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강좌/성령은사

신비의 성령은사 개론2

이요나 2003. 4. 13. 09:20
신비의 성령은사 개론2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서론*
우리는 뉴스를 통하여 아주 잔혹한 일들을 목도합니다. 그 일을 행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에 대한 감각이 없습니다. 선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신들을 예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들과 같이 되어 이미 무감각해진 것입니다. 감각이 없으므로 아주 심한 경우에서조차 냉담하고, 냉소적으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상황은 우리 사회 속에서 아주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서 체포된 사람들이 회개의 모습조차 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습니다. 그들의 표정은 세상에 대하여 매우 도전적입니다. 반성의 기미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양심의 가책도 전혀 받지 않는 듯 합니다. 신문에는 「양심의 가책을 전혀 못 느낌」이라는 보도가 종종 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감각한 신들을 예배하며 무감각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신을 만드는 사람들*
이사야서 44장에서는 사람들이 나무를 취하여, 그것으로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는 어리석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13절에서 그는 이와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목공은 줄을 늘여 재고 붓으로 긋고 대패로 밀고 정규로 그어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인형을 새겨 집(한글성경은 '신전'이라고 나오지만, 영어는 'house')에 두게 하며」그러므로, 나무를 세공하는 자는 나무를 취하여, 줄을 늘여 재고, 정규(compass)로 그어 집안의 받침대위에 두어 사람들이 보이게끔 놓습니다.

「그는 혹 백향목을 베이며 혹 디르사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취하며 혹 삼림 중에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택하며 혹 나무를 심고 비에 자라게도 하나니」즉, 나무를 취하여 자르고서는 일부를 태웁니다. 난로에 장작으로 지피는 것입니다. 나무를 잘라 취한 가지의 일부를 가지고,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합니다. 「그것으로 불을 피워서 떡을 구기도 하고」곧, 자기의 빵을 굽기 위해, 오븐에 그것을 넣습니다.

또 그 나무의 일부를 취하여, 우상을 만들어 숭배합니다. 「그것으로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기도 하는구나 그 중에 얼마는 불사르고 얼마는 고기를 삶아 먹기도 하며 고기를 구워 배불리기도 하며 또 몸을 더웁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여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사44:15-17)」라고 이사야는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아주 비합리적입니다. 나무의 가지를 가지고, 그것으로 불을 피우고, 고기를 삶고, 빵을 굽고, 나머지로 신을 만들고, 그것에게 절하고, 숭배하고, 기도하고, 「너는 나의 신이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 눈이 가리워져서 보지 못하며 그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라 마음에 생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으므로 내가 그 나무의 얼마로 불을 사르고 그 숯불 위에 떡도 굽고 고기도 구워먹었거늘 내가 어찌 그 나머지로 가증한 물건을 만들겠으며 내가 어찌 그 나무토막 앞에 굴복하리요 말하지 아니하니(사44:18,19)」

*2000년 전부터의 소문*
하박국은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나무더러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더러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고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합2:18,19)」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금속, 용해한 철, 은 등으로 우상을 만들고, 나무나 돌로 우상을 만드니 어리석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린도인이었으며,, 내가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고, 우상숭배자였던 것입니다. 무감각하고, 느끼거나 보거나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서 말이지요. 또 바울은 다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하지 않고. . .」

혹시 여러분들 중에 이러한 이야기를 들어 본 일이 있으신지요. 누군가의 친구의 친구가 어느 교회에 출석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누가 집회 중에 방언으로 말하자, 어느 성도가 그 방언으로 말하는 내용을 알고선,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심한 모독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이야기는 지금도 여러분들의 주변에서 떠돌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와 비슷한 이야기들을 한번 정도는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말의 진의를 추적하는 것이란, 구름 사이의 예수의 형상이 보이는 사진을 찍은 사람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꽤 오래 전부터의 소문으로, 고린도시대, 즉 바울이 고린도서를 쓰던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당시 이러한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그 방언을 이해하고, 저 사람이 예수를 저주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말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음을 성경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하지 않고」특히 교회에서 목사나 성경교사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과 직접적 관계가 없음에도 이야기를 남에게 전달하는 것은 아주 무책임한 행동들입니다.

*아바 아버지*
갈라디아서 4장 6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성령이 나에게 그 관계성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아바」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버지라는 말인데, 아바,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므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바울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4,15)」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하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역설한 것은 1절에서 말한 바 "신령한 은사"에 관한 것을 알기 위하여는 먼저 성령에 인도함을 받은 사람이어야 함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