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9:11) 슬픈 동상이몽
(눅19:11)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우리는 18장 끝에서 소경 바디메오의 이야기를 살펴 보았습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걸인이었음에도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 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주께서 그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을 때 그는 보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부자도 되고 싶고 출세도 하고 싶겠습니다만 그는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람마다 모두 삶의 소망과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 간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목적에 어떤 대상이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가룟 유다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부귀 영화를 성취할 출세의 발판이 되기를 바랬습니다. 또한 야고보나 요한 그리고 다른 제자들도 그리스도의 왕국에서의 누릴 자신의 입지에 대해 커다란 욕망을 갖고 있었습니다(막10:36-41).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누가복음19장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우리에게 특별한 지혜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날을 준비하는 지혜의 첫걸음이기도 하며 또 온전한 믿음을 실현할 수 있는 성도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A. 예수님의 생각
주님은 앞에서 “제자들에게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 나리라”(눅18:31-33)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 주님은 이사야서 53장과 시편 22편의 말씀과 스가랴서 9장의 말씀은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들을 생각하며 선지자들이 자신에 대해 말한 그 모든 것이 이제 곧 자기에게 임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누가는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음으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18:31-34) 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마가복음 10장의 기록입니다. 문맥을 따라 볼 때 마가복음 10장과 누가복음 18장은 같은 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마가복음 10장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주의 영광 중에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제자들도 분개하였습니다. 제자들의 생각은 모두가 다 그 나물에 그 밥이란 뜻이지요.
어떻게 생각하면 아직은 때가 아니므로 하나님께서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도록 그 말씀들을 가리웠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또한 우리는 제자들이 메시아의 고난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24:44)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3년 동안 충분한 성경공부를 하였음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19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주와 함께 동고동락하며 3년 반 동안 주께 친히 천국의 비밀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어찌하여 주께서 말씀하신 메시아 고난에 대한 예고를 듣고도 깨닫지 못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마리아처럼 연약한 여인도 주의 죽으심을 위하여 향유를 준비했었는데 말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과 우리의 삶이 성경의 말씀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아는 것으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판 가룟 유다도 제자들 중에서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십자가에 달게 한 사람들은 서기관과 제사장과 율법학자 그리고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에 따라 성경적 삶의 방향이 열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B. 앞을 예측한 삭개오
오늘 19장 첫 단락의 내용은 세리장 삭개오의 이야기입니다. 삭개오는 유대인으로서 세금을 관장하는 로마의 관원이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세리들은 유대인들에게 죄인이라 정죄를 받았습니다. 세리들은 유대인 측에서 보면 매국노이지만 현실 정세를 따라 생각하면 개혁에 속한 진보세력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사 청산이란 미명 아래 친일파를 색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친일파들은 어떻게 보면 매국노의 입장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의 현대 국가 발전에 기여한 개혁 중추 세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가 떠오르는 태양을 손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19장 1절에는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기록되었습니다. 주님의 일행은 가장 낮은 곳 여리고 초입에서 소경 바디메오를 만난 후 높은 지역의 여리고에 들어 왔습니다. 여리고를 지나면 감람산이 있는 베다니를 통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여리고는 지역이 높고 풍치가 좋아 헤롯의 겨울 궁전과 분봉왕 아켈라오의 궁전이 있었습니다 . 부자 삭개오도 그 지역에 살았습니다.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을 들은 삭개오는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로 하여 키가 작은 삭개오는 예수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지나가실 길을 미리 예측하고 앞서 달려 나가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로서는 메시아이신 예수를 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앞을 내다 본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뽕나무 위에 느긋하게 앉아 그 앞으로 지나실 예수를 기다리는 삭개오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요. 그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이라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를 보고자 하는 소망이 그로 하여금 슬기로운 지혜를 갖게 한 것입니다.
그때 그 앞에 이르신 주께서 위를 보시며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급하게 내려와 기쁨으로 예수를 집으로 맞아 들였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예수께서 죄인의 집으로 들어간 것을 놓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C. 아브라함의 자손 삭개오
이 때 삭개오는 예수께 나아가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주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주께서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하신 말씀입니다. 그는 비록 율법의 정죄를 받아 죄인이 되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신 것은 혈통적인 것을 말씀하신 것 외에 또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가 주의 부르심을 받고 아브라함과 같이 자기가 해야 할 바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키고 영생을 소망하던 부자 관원이 예수께 나아와 ‘너는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고도 재물로 인하여 근심하며 돌아 간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부자에게 있어 재물은 그들의 생명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주를 집으로 영접한 삭개오는 자기가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주의 뜻을 알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를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법인 것입니다.
