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누가복음강해

(누가복음18장)믿음생활의 여섯가지 오해

이요나 2006. 4. 7. 13:55

(누가복음18장)믿음생활의 여섯가지 오해

 

주님은 17장에서 실족함에 대한 엄중한 책임이 따를 것을 말씀하시며 제자들의 믿음의 완전성을 요구하셨습니다.  만약 주의 보내심을 받은 사도들이 잘못된 지식을 유포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서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은 곧 임박할 그리스도의 날에 대한 경계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의 반열에 들어 그리스도의 평안을 누리다가 실족하여 잘못된 지식에 휘말려 주의 날에 데려감을 당하지 못하고 버려둠을 당하였다면 우리의 믿음에 무슨 자랑이 있겠습니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믿음은 그 본질에서 퇴색되어 세속화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 위치에서 열심히 믿음생활을 하고 있지만 자신의 믿음을 자기 입장에서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18장에서 우리의 믿음생활과 관련된 우리의 잘못된 생각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I. 믿음의 대상에 대한 잘못된 생각(1-8)

 (눅17: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주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날이 갈수록 성도의 기도가 삶 속에서 무의미해 갈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시며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하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에 비유하셨습니다. 원래 비유란 전달하고자 하는 대상에게만 그 뜻을 전달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쏙닥어에 해당합니다. 오늘 주님은 반어적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여 공의로우신 하나님과 그의 성도들의 관계를 불의한 재판관과 의지할 것 없는 과부와 대칭하여 그 의미를 관찰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주님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처럼 자기의 유익을 따라 판단하는 분이 아니시며 우리 또한 의지할 곳 없는 과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판단하시며 우리 또한 그의 의로운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기도는 귀찮아서 마지 못해 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제자들의 원한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의로운 복음생활에 대한 세상의 핍박인 것입니다. 세상이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비방하고 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말씀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주의 날이 가까워질수록 성도들의 믿음의 실체가 변질되어 의롭지 못한 것을 옳다 생각하고 진리가 아닌 것을 따르는 기이한 현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교회가 어느 교회입니까? 우리나라의 대형 교회들의 위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이미 주님은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나 이슬람 국가에 가면 밤낮 그 원한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부르심을 받은 의로운 제자로서 그리스도의 진리의 복음에 바로 서 있고 주의 날이 임하기를 기도하고 있다면 낙망하지 마십시오. 주께서 곧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진리의 입김으로 멸하시고 곧 나타나심으로 폐하실 것입니다.  

 

II. 자신의 믿음에 대한 잘못된 생각(9-14)

(눅18: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두 번째 문단은 자신의 믿음에 과신하고 있는 상황이 올 것을 비유로 설명 하셨습니다. 주님의 자기를 의롭다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한 비유로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두 사람을 비유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 속에서도 비유의 본질이 감추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기도하는 두 사람의 기도의 방법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람들의 마음가짐의 상태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과 세리가 함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 가서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였습니다.

 

이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습니다. 주님은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하셨습니다.

 

날이 갈수록 세상은 양극화 되어 가고 있는 가운데 교회도 양극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마치 바리새인들과 세리가 나누어 기도하는 것처럼 대형교회는 날이 갈수록 자신들의 행위의 의로움과 믿음의 증거를 자랑하는 데 비하여 개척교회는 마치 죄인처럼 가슴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낮이 열 두 시간이니 곧 밤이 올 것입니다.

 

III. 믿음생활에 대한 잘못된 생각(15-17)

(눅18: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세 번째 문단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그를 꾸짖으시며 어린아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섬김에 대한 오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어른이 되어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러한 경향으로 모든 교회 교육 프로그램은 성인 중심으로 되어 있고 어린 아이들은 행사 위주 또는 어른들의 예배를 위한 격리적 차원에서 다루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진실로 말하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순수성을 의미한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의 믿음은 어른들과 같이 이해타산적이지도 않고 배타적이지도 않습니다. 어린아이에게는 바리새인이나 세리나 구분이 있을 수 없으며 아이들은 가르침을 받는 그대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 주께서 말씀하신 비유는 어린 아기들의 유아세례를 언급한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아세례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유아세례는 중세 콘스탄틴 대제 이후 귀족의 자녀들을 축복하기 위해 발생한 프로그램입니다.

 

세례(침례)란 죄사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사함을 받은 믿음의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성령세례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침례)는 성령에 관한 이성적 판단력이 있을 때 받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사역에 임하실 때 침례에 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유아침례는 세례에 대한 잘못 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여기서 주께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순수성을 의미한 것입니다.

 

IV. 믿음의 행위에 대한 오해(18-30)

(눅18:27)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네 번째 단락은 우리가 다 잘아는 부자 청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누가는 그 청년의 신분이 관원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관원이란 유대교의 지도자를 의미합니다. 그가 예수께 나아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물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반문하여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말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 하시며 계속하여 네가 계명을 아니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십계명 중 사람과의 관계성 계명입니다.

 

이에 그는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답하였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유대교의 덕망 있는 지도자인 그가 아직 성경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를 가리켜 선한 선생님이라 하면서도 주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만약 성경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을 상고하였다면 다윗이 말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나니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시14:1,2) 한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았을 것입니다.

