘 아멘하고 목사의 설교에 답을 하는 사람들을 제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로 인하여 설교자나 주변의 성도들이 충동을 받아 예배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교회에는 나름대로의 질서들이 필요합니다.

 

고린도교회는 나름대로 그 범규들을 지켜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내거 너희에게 가르쳐 준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킴으로 칭찬하노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 중에서 다시 발생한 새로운 문제들을 지적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 앞에서의 권위적 질서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 말함으로서 그들 중에 잘못된 점들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러나'라고 말하여 너희는 스스로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옳고 그름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너희들은 똥인지 된장인지도 구분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말하고 있는 데는 그당시 고린도 교회의 특수성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말했지만 고린도 교회는 항구도시로서 그 지역은 우상숭배와 성적 타락으로 만연된 곳이였습니다. 그곳에는 우상을 섬기는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저녁이면 모두 거리에 나와 창녀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연고로 여자들의 성정이 드세고 남자들을 무시하는 풍조가 다반사였습니다. 따라서 나름대로 현숙한 생활을 요구한 시민들은 그들과의 생활의 규제를 두기 위하여 여인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나녔습니다. 창녀들이나 성전 여사제들은 얼굴을 들어내고 거리를 활보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고린도지역의 문제는 교회가 생긴 이래 교회안에서 이상한 풍조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방인 가운데 먼저 주를 영접한 이들은 상류층이 아니라 밑바닥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지식에 이르지못한 그들은 율법과 제도에서 자유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식 가운데 그 당시 경건한 여인들 가운데 지켜 내려온 사회적 관습을 무시하고 수건을 쓰지 않고 꺼리낌 없이 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을 의식하여 머리에 꼭 수건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만 문제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이 외부 사람들에게 커다란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있어 신이란 존재는 하나님이나 우상이나 다 같은 존재로 밖에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보편적 의식은 수건을 쓰지 않는 여인들은 모두 성전을 섬기는 여사제들로 창녀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여인들 중, 그리스도인들의 세상에서 역활적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자유를 오해하여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으므로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교회의 성도나 아프로디테 신정의 여사제들이나 동류의 사람들이란 오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고 말하여, 각 교회의 특성에 따른 결정된 규범들을 지키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유대인이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서 거침을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하여 입니다.

 

여기서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여자들의 예언과 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남성들보다 여성들이 교회 활동에 활발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바울은 5절에서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말한 후 다시 13절에서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그 당시 고린도 지역의 아프로디테 신전의 여사제들의 종교적 관행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창녀생활을 하던 여인들이 여사제로서 종교적 우위에 서 있었던 그 당시의 정황을 생각하면 바울의 권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4절에서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수건을 쓰고 기도하거나 예언을 하는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말하고 다시 14절에서 "만일 남자가 긴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하고 말하여 그 당시 고린도지역에 만연했던 동성애자들의 활보를 경계하였습니다. 요즘에야 오히려 자칭 트랜스라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박수를 받으며 호적까지 바꿔주는 국가의 비호를 받는 세상이 되었습니만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의 자녀들의 의식 가운데 미칠 남여간의 오묘한 진리가 크게 왜곡되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바울은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말하고 다시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말하여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적 의미를 분명하게 거론하였습니다. 그러나 얼핏 오해하면 이것은 남여 평등에 위배되고 남성 우월 권위자라는 비난의 소지가 있습니만 바울은 이어서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말하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 앞에서의 권위적 질서를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 하시며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길에 버리워 밟히우리라 하셨습니다. 산동네가 숨기지 못할 것이요 또 등경을 마루 아래 두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풍조를 굳이 그대로 유지하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레가 없느니라"(11:16)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오늘날 사는 우리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남장 여인들의 교회출입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며 그들을 그 모습 그대로 받아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진정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것이냐에 있습니다. 그들이 진정 회개하고 돌아 온 주의 자녀라면 그들의 본성이 자신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을 가르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계속하여 세속의 생활을 유지하면서 교회를 출석한다면 그것은 회개도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욕되게 하고 더 나아가 교회 안에 누룩이 될 뿐입니다.

 

또한 우리가 경계하여야 할 것은 아직 우리 교회 안에는 술과 담배와 도박 심지어 음행에 빠진 사람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거듭난 크리스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술과 담배와 음행에 젖어 헤어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아직 그들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가르침 가운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행실들은 믿을 때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정을 떠나 성경의 말씀을 따라 살며 기도와 성령의 능력으로 거룩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의 은혜로 예수를 믿어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얻은 것과 또 다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거룩한 삶의 실천으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척 스미스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에서 담배의 문제가 거론되면서 담배를 즐기는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상당히 두렵고 극단적인 설교 같습니다만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영혼의 구원과 천국의 상속은 다른 문제입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그 누구의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다고 단호히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사랑의 본질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책망하지 않는 것이 사랑인가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는 하나님의 진리를 벗어난 자들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의 욕정에 내어버려 둠으로서 그들이 받을 형벌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롬1:20-31)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가운데 그 어떤 범죄도 용납하여서는 안됩니다. 성도는 거룩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늘에서야 바울이 말하는 사랑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책망은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염려는 그들의 속에 역사하는 악한 영들의 실체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죄는 미워하되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의 중심인 것입니다.

 

성경은 네 형제가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와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이것이 교회의 본질임을 압니다. 네 그렇습니다. 주님! 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몸 바쳐서 사랑한 그들의 영혼을 사랑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