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누가복음강해

(누가17장)목사와 스캔달

이요나 2006. 3. 30. 14:40

(누가17장)목사와 스캔달

(눅17:5) 사도들이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오늘 이야기는 14장에서부터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 하루 동안에 있었던 일로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혼인잔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 떡을 드시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곳에 고창병(간경화증) 든 사람이 예수 앞에 나왔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물으시며 너희 중에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이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며 그를 고쳐 주었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청함을 받은 사람이 서로 상석에 앉으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네 자리를 내어 주고 말석에 앉게 되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서로 안목 있는 사람들을 초청하시는 것을 보시고 네가 잔치를 배설하려거든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셨습니다.

 

계속하여 주님은 그리스도의 혼인잔치와 관련하여 세상의 풍속도를             비유로 설명하시며 먼저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제자들에게 부모 처자 형제와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할 것을 말씀하신 후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을 경계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들어 제자들의 재물관을 엄히 경계하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말씀은 그 당시 종교적 지도층에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말씀이지만 주님의 의도는 장차 하나님 나라를 이끌어갈 사도들을 경계하신 말씀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이 말씀들을 읽을 때 과연 나는 바리새인 속에 있는가 아니면 혼인잔치에 참여한 제자의 반열에 있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누가복음 17장은 크게 넷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복음사역과 관련된 말씀으로 복음의 제자들이 무엇을 하여야 하며, 또 무엇을 경계하며, 무엇을 예비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첫 째 단락에서 실족케 하는 자에 임할 화가 기록된 반면 마지막 단락에 종말에 대한 경계가 기록된 것입니다.

 

I. 제자의 온전성(1-4)

 A. 스캔달

17장 서두에는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이르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실족이란 단어는 새나 짐승들 앞에 미끼를 놓아 덫에 걸리게 한 것입니다. 새나 짐승들은 그 미끼에 현혹되어 달려 들다가 결국 덫에 걸려 목숨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런데 실족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가 영어의 스캔달인 것입니다.

 

스켄달은 고대로부터 정쟁을 죽이기 위한 마녀사냥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고대 어느 왕국에서 정적을 죽이기 위한 스캔달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중국에서 천안문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하나 둘 복권되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판을 보면 스캔달 투성입니다. 사실 지난번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를 두번이나 낙선케 한 것은 바로 스캔달이었습니다. 그 스켄달에 공을 세운 사람들은 이번 정권에서 나름대로 큰 세력을 갖고 있습니다.

 

최근 이회찬 국무총리가 골프 스캔달에 휘말려 결국 사표를 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스캔달이 머리 속에서 지워지기도 전에 이번에는 대권주자인 이명박 서울 시장의 테니스장 무료 사용 스캔달이 떠 오르고 있습니다. 또한 한나라당의 최연희 의원의 성폭행 스캔달은 그가 사표를 제출하기 전까지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정권의 세력 다툼 속에 떠 오르는 스캔달의 진실성은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대부분의 스켄달은 치밀한 계획 속에서 상당한 시간을 갖고 철두철미하게 만들어진 음모성 계략이라서 그에 대한 재평가가 떠 오르기기 전까지는 그 배후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오늘 주님은 제자들에게 스캔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스캔달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는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스캔달이 없을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 스캔달을 만드는 자는 그 형벌을 면치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우리가 실족할 수 밖에 없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하면이라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성도들이 잘못된 구원론, 귀신론, 성령론, 종말론에 빠지는 것은 그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를 위해 주께서 성령 세례를 통해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 하였고 다시 이는 우리가 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4:14) 하였습니다.

 

B. 책망 용서(3,4)

흥미롭게도 주님은 실족에 관한 말씀을 하신 후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채칙과 당근을 같이 쓰라 하신 말씀입니다.

 

어떻게 보면 앞의 말씀과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씀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실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 교회들이 분열에 분열을 거듭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온전했을 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자기의 사랑을 확정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함께 부르심을 받은 우리 형제 중 누가 충분한 지식에 이르지 못하여 하나님의 어린 자들을 실족케 하였다 할 때 누가 그들을 모두 정죄한다면 그 또한 자기보다 앞선 사람에게 정죄를 당하여 결국 이 땅에 모든 사역자들은 서로 물리고 죽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지막 유월절을 함께 하시며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내가 주와 또한 선생이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3,14) 하셨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경계란 그의 잘못에 대해 묵인하지 말고 책망하라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사후약방문을 처방하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문제는 성도의 잘못을 보고도 책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을 보고도 주의 사랑으로 용서 한다는 구실로 못 본 척하기 일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자식의 잘못을 지나쳐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목회에 있어 책망은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한 두 번 용서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일곱 번이라고 용서하라니 이 말씀은 용서에 대한 숫자적 개념을 갖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II. 사역과 제자의 믿음(5-10)

A. 믿음의 요소

두 번째 단락은 사도들의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앞의 문맥과 함께 이어서 생각해야만 그 의미를 온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받던 사도들 주께 이르되 우리의 믿음을 더하소서 하였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복음을 맡은 사도들의 믿음을 크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는 믿음이 없다 생각하고 믿음을 크게 하기 위하여 새벽기도도 하고 철야도 하고 금식도 합니다. 또한 다른 목사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매일 아침 커다란 믿음을 달라고 울부짖습니다.

 

사도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주 앞에 부름 받은 사도라도 앞에서 하신 주의 말씀을 따르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연 이 땅에 누가 사람들을 실족치 않게 할 수 있으며 범죄한 사람을 거듭하여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 주님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6) 하셨습니다. 아마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심히 놀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께서 커다란 믿음을 더해 주시기를 원한 것인데 주님은 겨자씨 만한 믿음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은 믿음의 요소가 세상의 질서 속하지 않은 것과 또 인간의 행위적 양적 요소에 있지 않음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적과 기적을 일으킬 믿음을 얻기 위하여 새벽제단을 쌓기도 하고 금식을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목사들은 아예 깊은 산에 올라가 수련을 쌓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큰 믿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누구라도 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이 세상 질서를 초월한 것입니다.

 

B. 봉사의 준비(7-10)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께서 믿음과 관련하여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 주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 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앞의 말씀과 관련하여 제자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믿음의 결과 곧 세상 질서를 초월한 이적들은 제자들이 자기의 할 일들을 하였다고 해서 마땅히 주시는 사례가 아님을 일깨우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은 주께서 부르셨으니 당연히 능력을 주실 것이라 생각하고 본문에서의 사도들처럼 큰 믿음을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항상 자기에게 주어진 일들을 충실히 할 수 있는 종의 자세를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35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하시며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 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하셨습니다.

 

계속하여 주님은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눅12:37)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어 있는 하인들을 자리에 앉히고 띠를 띠고 수종하는 주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주인은 항상 섬길 수 있는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항상 섬길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띠를 띤다는 말은 그 당시 풍습을 이해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당시 중동지방을 비롯한 고대사람들은 신분이 높을수록 땅에 끌리는 긴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긴 옷은 일하기에 매우 불편합니다. 발에 걸려 빨리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허리에 띠를 매야만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부활 후 갈릴리에서 만난 베드로에게 네가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를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요21:18) 하셨습니다.

 

오늘날 부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과연 항상 섬길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은 섬김을 받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항상 섬김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항상 언제 어디서든지 띠를 띠고 섬길 준비가 되어 있는 종들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주여 저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주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