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예언서 강해

(요나서1:17)요나가 죽어야 산다

이요나 2004. 1. 16. 12:38

(욘1:17)요나가 죽어야 산다                     이요나(calvary)

(욘1:17)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이제 요나서를 공부할 차례입니다. 오래전부터 요나가 요나서를 설교하는 날이 오겠구나 생각하며 혼자 킥킥대어본 일이 있습니다. 제가 요나라는 이름을 받은 지가 벌써 12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특별하게 요나라는 이름을 갖고 싶었던 것은 아니였는데 동경에서 신학원 졸업논문을 준비하면서 잡자기 요나 선지자가 나와 같은 느낌이 들면서 '요나'의 어원이 '비들기'라는 것을 알고 더욱 요나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1992년 오월 나는 내 생전 처음으로 21일간 장기금식을 한 일이 있습니다. 나는 그때서야 금식이란 스스로의 의지에서 시작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그 금식을 기뻐받으실 때 성령이 도우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의 나의 금식은 나의 아무런 조건이 없이 내 몸을 주께 완전히 드려야 한다는 마음에서 결단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밤낮 성경 말씀을 보며 기도와 묵상으로 지내게 되었는데 금식 7일째 되는 날 작은 정원이 내다 보이는 응접실 쇼파에 걸처 앉아 묵상에 빠졌습니다. 초여름 볕이 따뜻하게 곁들어지는 오후였습니다. 시간이 얼마를 흘렀을까 고요한 가운데 다가오는 하얀 비들기 한마리가 있었습니다. 나는 비들기의 날개가 그렇게 큰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분명 하얀 햇살을 사이로 하얀 비들기 한마리가 나를 향하여 날라와 마치 바람이 나를 싸매어 감듯이 날개바람을 일으키며 내게 날라왔는데 나는 순간 눈을 떳고 환상 중의 비들기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비들기의 날개소리와 눈과 고요한 자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치 내몸속으로 숨어 들어 온 것만 같은 느낌이였습니다. 그해 가을 나는 동경 호라이즌 채플로 교회를 옮겼고 히라노 목사님은 내게 요나(曜奈)라는 이름을 더해 주셨습니다.

많은 학자들 중에서도 요나서를 마치 이스라엘의 설화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참으로 그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자들이라 할 때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요나서를 과학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현실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낳는 것과 같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떻게 피조물이 창조자를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세계는 믿음 안에 설정된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를 따라 나타나는 성령의 능력으로만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시고 일월성신과 바람과 바다와 땅 속 음부의 일까지 그의 말씀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을 인간의 지혜나 과학으로 증명해 보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는 말씀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마리아의 탄생도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요나서가 사실인 것은 우리의 주 예수께서 증명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이 세대가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리하리라"(눅12:29-30) 하셨으며

 

다시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하셨습니다.

만약 요나의 사역이 실제적 상황이 아니고 비유나 설화였다면 주께서 자신의 사역을 요나의 사역으로 비교하여 언급하실리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의 일을 꾸민 이야기로 증거하려 하겠습니까? 사람의 일은 사람의 일로 짐승의 일은 짐승의 일로 꾸민 이야기는 꾸민 이야기로 증거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요나는 1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기록하였습니다. 요나 선지자의 이름이 성경에 처음기록된 것은 열왕기하 14장 25절입니다. 그때는 여러보암 2세의 체세로서 북이스라엘 왕국의 전성기라고 할만한 때였습니다.

 

열왕기서 기자는 요나를 가드헤벨 출신 아밋대의 아들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가드헤벨은 '행복한 포도주 틀'이란 의미로서 스불론 경내의 성읍으로서(수19:13) 갈릴리 나사렛 북동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성경에서 요나에 대한 자료는 더이상 찾아 볼 수 없지만 요나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의 선지자로서 아모스와 호세아가 활동하기 바로 전에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당시 앗수르는 살만에셀 4세가 통치하고 있었고 북왕국의 여로보암2세는 다윗의 영토회복 정책을 펴 어느정도 성과를 얻었던 때였습니다.

 

그런 정세 속에서 살만에셀 4세는 북이스라엘에 칼을 갈고 있었고 결국 요나 선지자의 니느웨 활동 50년 후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BC.722).

우리는 열왕기하 14장25절에서 아밋대의 아들 요나 선지자의 활동과 함께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도말하여 천하에 없이 하겠다고 아니하셨으므로.." (열하25:27)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보게 됩니다.

 

또 다니엘서 11장 1절에는 "내가 또 메대 사람 원년에 일어나 그를 돕고 강하게 한 일이 있었느니라"기록되었으며, 바로 얼마전에 아모스 선지자의 중보로 앗수르로 하여 이스라엘을 아주 멸망 시킬 계획을 변경하신 사실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신의 종들을 이방 국가에 보내어 그들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공의를 나타내어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공부할 요나서에 기록된 일들은 후일 앗수르에 의해 포로가 될 것을 이미 알고 계셨던 하나님은 요나 선지자를 통하여 앗수르에 복음적 관계를 구성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하셨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로서 함의 자손 니므롯이 세운 큰 성으로 티그리스 강 상유에 있습니다(창10:11).

 

여기서 하나님의 명령은 니느웨로 가서 큰 성의 멸망을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 다시스로 가려고 욥바로 내려 갔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의 귀에는 매일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을 것입니다. 혹시 결혼 적령기들은 아침저녁 밥상머리에서 부모님의 성화를 들으시겠지요?

