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누가복음강해

(눅4:18) 사역의 필수 조건

이요나 2004. 7. 25. 05:39
(눅4:18) 사역의 필수 조건

(눅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여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은 누가복음 두번째 시간입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금식 3일하고 나니 허리가 무너지려고 합니다. 오래 누워 있지 못하는 성격이라 눕지도 못하고 쿳션이 없는 나무의자는 내 허리의 고정 자세를 도와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이에 나보다 복많은 목사가 있을까 싶습니다.

물좋고 공기좋고 아름다운 경관 속에 앉아, 시원한 에어콘 팡팡 놀아가겠다..냉장고에 먹을 것 진진하겠다..아무에게도 간섭받을 일 없는 창가에 홀로 앉아 앝은 담장을 타고 넘나드는 다람쥐와 미소를 나누며 가끔 창틈을 엿보는 도마뱀 그리고 개미 떼거지들,,,,이 따금씩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인간의 진실됨을 발견하게 하는 아주 조용한 마을입니다. 이름 그대로 Nice Billige입니다.

어떤 분께서 이멜을 주시기를 미국에서 얼마나 힘이들면 금식을 하시냐고 물어 왔지만...오해셨습니다. 저의 경우 금식은 원래 고난 중에 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때에 하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제 더 늙으면 그마나 금식도 못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3일 금식후에 보식 없이 된장찌게에 밥한사발 거뜬히 해치우고 복숭아에 바나나 한 송이 커피과 쿠키까지 겻들였답니다.(이궁 복이 넘쳐 흘릅니다용~~)

우리는 앞에서 예수님의 사역에 앞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는 모습을 살펴 보았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셨다는 부분에 주목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시험은 성령 안에서 계획된 것이고 예수님은 시종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마귀의 시험을 이겨내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자신이 성령에 충만한 것만을 믿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소홀히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그러한 분은 성부 성자 성령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다시 공부하여야 할 것입니다. 요한은 성령은 자의로 말하지 않으시고 들으신 것을 말씀하신다 기록하였습니다.

복음사역의 조건
4장 16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셨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삶 속에서 안식일을 귀히 여기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중에는 주일을 소홀히 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치 주일은 교회에 봉사를 하러 나가는 날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일은 교회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메시지를 들으며 성도들과의 교제를 위한 날인 것입니다.

회당지기가 예수께 이사야 두루마리를 건네 주자 예수님은 손수 책을 펴서 61장을 펴신 후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여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일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그가 친히 말씀이시니 성경과 관계없으실 것으로 생각하지만 주님은 성경을 일으셨고 공부하셨고 늘 말씀과 동해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지금 주께서 선포하신 이사야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사역적 목적을 언급하신 것으로 주님은 성경이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미리 기록하였음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사역은 세가지 조건이 함께 가추어져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택하심이며 부르심 가운데 성경의 말씀의 준비와 성령의 세례입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예수를 믿고 성령세례만 받아 사역하려는 조급함을 갖고 있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주님은 사역의 처음부터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충실하셨습니다.

기름부음의 필요성
주님은 성령이 임하여 주께 기름을 부으신 목적에 대하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라는 것은 배고픔을 언급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근본적인 영적욕구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산상 수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에 대하여 바울은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으며 예배가 저희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예배는 남아 있는대 그들 가운데 말씀이 임재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커다란 부잣집 잔치에 먹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들은 삶 속에서 늘 성경을 보고 있었으며 그들의 예배에서는 늘 말씀이 선포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으로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심령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역사학자들이나 스님에게 성경을 공부하는 것과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제가 몇년전에 김용옥 교수는 신학박사요 철학자라고 해도 성경을 모르는 무식장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은 바로 이 부분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셨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매개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배풀지만 내 뒤에 오시는 그이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리라 증거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말씀을 듣는 성도들이 갈급하고 있는 이유가 바라 이 문제입니다. 그들 가운데 예배가 없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없는 것이 아니고 가르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하심과 기름부음을 받은 사역자가 부재한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의 상태
주님은 그 당시 교회와 성도들의 상태를 언급하여 먼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신체적 구속을 당하신 경험이 있으신지요. 저는 실제로 신체적인 구속을 당해 본 경험도 있고 또한 육정에 포로가 되어 음행의 사슬을 끊지 못하고 울부짖던 세월이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 중에는 영과 혼과 육의 사슬이 도처에 놓여 있습니다.

두번째로 주님은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이라 하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들은 모두 잘못 들으면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씀입니다. 니고대모가 주께서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 우리가 늙어서 다시 모태에 들어 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 하고 벽창호 같은 소리를 한 것과 같은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눈먼자들이란 소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눈먼자들이 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모와 함께 살면서 부모의 뜻을 알지 못하는 자식은 정말 속터지는 일입니다. 주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며 바리새인에게 차라리 너희가 소경이였다면 좋았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세번째로 주님은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종교적 속성에 의한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들의 고통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정치적이나, 사회적으로 얽매여 있으면 그것은 인내하고 저항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속성은 영혼의 문제가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의 혼은 그 눌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난 세월 나는 오랜 동안 오중복음이라는 종교적 사슬에 묶여서 열성적인 종교활동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영혼이 세상 임금에게서 벗어나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로 나온 후 처음 체험된 교회의 가르침어었습니다.

문론 나의 영혼은 구원 받았고 나는 주의 은혜를 입은 하나남의 자녀가 되어 거듭난 생명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영혼은 만족을 얻지 못하고 늘 갈급하여 울부짖었고 또 다른 것에 포로가 되고 주님의 성전에 거하면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지금 생각하면 허망하기 짝이 없는 세월들이였습니다. 죄에서 풀려 나와 또 다시 포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듬 미국에 와서 또 다른 고통에 빠져있습니다. 그 이유는 미국에 올 때 교회를 개척하려고 한 것이 아닌데 이곳 교회와 성도들을 보니 정말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니 속에서 분노가 치솟고 견딜 수 없는 아품이 치솟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한국은 나름대로 기름부음을 받은 목사님들의 가르치심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교회와 성도와 주일 예배는 있는데 말씀도 없고 의로움도 없고 영적 설레임도 없고 예배행위와 봉사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저는 이곳에서 성경을 펼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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