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예언서 강해

(단5:22)Sample이냐 Model이냐

이요나 2003. 8. 11. 12:42

(단5:22)Sample이냐 Model이냐



(단5:22)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홉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오늘의 이야기는 느부갓네살 왕의 시대를 끝내고 그의 손주 벨사살 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그 생전에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천국에 갔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가 세운 신바벨론 제국은 예레미야가 예언한대로 70년으로 막을 내리고 맙니다. 전세계를 통일하고 세기의 제국이 이처럼 하망한 역사로 끝을 낸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인간무상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인생들은 한 세상 살면서 그 무엇을 위해서 그처럼 목숨을 걸고 뛰어 다녀야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 5장에 나오는 벨사상 왕은 느부갓네살 왕의 아들이 아니고 그의 자손입니다. 원래 느부갓네살은 자기의 아들 이월 마르득(왕하25:27-30, 렘52:31-34)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나 그는 처남에게 왕위를 빼았겼습니다. 그 후 벨사살의 아버지 나보니더스(B.C.556-539)가 왕권을 회복하고 메디어, 루디아 일대를 정복하여 다시 바벨론의 위세를 떨쳤으나 그는 정치에 매력을 잃고 이방 종교에 심취하여 아들 벨사살에게 나라를 맡기고 아라비아 데마로 내려갔습니다. 결국 벨사살은 오늘 5장에 소개된 것처럼 페르샤의 바사에게 죽임을 당하고 바벨론의 시대가 종결됩니다.



우리는 이 시대로부터 150여년 전에 이미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이 때에 관한 메시지가 주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46장과 47장에서 바벨론 제국의 멸망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44장 28절에서 175년 후에야 있을 페르샤 왕 고레스의 일을 미리 말하였습니다. 아직 이 땅에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의 이름까지 말하여 예언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벨사살 왕의 때는 이미 정치적으로 쇄약해저 주변의 다른나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왕국은 워낙 난공불락의 요새로 지어졌고 또한 20년을 먹을 만한 식량이 비축되어 있어서 벨사살은 여러 지역에서 계속 패전을 격는 중에서도 누가 바벨론 대국을 멸망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자만심에 빠져 자신의 위세를 더욱 나타내기 위하여 자주 궁중연회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도끼자루 썩는줄 모르고 신선노름에 빠져 있는 격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불안을 예지하고 있는 인간들이 구태어 자신의 안녕과 부귀를 사람들에게 나타내고자 하는 허세이기도 합니다.



벨사살 왕은 귀인 일천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그 일천명 앞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일천명이 들어 갈 수 있는 연회장을 생각해 보십시요. 고고학자들의 의해 폭 약16미터에 길이가 46메타에 이르는 거대한 방을 발굴된바 있습니다. 얼마전 러시아 궁을 복원하여 국빈들을 위한 연회장으로 사용한다는 기사를 읽은 일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금장식 벽과 등 그리고 금촛대와 금그릇으로 장식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고대 러시아 제국의 찬란함을 자랑하는 궁전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러시아를 생각할 때 한낱 연회를 위하여 궁전을 복원할 가치가 있는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란 이처럼 쓸데 없는 일에 몰두하기 일 수 입니다.



일천명 앞에 웨세를 부리며 술잔을 기우리는 벨사살의 심정은 어떠할까요? 어쩌면 계속 전달되는 패배의 전장 보고를 일부러 잊고 싶어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의 허세는 정말 가관이 아니였습니다.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을 가져와 그 연회에 참석한 귀인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함께 그것에다 술을 부어 마셨습니다. 그 그릇들은 오직 하나님의 전과 다윗의 왕궁에서 사용하던 기물들이였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들은 술이 만취되어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4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볼 때에 천인공로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국가의 멸망으로 받는 수치는 정치적인 것만이 아니라 그 민족의 자존심과 또 그들이 섬기는 신적인 존재들까지 인간 이하로 내동댕이 치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은 너희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속에서 욕을 당한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 것이였습니다. 거나하게 술이 취하여 마음것 거드락을 부리던 왕이 그것을 본 것입니다. 사람의 형체가 보이지 않는데 손가락이 벽에 글을 쓰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요. 왕이 그것을 보는 순간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쳤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극도의 공포의 순간을 묘사한 글입니다. 넓적다리 마디가 녹눈듯하고 무릎이 달달달 떨려 서루 부딪히는 그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요, 아마 오줌이 바지 사이를 타고 흘어내렸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정도 되면 이성이 마비되고 죽음의 사자가 눈 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극도의 공포란 아무런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그 공포를 받아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습니다.



벨사살은 얼마나 놀랐던지 혼비백산하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정쟁이를 불러 들이고 바벨론 박사들에게 이 글자를 읽고 해석하는 자에게는 금사슬을 목에 드리우고 나라의 셋째 치리자로 삼겠다고 하였습니다. 나라의 세째 치리자란 자기 다음의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직 그의 아버지가 섭정 왕으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국가의 먹물들은 모두 동원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하나도 입을 여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글을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면 누가 알수 있겠습니까?



