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강좌/성령은사

신비의 성령은사 개론 3.

이요나 2000. 8. 11. 10:37
신비의 성령은사 개론 3.

(고전12:4)「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12:4)」


*은사의 다양성 *
바울은 12장에서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들에 대하여 말하려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제일 처음에 성령의 은사 중 아홉 가지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2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또 몇 가지의 성령의 은사를 첨부하고 있습니다. 또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5가지의 성령은사를 언급하고 있고 로마서에서 7가지 성령은사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은사들은 각각 다릅니다. 또, 모든 사람이 같은 은사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은사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만, 이들 은사는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성령은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같은 성령이므로 은사는 서로 경쟁하거나 상반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이기 때문이고, 단지, 어떤 특정한 교의(敎義)가 다를 뿐이며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 거하는 사람에 대하여 경쟁하거나 적대적인 입장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의 커다란 비극 중 하나는 진짜 적이 누구인지를 적절히 분별해내는 일을 게을리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해마다 수많은 교회들이 내부 분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커다란 비극입니다. 그 때마다 사탄은 주의 형제들 사이에서 불화하고 분열하고 있는 것을 얼마나 기뻐할까요? 결국 이러한 불화는 교회의 도리를 넘어서 다른 교회를 적대시하는 입장에 서게 되고, 우리와 다른 교리를 하고 있다고 하여 그 교회를 반대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은사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성령은 같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대항해서는 안됩니다. 어둠의 세계에서 사람들을 이끌어내고 하나님의 나라로 사람들을 이끌기 위해 우리들은 일치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적은 사탄입니다. 사람들을 사탄의 세계에서 구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이끄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 그 사람들이 우리들과 제휴를 하건, 우리와 같은 편이 되건, 우리와 같은 그룹의 일원이 된다 안된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른 성도들을 우리 교회에 출석하도록 하는 것에 필사적으로 매달려선 안됩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자기의 삶을 내어 드리도록 하는 것이 바로 목적인 것입니다.

*개성의 다름 *
우리들의 교회는 각 사람의 필요를 꼭 맞게 맞추어 줄 수 없습니다. 「저 별 볼일 없는 이 요나 목사가 뭘 알까? 아마 트리니티 대학을 졸업한 K목사가 하나님을 더 잘 알꺼야 그 사람은 유모가 있고 현실적이어서 똑똑해 보이잖아? 나에게는 그 사람이 맞을 것 같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은 각 사람에게 모두 잘 맞추어 줄 수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죄에서 이끌어내어 예수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그 사람이 자기의 믿음 안에서 성숙되어가도록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몇 달 전 어떤 사람이 갈보리 채플과 제휴하고 싶은 생각으로 저를 만나러 왔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의 설명과 갈보리채플의 이념에 관한 책자를 보더니 이것은 좋은데 이 부분은 마음에 안들고 저것은 좋은데 이것은 싫다는 둥 자기의 조건을 많이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저에게 "성령께서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것일까요?"하고 물어 왔습니다. 저는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답변했습니다. 성령이 갈보리채플로 인도하셨다면 나와 동일한 생각을 주셨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에게 "목사님은 갈보리 채플과 제휴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분의 쇼크는 일반 교회에서 할 수 없는 부분들을 우리가 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알게되면 쇼크가 더 클 것이라고 말해주고 갈보리채플에 오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여 주었습니다. 그는 또 우리가 교단을 만들려 하지 않는다는 그 자체가 이단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엄격히 말한다면 교단으로 분리 된 것이 성경의 가르침에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각 교파나 교단과 같은 것은 우리의 구원과 믿음에 있어선 무의미한 것들입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교회들에게 연합하자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 그 사람은 「당신들은 정말 폐쇄적인 집단이군요」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개방적이기도 하고 너무 패쇄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미국에서 사역하는 수천명의 목사들은 갈보리 채플에서 구원받은 목사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갈보리 채플에서 가르치는 성경말씀 속에서 영적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말씀에 대하여 거의 일치된 생각과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우리와 제휴하여서 또 하나의 교단을 이루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교회와 갈보리채플의 특성을 혼합하여 또 다른 얼굴을 만들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럴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름침과 예배속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고 행복하기 때문이지요. 교회가 크고 성도가 많고 적은 것은 하나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식탁에도 작은 그릇과 큰그릇이 어울려져 있어야 하니까요. 다만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는 각자에게 허락된 그 날에 받을 하나님의 기업이 있다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최고가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자기에게 있어서 최고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들을 부르신 그대로 서로의 간격들을 좁혀나가려 노력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은사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다 같은 성령인 것입니다. 같은 성령이기에 성령은 스스로를 방해하는 것과 같은 일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같은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받고 가르침의 은사를 활용하고 있을 때에 누군가가 일어나 큰 소리로 방언을 말하는 것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성령은 스스로를 방해하는 결과가 되어버리니까요.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같은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봉사와 직임*
봉사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 안에서의 여러 가지 봉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의 은사를 가진 사람,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 목사와 교사의 은사를 가진 사람, 다스리는 은사를 가진 사람, 혹은 돕는 은사를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여러 가지 봉사의 종류로 교회 안에서의 직임입니다. 그러나 주는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이런 여러 가지 은사들은 서로 경쟁하지 않고 상호보완의 관계입니다. 우리 주위에 위로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중요하고도 귀중한 은사입니다.