 

나도 어머니의 잔소리가 싫어서 집을 나갔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매일매일 요나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얼굴을 생각해 보십시요. 지금 요나의 입장을 조금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요.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정말 만화같은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나는 일단 하나님의 땅을 벗어나면 하나님의 음성이 안들릴 줄 알았는가 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가 하기싫은 일은 죽어도 하지 못하는 요나는 하나님의 성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개나리 봇짐을 꾸리고 맙니다. 우리가 요나서 4장에 기록된 요나의 푸념을 볼 때 요나는 하나님의 계획을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나는 하나님 앞에 머리를 바싹 처들고 '내가 이럴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인 줄 내가 알았습니다요'(4:2)라고 푸념하였습니다. 사실 요나는 이스라엘의 적 앗수르에 내릴 하나님의 재앙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며 못살게 구는 일본제국이나 청나라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시킬 것을 알고 있는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미리 전달하여 그들로 회개하여 구원을 얻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콧웃음을 날리며 달려 가겠습니까? 나라도 절대 안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화가 얼마나 크셨으면 요나가 도망을 결심하였겠습니까?

오늘 요나가 가려고 했던 다시스는 오늘날 스페인 지역이라고 추정합니다. 또 어떤 학자는 '다시스'가 '주석'이란 의미로 하여 영국이라고도 추정합니다. (영국을 브리테니아라고 하였습니다).

 

다시스의 성경적 기원은 야벳의 아들인 야완의 아들 달시스가 세운 도시(창10:4)로서 종말론적 입장에서 다시스는 '다시스의 딸'(사23:10), '다시스의 배'(시48:7, 사66:19)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요나는 욥배로 내려가 다시스행 배를 탓습니다. 욥바는 800년 후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으로 인도되기전 시몬의 피장의 집 지붕에서 기도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때나 그때나 욥바는 복음이 이방으로 연결되는 통로였습니다. 요나가 욥바행 배를 타자 여호와께서 태풍을 내리셔서 배는 바다 가운데서 깨어질 상황에 처했습니다.

배를 타 본일이 없는 분들은 태풍의 두려움을 알 수 없겠습니다만, 옛날 고등학교 때 바람이 들어 어머니의 잔소리를 떠나 제주도에 사는 친구집으로 가기 위해 목포에서 목선을 타고 제주도에 간일이 있었습니다. 그날 저는 몇십년 전에 먹은 어머니의 젖까지 토하며 선실 바닥을 딩굴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후 저는 배는 안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태풍이 얼마나 심했던지 뱃 일로 잔뼈가 굵은 사공들도 두려워서 자기의 신들을 부르며 배를 가볍게 하려고 선실 밑으로 내려가 하물들을 바다에 던지던 중 팔자 좋게 선창 밑에서 코를 골고 있는 요나를 발견하였습니다.

 

요나라고 태풍의 진동을 느끼지 못할리 있었겠습니까마는 그 상황에서도 요나는 선창 밑에서 깊은 잠에 빠진 것으로보아 요나가 집을 따나 오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성화로 잠을 자지 못했던 것이라 짐작됩니다

화가 치밀은 선장이 요나을 깨우며 도대체 너는 누구길래 이 상황에 태평하게 잠을 퍼질러 자고 있느냐 하며 '속히 일어나 네 하나님께 기도하여 우리로 함께 망하지 않게 하라'고 야단쳤습니다.

 

그의 눈에도 요나는 이스라엘 사람처럼 보였는가 봅니다. 이제 그들은 길일을 택하여 행선하였는데 갑자기 진노한 하나님의 원인을 알기 위해 제비를 뽑게 되었는데 기이하게도 요나가 뽑히고 말았습니다.

요즘이야 제비뽑기는 복권을 뽑는 일에나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제비뽑기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낸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면으로 볼 때 긴박한 상황에서 그 방법은 가장 합리적인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비뽑기는 모든 사람이 태풍이 하나님의 진노라고 믿을 때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옛날 사람들은 일월성신의 조짐과 천기는 모두 하나님의 일로 생각했습니다.

요즘이 태풍이 불어 한 지역을 모두 무너뜨리고, 지진이 일어나고, 산불이 나서 모든 산을 다 태워도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천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오히려 신적 존재를 감지하는 영적 안테나가 살아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들은 요나에게 '무슨 연고로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하면서 요나의 직업과 출신을 물었습니다. 이제 더이상 숨길 수 없는 요나는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밝혔습니다.

요나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천재지변을 당한 사람들에게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메시지 이상 더 기쁜 소식은 없을 것입니다. 더우기 그들은 히브리인이란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임을 아는 고로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물었습니다.

요나는 그들에게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12절)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뱃사람들은 차마 사람을 바다에 던질 수 없어 힘써 배를 저어 육지로 나가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선한 사람들이 틀림없습니다.

요즘 전라도 부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핵연료 처리장 설치 문제로 일어나고 있는 주민들의 데모를 볼 때 이것은 시위집회가 아니라 폭동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루를 멀다하고 연일 벌어지는 시위때문에 이 나라는 온통 전쟁터로 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위정자들의 지혜가 필요한 때이며 모두 자숙하여야 할 때입니다.

그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기전 "여호와께 구하고 구하나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 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14절) 기도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요나의 메시지의 위력을 볼 수 있습니다. 뱃 사람들이 모두 한 마음이 되어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여호와'란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믿음의 관계가 성립되어야만 부를 수 있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나님께기도를 하였습니다. 이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복음의 메시지는 그 이름만 불러도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자 바다는 잠잠하였습니다. 일단 그들의 기도는 상달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심청전을 보는 것 같습니다만 이제 요나는 여호와께서 예비하신 큰 물고기에게 삼키게 됩니다.

 

그리고 삼일낮밤을 물고기 배속에서 있게 됩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요나의 삼일주야에 비교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2장으로 넘어 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