왕궁이 이 일로 수라장이 되고 귀인들이 태후전에 가서 이 사실을 전하자 아마 느부갓네살 왕의 부인으로 추정되는 태후가 연회장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누부갓네살 왕이 왕의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있어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들을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정장이들의 어른으로 삼았던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45년을 치리하였고 이제 그 나라가 멸망을 당하는 70년이라할 때 불과 그 때로부터 25년이 지난 때이므로 그의 손자인 벨사살이 이 일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관계되는 일들은 하나님께서 알게 하지 않으면 숨기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태후의 권고를 받아 정신을 가다듬은 벨사살은 드디어 다니엘을 수배하여 궁중으로 불러 들입니다. 8장 2절에 다니엘이 자신이 엘람성 수산성이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느부갓네살 왕 서거 후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정적들에게 밀려나 변방에 유배되었을 것입니다. 벨사살 왕은 다니엘에게 이글을 읽고 해석을 하면 나라의 세째 치리자로 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고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히리이다"(17절) 말하였습니다. 참으로 용기있는 답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왕의 물음이 이같은 답변은 목이 열이라도 감당 못할 일입니다. 아미 이때 다니엘의 나이는 90이 가까웠을 것이니다. 나이가 들면 이처럼 담대해지고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이지요. 자신의 생명의 주인을 알기 때문에 다니엘은 더이상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연설은 정말 왕 앞에서 거침이 없었습니다. 그는 지난날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익히 알고 기억하고 있는 신바벨론 제국의 창설자이며 최고의 통치자였던 느부갓네살 왕 때의 일들을 펼쳐 놓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다니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근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다"(18절)고 말하였습니다. 그 결과 느부갓네살 왕이 나라들과 방언(민족)들을 다시르며 생사 화복의 주권자로 있었음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의 교만함 마음이 높아지고 강팍해져서 하나님 앞에 교만히 행할 때 그의 왕위가 폐하여저 인생 중에 쫓겨나서 들짐승과 같은 마음으로 들에서 7년을 살게하셨음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며 자기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하였다고 술회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이 지나간 과거의 일을 다시 술회한 것은 지나간 일들을 상기하기 위해서가 아니였습니다.



다니엘은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나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스스로 옾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또 왕이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것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홉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22-24절) 말하였습니다.



이어서 다니엘은 그 글자를 읽어 "메데 메데 데겔 우라르신"이라 말하고 "메데는 하나님이 이미 왕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페르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25-28)고 해석하였습니다. 벨사살은 다니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드리우고 나라의 세째 치리자로 세웠지만 벨사살은 결국 그날 밤 메대 장군 다리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우리는 이 때로부터의 이스라엘의 역사들을 역대기와 에스라 느헤미야에서 자세히 보게 됩니다. 바벨론 왕국의 몰락과 함께 역사 속에 사라진 이스라엘의 치욕과 굴욕의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글을 읽으며 새대가리 같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일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벨사살과 동일한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사살은 느부갓네살 왕의 손자로서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입니다. 인간의 수명을 한세기로 놓지 않아도 3대의 이야기는 같은 세대 선상에 놓여 있기 마련입니다. 느부갓네살의 45년 간의 치세 속에 영광을 함게 누려 온 벨사살로서는 자신의 조부 느부갓네살 왕의 일을 모른다고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성경에 기록된 일들이 자신과는 관계없는 지나간 이스라엘 또는 사도시대에 속한 일들이아 생각을 하며 오직 그러한 내용들은 우리의 믿음을 위한 어드바이스로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는 우리와 같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영존하신 분으로서 이 내용들은 바로 그의 은혜 가운데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않됩니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무화과 나무의 비밀을 배우라 하시며 이 세대가 가기전에 내가 오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주께서 말씀하신 이스라엘의 세대와 함께 살고 있음을 자각하여야 하고 이제 주께서 오실 때 이미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기록하신 모든 일들이 우리 앞에 사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는 그의 서신 서두에서 "우리 안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성경은 사실주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않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실존주의로 돌아가려하고 경험주의로 돌아가려 합니다. 사실주의란 글자 그대로 사실 그대로를 그대로 보고 믿는 것이며 실존주의란 나와의 이해 관계를 놓고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존주의는 결국 경험을 요구하고 그로인하여 인간은 매일 내일 내일하다가 내일을 만나지 못하고 죽음으로 들어 가는 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객관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객관성이란 모두에게 다 공감을 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누가 "예수를 믿으세요 그러면 구원을 받습니다"말하면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나는 믿을 수 없다. 그것을 내 눈 앞에서 증명해봐라 그러면 내가 믿어 주마"라고 말합니다. 이와같이 복음은 처음부터 객관정을 가진 것이 아니고 구원 받을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잘못된 교파에서 말하는 것처럼 구원의 확신은 증명할 길이 없는 것이고 지금 내가 그를 믿고 있다는 그 사실이 기적인 것을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물건을 구입하고자 할 때 sample을 요구합니다. 음식을 먹을 때도 맛을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인간은 경험을 요구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믿어야(Trust) 하는데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 세상은 거짓에 쌓여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실존주의가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속성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sample들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실 멸망한 이스라엘은 우리의 sample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거울'(고전10:11)이라는 말로 표현하였고 또 "우리는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 하였습니다. 좀 멋진 말로 표현한 것이지요. 영원한 생명문 계시록 앞에 세워둔 유다서 푯말에는 구원의 지식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멸망받은 자들의 sample의 기준을 몽땅 비치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로 하여 또 다시 다른 사람들을 위한 'sample' 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우리 앞에는 너무 많은 'sample' 들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model"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주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내가 너희의 주인과 스승으로 본(Model)을 보였다" 하셨습니다. 또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은 것(고전11:1)처럼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고전4:16) 말하며 내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다(고전4:6)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히브리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 받으라"(히13:7)말하였습니다. 이제 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신구약 66권 속에 비치해 둔 'sample' 들이 모자라서 당신도 그들과 같이 'sample' 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하십시요. 어차피 멸망받을 사람들의 지옥은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의 본의 본을 받은 자'(살전2:13)로서 이제 "주를 믿어 영생 얻을 자들에게 본"(딤전1:16) 이 될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사과 한개를 사는데 사과 한 광주리를 다 맛보아야만 속이 후련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