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강좌/성령은사

신비의 성령은사 개론(1)

이요나 2004. 1. 16. 18:17
신비의 성령은사 개론1

*서론*

오늘부터는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살펴볼까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바울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성령의 은사의 개론부터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령은사 개론은 앞으로 3회에 걸쳐서 이어질 것 같습니다. 바울은 12장을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킹제임스 성경에는 은사(gift)로 기록) 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는 것을 원치 아니 하노니」킹제임스 성경을 살펴보면 "은사(gift)"(우리 성경은 신령한 것으로 기록됨)라는 단어가 서체(italic)로 쓰여져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서, 서체로 쓰여진 부분은 성경의 원본의 헬라어에는 없지만, 문맥상의 이해를 위해 성경 번역자가 삽입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한글 개혁 성경에 '신령한 것'이란 '은사'(gift)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지요.

바울은 4절에서부터「은사」의 다양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1절에 '은사' 즉 '신령한 것'을 삽입한 것은 성경의 문맥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원어가 의미하는 것을 '은사'나 '신령한 것'이란 단어로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기란 어렵습니다. 이것이 외국어를 번역하는데 따르는 어려움입니다. 외국어를 다른 언어로 완전히 표현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언어에 따라서 변하는 시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의 경우 제2, 제3의 말들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되는 기술적인 단어도 있습니다. 그만큼 꼭 들어맞는 단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번역(혹은 통역)이 해석하는 형태가 될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원어가 의미하는 원래의 뜻을 그대로 가지면서 다른 언어로 완벽히 번역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새 번역과 공동 번역에서는 '선물'(gift)라고 번역하였고 현대인 성경에서는 '영적인 선물'이라고 번역을 하였는데 이 모두가 4절에서 나오는 '성령의 은사'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2장의 주제는 '성령 은사'입니다.

*해석의 어려움
바울은 12장 서두에서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는 것을 원치 아니 하노니(영어 성경에는 '무지하지 않도록')」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방교회의 사도인 바울이 모든 교회들이 어떤 중요한 영적인 진리에 대하여 무지(無知)하지 않기를 원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특별히 교회들이 꼭 알아야 할 부분에 대하여 강조하는 네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 째가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절을 보면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이스라엘 역사가 많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이들은 구약은 이스라엘의 역사이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와 반대입니다. 특히 열왕기서의 내용은 결국 다시 역대기서에서 다시 거론되고 있으며 어떠한 내용들은 선지서 이사야에서 글자 한자 틀리지 않고 그대로 기록된 부분도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두 번 이상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발견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의 메시지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이 두번째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25절을 보면 바울은 이스라엘사람의 더러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완악하게 된 것을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버림받은 민족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의 택한 유일한 민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번째로 우리가 알아야만 할 것은 교회에 관한 비밀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에는 죽은 자들의 장래에 있을 부활과 교회의 휴거에 대하여 "너희의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네번 째로 성도들이 꼭 알아야 할 부분은 오늘부터 우리들이 배우고자 하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서두에서「신령한 것에 대하여 너희의 알지 못함을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권면하면서 그 이유에 대한 많은 주제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너희의 알지 못함을 원치 아니하노니" 라고 말한 부분은 '반드시' 또는 '어떻게 해서든지'라는 강력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무식은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것
이것은 그만큼 그 주제에 대하여 교회들이 무지(無知)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여 이 주제에 대하여 무지할 뿐더러, 이 부분은 그만큼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이므로 대개의 경우 모르고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사실 성령의 은사란 주제만큼, 오늘날의 교회가 무지한 부분도 없습니다. 각 교회들이 서로 대립하는 이론들이 그 어느 쪽이 옳다고 할 것도 없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한심한 것은 성도들 중에는 성령은사가 우리 삶 가운데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사람도 꽤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성령은사의 온전한 성경적 지식에 관하여 모르기 때문에 무지한 행동으로 이끌려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은 모든 은사에서 내세울 만큼 강렬하게 나타났던 고린도 교회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사실 고린도 교회에는 많은 성령의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성령 은사의 바른 사용을 위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바울 사도가 성령은사에 대하여 바른 지침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교회에는 엄청난 문제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방인이라는 언어적 의미
바울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자신의 말하는 의도를 주지시키며 다시「너희도 알거니와. . . 」라고 말하여 먼저 그들이 알고 있는 기본적인 기초적 진리들을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방인(gentiles)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고전12:2)」

사실 고린도 교회는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들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 있어서 '이방인'(gentiles)이라는 말은 '이교도'(heathen), '우상숭배자'(pagans)란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처음부터 우상숭배자였습니다. 우리들 또한 처음부터 이교도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 2장 1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교도)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서 바울은 이방인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그러므로, 이것이 이방인이라고 하는 말의 정의입니다.

*이방인라는 성경적 의미
성경에서 이방인이라고 하는 말이 사용되고있는 때는 그리스도 밖에 있고 이스라엘의 나라 밖에 있으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고 이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러므로 생각하라」혹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대로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7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더이상 이교도들이 행함같이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4:18)」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방인이라는 말의 의미보다 더 자세한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방인이란 헛된 마음으로 행하며 그 총명이 어두워지고 무지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으며 하나님과 성령에 대하여 그 마음이 굳어진 자인 것입니다.

* 이방인의 상태
따라서 우리들은 처음부터 이방인이었고 그 결과로 「말 못하는(dumb)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고전12:2)」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 못하는(dumb)'이란 말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그 당시 고린도시에서는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이 섬기는 우상들은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며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걷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우상들이었습니다.

다윗은 이교도들의 우상에 대하여 그들이 믿는"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시115:2)고 외쳤습니다. 우리가 형편이 좋지 못하거나 일이 잘 되어가지 못할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할 때 다윗은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라고 대답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친히 다스리고 지배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비극적인 일이 생기고 힘들고 환란이 닥쳐올지라도 하나님의 다스림은 변함 없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통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모두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교도들의 신들은 어떻습니까? 다윗은 그들의 신들 즉 이교도의 신들은 나무와 돌로 만들어진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냄새맡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고 다리가 있어도 걷지 못하고 목이 있어도 소리내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이방인의 결과
오늘의 본문 서두에서 바울은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이교도들의 신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말하지 못하는(dumb) 또는 벙어리(mute)우상이라고 기록하였습다. 즉 말하지 못하는 우상인 것입니다. 시편기자가 이교도의 우상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 중 재미있는 증언은 사람이 신을 만들며 사람이 우상을 조각하며 나무를 깍아서 우상을 조각하고 형태를 만드는데 그들은 결국 자기와 닮은 모습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상에 코와 눈과 귀와 입을 만들어 결국 자기와 흡사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들이 만든 신은 사실 자기보다 열등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눈을 만들었어도 그 신은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을 만들었어도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신은 자기보다 훨씬 열등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시편기자는 그것을 만든 이는 자기가 만든 신들과 같이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상을 만든 사람은 자기의 신들과 같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보다 열등한 신에게 예배하므로서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말못하고 귀머거리로 약화시킨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자기들의 신들에게 예배를 드리는 동안 그 신들과 같이 눈멀고 벙어리가 되어 진리나 지혜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배하는 신은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므로 그들은 성령의 일들과 신의 음성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그들의 신은 무생물이므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히 무감각해집니다. 또 냉담하고 거칠어집니다. 사람이 자기의 신과 같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은사개론 2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