그가 비록 교회 안에서 중요한 위치에 서있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사역을 하지 않아도 괸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에게 위로의 은사를 주셨고 그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로가 그를 통하여 나타나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상한 심령이 치유되면 힘을 얻고 세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로하여 사람들이 세상 가운데서 악한 영들과 대적할 준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담대함을 얻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교회 안의 봉사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는 같습니다. 주는 한 분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모두 같은 주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주를 섬기고 있지만 같은 주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맞는 옷*
사실 저는 의식주의(儀式主義) 예배의 관습들에 대하여 반대해왔었습니다. 또 과도한 표현을 하는 오순절파에 대해서도 반대를 해왔습니다. 인간은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의 결점을 발견하게 되며 그것을 비판하고 싫어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 전통적 의식 속에 행하여지는 예배는 도대체 어디서 출발한 것일까요? 향을 뿌리며 물을 뿌리는 의식들, 그리고 중세 왕들과 같은 그들의 복장과 장신구들은 참으로 이해 할 수 없습니다.

또 오순절 어느 교파의 예배를 가보면 온통 술주정뱅이들처럼 소란스럽고 춤추고 넘어지고 고함을 지르는 모습들은 정말 어디로부터 시작된 예배인지 그 근원을 성경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인생을 살면서 발견한 것은 세상에서 역사하는 선하고 좋은 모습들은 오랜 세월 속에서 각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여 사람들을 원만하고 평안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그러한 악습에서 벗어 나와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전통적 문헌에 따른 예배 환경에서 예배드리고 싶어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오순절 교회 사람들 또한 이해할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터득하는데 예수를 믿은 후 20년이 걸렸습니다. 사실 나는 7년전 서울 갈보리채플을 개척하면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갈보리채플 예배에 익숙하지 못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일본에서 갈보리채플의 예배의 방법에 익숙해져 있었고 내 기질이 그것을 받아드렸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나도 순복음식 예배에 질들여 있어서 갈보리채플의 예배가 맞지 않아서 한동안 많은 갈등을 느꼈었습니다. 처음 순복음을 다니시던 저의 누님은 눈물을 흘리며 힘들어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경쾌한 리듬속의 프레이즈를 함께 부르며 차분히 앉아서 말씀듣기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에게는 각각의 기질들이 있어서 자기들에 맞는 환경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같을 필요가 없다!
예배의 모습은 다를 수 있어도 우리는 모두 같은 주를 섬기며 같은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구속받고 한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각자에게 주신 은사가 다를 뿐입니다. 따라서 예배의 방법에 따라 그 사람들을 판단하지 말고 그 사람들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롬14:4)」하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누구를 맞추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혹 넘어지고 소리지르고 하는 것이 맞지 않는다 해도 그 일에 대하여 당신이 언급할 일은 없습니다.

그를 세우고 너머 지는 지는 것이 모두 그의 주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은사의 참된 역사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는 같기 때문입니다.「또 역사는 여러 자기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12:6)」성령의 은사는 우리들 가운데서 다른 역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흉내내지 말자!*
은사가 같다해도 역사는 여러 가지입니다. 당신에게 예언의 은사가 있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 은사가 있다고 하십시다. 당신에게서는 예언의 은사가 나타나기 전에 흥분되어 가쁜 숨을 쉬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아주 조용하고 차분하게 은사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역사는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창조한 주님은 아주 다양성이 있는 분이어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같이 묶지 않고 각 개인과 개인으로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개인으로서 사랑하고 계십니다.

당신 고유의 기질과 성질에 따라 하나님은 당신을 개인으로 취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의 역사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사람에게 서로 다른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그대로 흉내내지 않는 것입니다. 은사의 역사에는 꼭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하여 다른 사람이 하는 방법을 따라 해보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은사의 역사에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어떠한 틀에 맞추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상자에 넣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개인의 인격으로 섭리하시도록 하나님을 그대로 두십시오. 우리를 포함한 이 땅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모두 유익하게 하심*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곧 은사가 다르고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입니다. 봉사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주는 같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역사에는 여러 가지 역사가 있지만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입니다. 즉 아버지 하나님입니다.「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다시 말해서 성령의 은사는 가지고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자기의 집에 혼자 앉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지긋이 만족하고 즐기라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가 주어지는 것은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적절히 사용하는 것으로 교회에 유익을 끼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은사를 부어 주시는 것인데 개인의 유익 개인의 덕을 높이기 위한 은사는 방언 밖에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방언의 은사가 아닌 다른 것은 모두 교회의 덕을 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14:4)」통역하는 은사가 있는 자는 그 방언의 은사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고전 14:5)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개인적인 묵상의 시간에 그 사람 자신의 덕을 세우는 은사입니다. 이와 같이 개인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지는 은사는 방언의 은사뿐입니다. 그 밖의 다른 은사는 사용하는 것에 따라 교회의 덕을 세우고 모두가 유익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배우는 동안 방언의 은사에 대해서는 좀더 상세하고 구석구석 살펴보기로 합니다. 저는 우리가 함께 성령은사에 대하여 공부하므로서 우리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오해나 무지들이 분명하게 해결되었으면 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 . (고전12:7)」이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성령의 은사에 대해 먼저 공부를 시작하고 다음에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배우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