 

 그가 비록 사람과의 관계성 속에서 칭송을 받을 수 있었지만 하나님에 대하여는 무지하였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재물로 맺을 수 있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재물로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날이 갈수록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부자들이 교회에서 큰 세력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교회에서의 지위가 의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그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히5:12)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네가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누어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율법 안에서 선을 행하면서도 갈급하는 영혼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큰 부자이므로 심히 근심하며 돌아 갔습니다.

 

이 말씀은 목사들이 즐겨 설교제목으로 삼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많은 이단들은 이 말씀을 들어 성도의 마음을 협박하여 재산을 팔아 재단에 들이도록 종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지금 주님은 부자 청년이 갈망하고 있는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여기서 그가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부분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는 율법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은 장차 복음의 시대에 나타날 현상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른 곳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여 사람들은 그 하는 일에 복을 받아 잘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활과 마음이 재물에 사로잡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을 갖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왕의 신하가 주를 믿게 된 것은 그의 아들이 죽어 갈 때입니다. 또한 회당장 야이로도 그의 무남독녀 외 딸이 죽어갈 때에야 주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와 같이 유복한 생활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생각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현재의 풍족한 생활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근심하며 돌아 가는 유대교 관원을 바라보며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재물이 있는 자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재물의 속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세상은 물질주의가 팽대해져 사람들은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돈에 노예가 되고 맙니다.

 

부자들은 모든 것을 돈으로 사고 돈으로 해결하려 하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재물은 그의 우상이 되고 맙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은 종교활동에 필요한 주체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재물은 우상숭배라 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의문에 주님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때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이 하신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이 말씀 속에는 영혼의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내포하신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정말 위대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어 유대교로부터 출교를 당하여 결국 집과 전토와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로 받고 내세에서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하셨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금세에 있어 배로 받는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과연 제자들은 후일 무엇을 배로 받은 것일까요? 그들은 주를 따르는 거룩한 무리의 사도로서 존경과 영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들이 비록 원수들에게 쫓기며 목숨까지 버려야 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평안을 누렸습니다.

 

V. 말씀에 대한 오해(31-34)

(눅18:34)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자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하신 후 계속하여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 나리라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여 후자에 하신 말씀은 구약의 시편과 이사야서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누가는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음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눈 앞에 닥쳐 왔는데도 제자들은 그 일을 알리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때를 따라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주께서 고난 받으신 후 제자들은 성령의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터득하였습니다. 이 또한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신적 비밀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오늘 하루의 일을 알지 못하고 근심과 걱정에 쌓여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과연 언제 들림을 받을 것인지 또 주께서 언제 오실 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날은 아들도 천사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날이 너희에게는 도적같이 임하지 못하리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숨긴 바 된 말씀이 빛의 자녀들에게 전달될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당신이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VI. 믿음의 목표에 대한 오해(35-43)

(눅18:41)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누가복음 18장 마지막 문단에는 거지 바디메오에 관한 내용이 기룩되어 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갈릴리를 출발하신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지나 유대에서 가장 낮은 지역 여리고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마지막 여행은 여리고를 지나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지역인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비된 고난을 받으시게 됩니다. 주님 앞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느려지고 있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자 소경이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누구냐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라 하니 소경은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쳤습니다. 그를 제치고 앞으로 나서는 사람들이 그를 꾸짖어 소리를 지르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쳤습니다. 이에 주께서 그를 데려 오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소경인 것을 아시는 주께서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대답하였습니다. 당연한 답변이었습니다. 소경이 보기를 원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이에 주께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여야 합니다. 주께서 그의 믿음을 언급하셨기 때문입니다. 과연 앞 못 보는 소경이 어떤 믿음을 가졌던 것일까요?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하여 오늘의 당신의 믿음의 현실과 대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소경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소리를 외쳤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자손이란 예수님의 역사적 족보를 말한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이 말한 바 다윗의 씨로 오시기로 언약된 메시야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큰 소리로 외친 것은 그가 이미 나사렛 예수께서 메시아인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1장의 나다나엘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날 수 없다고 믿고 있었고 유대교에 의해 사마리아 사람 귀신의 왕이라 정죄되었던 때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사렛 예수께서 오시기로 언약된 다윗의 자손 메시야인 것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한 그의 답변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얼굴을 보게 해달라는 의미 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주의 제자가 되기를 소망했던 것입니다. 누가는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았다 기록하였습니다. 그의 소망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소망하였던 것입니다.

 

누가는 그의 이름조차 기록하지 않았지만 이 소경은 디메오의 아들 바디메오입니다. 흥미롭게도 디메오란 명예란 뜻입니다만 그는 걸인이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주님은 저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그 사람이나 그 보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불구자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멸시 속에서도 바디메오는 최고의 명예를 얻기까지 그 소망을 접지 않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떠하십니까? 당신의 믿음의 목적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 요술쟁이와 같은 능력 있는 선지자가 되고 싶으신지요? 그렇다면 주님은 당신을 향하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 내가 너를 전혀 모른다 하실 것입니다(마7:22). 어쩌면 로또라도 당첨되게 해 주시기를 바랄지도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당신은 천국에 들어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혹시 위대한 당신은 야고보나 요한처럼 영광의 날에 주의 오른편과 왼편에 서게 해달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오늘 나는 주를 보기를 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