II. 무엇을 생각하는가?(11-27)
A. 황홀한 오렌지 꿈
오늘의 본문 19장 11절에는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제자들의 생각이 예수님과 달리 온통 다른 데 집중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비유하여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 오기까지 장사하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므나란 그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인 1데나리온의 100배에 해당되는 헬라 은화로서 1달란트의 60분의 1에 해당됩니다.
계속하여 주님은 “그런데 그 백성들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하셨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말씀은 그 당시에 있었던 시사적인 내용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헤롯의 아들 아켈레오가 분봉왕으로 있었는데 그는 자기의 아버지 헤롯과 같은 대왕의 지위를 갖고자 로마 원로원에 청을 넣었습니다.
1. 아켈라오의 욕망
그러나 이것을 안 사람들 뒤로 원로원에 사자를 보내어 아킬라오가 왕 됨을 싫어한다는 상소를 올려 결국 아킬라오는 자기의 욕망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후일 아킬라오를 반대한 사람들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왕이 돌아 왔을 때의 일들을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왕 됨을 싫어하던 사람들은 일이 잘 되던 잘 못되던 죽을 수 밖에 없는 앞의 현실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께서 이러한 시사성 있는 비유를 한 것은 제자들이 그 비유의 뜻을 잘 이해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좀더 사료 깊게 분석해 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2. 성도의 의무와 책임
우리는 이 비유가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달란트 비유와 서로 다른 메시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달란트는 므나 보다 엄청나게 큰 것으로 달란트 비유는 종들의 재능에 따라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긴 것이지만 여기서는 열명의 종에게 똑 같이 한 므나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열 므나의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소망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공평하신 의무와 책임입니다.
3. 공평하고 합리적인 상급
왕위를 받고 돌아 온 주인은 한 므나를 가지고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한 므나를 가지고 다섯 므나를 남긴 종에게는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그리고 주인의 권세만을 믿고 주인의 것을 그대로 갖고 나온 종은 책망을 당한 후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남긴 종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주인을 뜻을 따른 것이 아니고 자기의 생각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많이 남긴 종이나, 적게 남긴 종이나 모두 ‘잘 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다’ 라는 칭찬을 했습니다. 이것은 각 사람의 재능에 의한 능력의 수단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주인의 돌아 올 것을 믿고 성실히 자기 직무를 감당한 종들의 삶의 지혜를 시험한 것입니다.
B. 말씀을 대하는 성도의 지혜
이 때 주님은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가복음 4장의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하신 천국비밀에서도 언급된 말씀입니다. 주님은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등경 위에 두려함이라’ 는 말씀과 함께 “너희는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막4:24,25)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천국복음에 대한 지혜롭고 합리적인 헤아림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열명의 하인들 중 주인 앞에 나온 사람은 셋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곱은 모두 세상 사람들 속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왕이 절대로 돌아 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주인의 말보다 주인을 헤치려는 사람들의 말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주인에게 칭찬을 받은 두 하인들은 주인이 돌아 올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들은 삭개오와 같이 주인이 한 말씀과 또 주인이 가는 길 전후사를 살펴 본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하든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대하여 비유하신 메시지입니다. 누구든지 주를 만나고자 하는 열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성경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의 행로를 발견할 것입니다. 그가 비록 삭개오와 같이 사람들에게 정죄를 받았다 해도 그는 주의 가시는 길목을 헤아려 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또 백성들 속에서 큰 자가 되었다 하드라도 그의 생각이 높아지고 현실에 연연하고 있다면 그는 결국 주께서 오시기를 원치 않는 자입니다. 그에게 있어 예수는 자기의 권세와 부귀 영화를 쌓는 도구일 뿐입니다.
주님은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는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멸망을 계시록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오늘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내일을 사시겠습니까? 나는 나의 제자들과 함께 계시록을 바라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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