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강좌/사랑의속성

(사랑학1)사랑의위치

이요나 2003. 5. 26. 16:44
(고전12:31)사랑의 묘약(1)



"너희는 더욱 큰 사랑을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

사랑이라는 말처럼 사람의 마음을 설레이며 듣기 좋은 말은 없을 것입니다. 옛부터 이 사랑이란 말로 인하여 사람이 살기도하고 죽기도 합니다. 이 사랑이란 말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것인지는 그 사랑을 체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새로운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계명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내린 율법과 규례를 의미하며 말씀이라는 의미도 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께서 새 계명으로 주신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필히 지켜야할 율법이기도하고 우리를 위한 생명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랑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랑의 의미를 깨우친다면 자신이 얼마나 교만하고 어리석은 크리스챤이였는가를 알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위대한 사랑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배우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말에는 사랑이라는 말의 어원이 하나입니다. 비슷한 말로 사모한다, 좋아한다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사랑이란 단어는 결국 하나뿐입니다. 다만 사랑이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하여는 남녀의 사랑, 부모의 사랑, 친구의 사랑 등으로 그 종류를 나열해야만 사랑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헬라어에는 사랑에 대한 단어가 네가지 정도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만 먼저 남여간의 육체적 사랑을 의미하는 에로스(eros)가 있습니다. 영어의 에로틱이란 말이 여기서 유래되었습니다. 스트로게(storge)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은 가족간의 사랑을 나타낼때 사용되는 단어로서 짐승이나 사람들 모두에게 사용됩니다.



요한복음 15장 13-14절에 소개되고 있는 필레오(phile)는 친구라는 말과 함께 사용되는 말로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사용되며 사람들 사이의 아름다운 관계의 유지에 적용되는 말입니다. 많은 크리스챤도 필레오를 아가페로 오해하기 쉬운 이유는 인간 관계 속에 나타나는 사랑이 대부분 여기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가페는 '거룩'(하기오스)이라는 단어처럼 본래부터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속한 말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4가지 사랑의 특성 속에는 대상을 향해 나타나는 자신의 아름다운 마음의 표현으로 실질적이고 행동적입니다. 그러나 에로스, 스트로게, 필레오는 그 대상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다를 뿐이지 본질적으로 자기 중심적이며 조건적입니다. 그러나 아가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사랑(요일4:7)으로 하나님의 본성 그 자체이며(요일4:8) 고린도 13장에 표현된 하나님의 신적 사랑입니다. 이 아가페 사랑의 표현이 가장 우리에게 잘 드러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서 아가페 사랑의 중심은 자기 희생입니다(요일4:9-10, 요3:16).



그러면 이처럼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속에서 나타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죄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죄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사랑을 체험하지도 또 그 사랑의 열매가 맺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무조건적 희생이라 할 때 죄의 본성은 자신을 위한 이기적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남을 사랑하는 그 이유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한 조건부적 사랑입니다.



헌신적인 부모의 사랑도 결국 그 자식들의 장래에 나타날 보상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부부간의 사랑도 자기중심적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친구들 간의 사랑에도 자신의 명예와 명성을 위한 기대와 조건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행하는 모든 사랑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사랑 즉 아가페가 아닙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살펴 보는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한 고린도전서 1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들로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히브리서의 믿음장과 함께 이 부분을 사랑장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의 사랑 즉 아가페를 온전히 이해하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요?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아가페는 인간으로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갖을 수 없으며 이룰 수도 없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선물로만이 받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도바울은 아가페에 관한 내용을 성령의 은사에 관한 내용을 서술한 12장과 14장 사이에 넣었습니다. 고린도 12장에는 성령은사의 목록이 나열되어 있고 14장에는 성령의 활용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고린도서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그들의 믿음이 '육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고전3:3)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육적인 자들이 된 이유는 많은 은사를 받았음에도 그 은사들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는 아랑곳없이 서로 물고 뜯고 경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받은 은사들을 가지고 서로 도토리 키재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14장에서 작은 은사(방언)보다 더 큰 은사(예언)를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배울 사랑장의 전반적인 배경설명은 고린도전서 12장 끝절의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헬라어 '사모하라' 명령이기도 하고 서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모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이기도 하고 실제적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큰 은사를 사모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더욱 큰'이라는 헬라어는 우월적인 가치를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12장 끝절에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위에서 열거한 아홉가지의 성령은사보다 더 우월된 가치가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바울은 12장 27절에서 모두가 그리스도의 한 지체인 것을 강조하면서 그 우월성에 대하여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방언이라 나열하였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사모하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창세기 3장에서 처음 언급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범죄 후 하와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판결입니다. 이 말 속에는 질서와 권위에 결속된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는 것은 여인이 자신의 남편을 사모함 같이 필연적인 것입니다.



또 '제일 좋은 길'이란 아가페는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삶의 양식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목적에 맞는 삶의 길이 있습니다. 이것은 생활 양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아가페는 그리스도인이 가장 우선적으로 선택할 생활 양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아가페가 실질적이고 체험적이라는데 있습니다. 바울은 '너희에게 보이리라" 말함으로 아가페는 우리 눈으로 보여지는 것임을 설명하였습니다. 잘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음과 같이 이상적인 사랑일 것으로 알기 쉽습니다, 주의 제자 빌립이 주께 하나님을 보여 주십시요 말한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주님은 나를 본자는 하나님을 이미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통하여 세상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은 더욱 큰 질서적 권위가 있으며 성도의 필연적 사모함의 대상이며 성도들의 삶 속에서 제일 귀하게 선택하여야할 생활양식이며 삶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이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 사랑장을 좀더 세밀하게 분석하여 봄으로서 아가페의 본질을 깨닫도록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