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예언서 강해

(단4:22) 경험이 필요한 당신

이요나 2003. 7. 20. 21:20

(단4:23)경험이 필요한 당신(3)



(단4:23)"왕이 보신 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고 멸하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남겨두고 철과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 청초 가운데 잇게 하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으로 더불어 그 분량을 같이 하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느부갓네살 왕의 꿈은 제2편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루밤에 여러편의 꿈을 꿀수 있다는 것은 신기하기도 합니다. 그는 꿈속에서 거룩한 천사를 만났습니다. 다니엘은 "왕이 보신 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고 멸하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남겨두고 철과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 청초 가운데 잇게 하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으로 더불어 그 분량을 같이 하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순찰자'란 '깨어 있는 자' 즉 '보초'를 말합니다. 순찰자나 보초는 이 땅에 있는 존재로서 늘 깨어서 지키고 감시하는 일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하였은즉 그는 분명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천사를 지칭함이 틀림 없습니다. 여기서 천사나 하나님의 사자로 말하지 않고 '순찰자' , '거룩한 자'라고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또다른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마태복음 13장에서 이 땅에 알곡과 가라지를 거둘 '추수군'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칭하셨고 '천사'라고도 하셨음을 음미할 필요가 있습니다(마13:38-41).



결국 나무는 순찰자 거룩한 자에 의하여 베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합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 뿌리와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두고 철과 놋줄로 동이라고 명하셨습니다. 뿌리가 남아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며 그루터기를 남겨두라는 것은 그 흔적을 보이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오히려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며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6:13)기록하였습니다. 흥미로운 대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좀 흥미롭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철과 놋줄'입니다. 그리고 '일곱 때'라는 시간적인 기술을 보게 됩니다. 물론 일곱 때란 문자적으로 7년을 의미합니다만 일곱의 숫자와 관련할 때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으로도 풀이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의 날인 70 주간의 마지막도 7년이라고 생각할 때 하나님의 섭리는 그 역사하심에 질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2장에서 느부갓네살 왕이 먼저 본 신상 속에서 놋으로된 넙적다리와 철로된 종아리를 보았습니다. 그 신상은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장차 일어날 세상의 나라들을 말한 것으로 이것은 세계사를 꾸며갈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철과 놋줄'을 그 시대와 관련하여 생각하는 것은 나의 지나친 과우일까요?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그냥 이 정도에서 접어 두십시다.



결국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꿈을 꾼대로 짐승처럼 7년이라는 세월을 지내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느부갓네살이 다니엘로부터 해몽을 받은 후 겨우 열두달이 지난 후 교만에 빠져 이 일을 자초하고 맙니다. 성경은 "열두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궁 지붕을 거닐새 나 왕이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이 말이 오히려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가로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하였습니다.



사람의 인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정말 새대가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엄청난 꿈의 계시를 일년도 넘지 못하다니 참으로 인간됨이 허망할 따름입니다. 우리를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삶 속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문제를 통과할 때마다 또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누우칠 때마다 우리의 은혜는 어떠했으며 우리의 믿음의 각오는 또 어떠했습니까 그러나 불과 몇달이 되지 못하여 또 똑같은 일들을 저질르고 머리를 쥐어 뜯지 않습니까? 이처럼 인간의 성정은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말이요 노새이며 타오르는 불길과도 같습니다.



이미 다니엘은 그에게 그 후속 조치를 말한 바 있었습니다.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이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리다" 이미 다니엘은 왕의 모사로서 많은 일에 관하여 충언을 하였었습니다. 아마 죄를 속하라는 말과 공의를 행하라는 말로 미루어 보아 그는 왕의 잘못된 행실에 대하여 충언을 많이 했을 것 같습니다. 공의와 반대되는 말은 불의가 되겠지요.



또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라는 말로 우리는 왕이 누구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고관들은 고관대작들과의 관계를 갖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것은 같나 봅니다. 요즘 정치권의 행실들을 보면 우리나라에 무슨 돈들이 그리 많은가 모르겠습니다. 정치판에는 억이 뉘집 강아지 이름같이 나돌아 다니고 있습니다만 그 돈은 모두 가난한 백성의 억수로 쏟아낸 눈물과 피와 땀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가볍게 한입에 넣고도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릴 줄 알았다면 그는 이제라도 다니엘을 공부하여야 할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7년의 환란 뒤에 다시 영화롭게 하실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어떤 상황에 있던지 간에 소망을 버리지 말고 '하늘을 우리러'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친히 만난 후에야 "하늘의 왕을 찬양하고 칭송하며 존경하노니"라고 술회하였습니다. 여기서 '칭송과 존경'이란 말은 인격적인 대상에게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는 더이상 다른 사람의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섭리하시는 주인을 만난 것입니다.



이 글은 미치 지나간 나의 인생의 모노스토리를 보는 듯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내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더욱 교만한 생활에 빠져 있을 때 주께서는 나를 일본 땅에 유배시켜 7년의 세월을 짐승처럼 살게 하셨습니다. 나는 일본에서 산지옥을 경험하였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미리하신 말씀을 귀전으로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는 하늘에 왕이시며 우리의 삶을 친히 주관하시는 영생하시는 분이십니다.



누가복음 13장에는 포도원에 심기운 무화과 나무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수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 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눅13:6) 하셨습니다. '포도원에 심은 무화과나무' 흥미롭지 않습니까? 나도 우리 교회 안에 몇 그루의 무화과나무를 심고 물을 주고 있습니다. 화요 성경공부 모임이 본격적이되면 무화과나무는 모두 열매맺는 포도나무가 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