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누가복음강해

(누가복음19:40) 돌들의 함성

이요나 2006. 4. 21. 17:25
(누가복음19:40) 돌들의 함성

(눅19:40)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우리는 앞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생각이 서로 다른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삼 년 반의 사역을 마치고 이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를 향하여 올라가고 계시는데 그의 사도로 부름받아 장차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끌어 갈 사도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알고 누가 주의 오른편과 왼편에 설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동상이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앞을 예비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의 미래지향적 자세를 삭개오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는 비록 세상에서 죄인으로 정죄를 받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위하여 그의 가는 길을 예측하여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주께서는 그에게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게 된 삭개오는 주께 나아가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으며 토색한 것이 있으면 사배를 갚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삭개오의 이러한 의지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우리는 주께 나온 부자 청년이 영생을 원하면서도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에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며 돌아간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삭개오의 이러한 결단은 미래 지향적인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주님은 삭개오를 가리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하시며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명분상의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요 오직 주의 뜻대로 자기 의지를 바꾸어 실천하는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인의 삶을 상실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며 어떻게 하여야 자기 욕망에 불타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생각과 뜻을 가질 수 있는 것인지 그 해답을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I. 당연한 논리
주님은 앞에서 은 열 므나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날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와 전혀 다른 맥락의 말씀입니다.

탈란트 비유는 천국복음을 맡은 종들의 각자의 재능에 따라 맡기신 사역적 기능을 말씀하신 것이었고 열 므나의 비유는 복음을 맡은 모든 제자들에게 공평하게 주신 사역적 의무와 책임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금 달란트 비유는 직분적인 의무와 책임에 관한 것이라면 은 열 므나의 비유는 복음의 제자 된 근본적인 책임과 의무를 말씀하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여러 가지 은사들을 나열하였습니다. 이 은사들은 교회 구성 지체들에게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주신 기능적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각 직분자들을 세우신 목적을 언급하였는데 주께서 사도와 선지자와 전도자와 목사와 교사를 세우신 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지체들의 믿음과 지식이 모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이라 기록하였습니다(엡4:12-4). 이것이 오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은 열 므나의 비유라고 하겠습니다.

II. 예루살렘 입성
주님은 예루살렘 길목의 감람원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이르자 제자들에게 특별한 명령을 하셨다. 감람원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피하여 도망하던 곳으로 스가랴는 주의 날에 메시야가 이곳에 임하실 것을 예언하고 있어 유대인들에게 신성시 되고 있는 지역(슥14, 겔11:23)으로 주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마지막 기도를 하신 겟세마네 동산이 이곳에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 둘을 마을로 보내시며 ‘그리로 들어 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하시며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말씀하신 곳에 가니 말씀하신 대로 나귀새끼가 매여 있어 풀려고 하니 주인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물었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주께서 이르신 대로 주께서 쓰시겠다 하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과 또 사람이 알 수 없는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당연한 것 아니냐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지금 이 내용은 앞 문단의 말씀과 어울려 우리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나귀새끼를 끌고 와 겉옷 나귀새끼 등에 펼치고 예수님을 태우니 진풍경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겉옷과 나무 가지를 길에 펴며 앞서고 뒤서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며 시편118편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풍경은 흥미롭게도 스가랴서 9장9절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 오시기 500 여년 전에 살던 스가랴 선지자는 “시온의 딸에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언하였습니다. 지금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현실 속에서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III. 성경예언의 성취
더욱 우리를 놀랍게 하는 것은 바로 이날은 A.D.32년 4월6일로서 다니엘 선지자가 말한 바 메시야에 관한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9장 1절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로 말씀하신 이스라엘의 칠십 년에 대하여 깨달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천사는 다니엘에게 이스라엘의 칠십 년에 관한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대하여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외곽 참호)가 이룰 것이며 육십이 이에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 됨 같을 것으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단9:25-26).

여기서 한 이레는 7년을 의미하며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는 합하여 69이레로서 483년이 되고 이것을 바벨론역으로 환산하면 173.880일이 됩니다. 또한 다니엘에 말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라는 명령은 느혜미야 2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바사 왕 아닥사스 이십년 니산월에 왕의 술관원이었던 느혜미야에게 내려졌는데 이 날은 B.C.445년 3월14일입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173.880일 되는 날은 A.D.32년 4월6일로서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마치 일정표를 미리 짜 놓고 그대로 실행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러한 일은 동일 민족 국가의 어느 왕이 원대한 꿈을 가지고 실현 시키려 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내용이 모두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매우 중요하며 이것은 역사이기 전에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한 섭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다니엘에서 이스라엘을 칠십이레로 기한을 정하셨다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이러한 성경의 예언을 기억하여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찬송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사람들이 그 예언을 성취한 것이라면 나귀새끼를 데리고 오는 일부터 그 사람의 말에 의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마 사람들은 그러한 예언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실 때 누구와 의논하지 않으며 누구에게 의뢰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큰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스스로 예정하시고 스스로 성취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실 때 그의 종들에게 알리지 않고 하시지 않는다 기록하였습니다.

이때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그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합니다. 이에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제자들로 하여 이 예언을 성취되지 않았으면 하나님께서는 돌들이 소리를 지르게 해서라도 미리 하신 말씀을 성취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24:44) 하셨습니다. 또 계시록은 ‘예수의 영은 대언의 영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증거는 성령이 주체가 되어 이루어 진다는 말씀입니다.

자 이제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앞 문단에서 살펴 본 삭개오의 이야기와 은 열 므나의 비유가 오늘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것인가를 부디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삭개오는 주의 가는 길을 보고 앞서 나가 기다렸습니다.

천사는 다니엘에게 마지막 때에 관한 일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할 때까지 봉함하라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주의 오실 길목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의 말씀을 곧 기쁜 소식을 맡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께서 왕으로 다시 오는 것을 싫어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도 그들의 말에 미혹되어 그리스도께서 맡기고 가신 기쁜 소식을 땅에 묻어두고 희희락락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곧 돌아 오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당신의 작은 키로 군중의 틈에서 무엇을 보려 애쓰지 말고 성경에 미리 하신 말씀을 따라 나가 뽕나무 위로 올라 가십시요. 주께서 당신의 집으로 들어 오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