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누가복음강해

(눅17:37)선택의 방황

이요나 2006. 3. 29. 12:43

(눅17:37)선택의 방황

 

(눅17:37)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가라사대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날이 갈수록 세상은 양극화되고 있습니다. 정치는 진보와 보수로 나뉘고 사회는 부자와 빈곤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 존재의식 조차 무시당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의 나라의 백성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는 크리스챤은 매우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창조로부터 세상은 낮과 밤, 어둠과 빛의 세계는 양분화 되었습니다. 이 진리는 아직도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빛을 상실한 사람들은 오랜 세월 어둠 속에서 살아 왔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양극화 현상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에 의해 간음 현장에서 끌려 나온 여인에게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빛을 본 사람들이 사람이 선택해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요한은 정죄에 대하여 그 정죄가 이것이니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는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요3:19-21) 증거하였습니다.

 

또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요11:9,11)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선택의 시간이 정해져 있음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께서 이 땅에 오신 이래 벌써 이천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하며 이 땅에서 인생의 천국을 찾고 있지만 그날은 아주 가까이 와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선택하였는가에 대한 그 결과는 성경에 예시된 대로 각 사람에게 돌아 갈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17장 두 번째 시간입니다. 앞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실족시킨 자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형벌이 따를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사람들을 실족시킨 가장 큰 원인이 결국 사역자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때 제자 된 우리의 믿음은 참으로 허망해집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청한 것입니다.

 

이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라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복음 사역자의 믿음의 요소가 어디에 속한 것인가를 물으신 것입니다.

 

I. 인생의 벽(11-19)

오늘 우리는 17장 3번째 문단과 4번째 문단을 살펴 보겠습니다. 3번째 문단(11절부터 19절)은 주께 고침을 받은 문둥병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통해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던 중입니다.

 

주께서 한 촌에 이르니 열명의 문둥병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문둥병자들은 예수를 보자 큰 소리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이 여기소서 외쳤습니다. 이들도 주께서 이미 문둥병을 정결 시키신 일과 병을 고치신 역사를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A. 저주의 벽

성경은 문둥병을 인간의 원죄의 측면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문둥병의 발병 원인과 속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수천 년 동안 문둥병은 천형병(天刑病)으로 분류되어 죄인시 되어 왔었다. 다행이 1871년 노르웨이의 의사 한센이 나병환자에게서 바실루스균(Bacillus leprae)을 발견해 내어 나병 치료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나병의 발병원인은 여전히 신비에 쌓여 있습니다.

 

구약 레위기 13장에는 문둥병에 걸린 사람에 대한 관찰과 그 대응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문둥병의 치료에 관한 내용이 아닌 문둥병을 진단하는 법과 환자의 격리에 대한 규정에 대해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레위기 14장에는 문둥환자의 정결에 관한 규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문둥병에 대한 율법이 제정된 이래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정결의식으로 문둥병을 속죄하고 회중 속으로 돌아 온 사람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성경은 예수께서 문둥병자를 정결케 하신 내용을 전달하고 있을 뿐입니다(막1:40).

 

문둥병자의 호소를 들은 예수님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 사회가 아직 율법에 매여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사회활동을 위한 예수님의 배려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그들이 가던 중 깨끗함을 받은 것을 깨닫고 한 사람이 달려 와 하나님께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극한 사람들 가운데극한 환란이 임할 때 인종과 민족과 종교적 벽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사회와 가족들에게 격리된 사람들 속에 이념과 종교와 민족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그들을 다시 가족과 사회 속으로 돌려 보내기 위해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을 저주에서 풀어 새 삶을 찾게 한 예수께 돌아 온 사람은 사마리아인 뿐이었습니다.

 

B. 종교의 벽

주님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영혼의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이로서 그는 천국백성이 된 것입니다.

 

나는 한국에 돌아 와 서울 갈보리채플 개척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귀신에 들린 사람들과 마약환자, 알코올 중독자, 음행에 빠진 사람들 그리고 동성애자들..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대부분 그들은 신앙 생활을 하는 가족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던 청년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귀신에 들리고 마약과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또 동성애에 빠지자 그들은 가족들에게서 스스로 격리되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였습니다.

 

그들은 가족들과 함께 교회를 가고 싶었지만 가족들이 섬기는 교회는 그들을 용납하지 않았고 가족들도 자신 자녀나 형제가 그런 부류에 있음을 알리기 꺼려했습니다. 이태원에 갈보리채플이 개척되자 동성애자들과 마약과 알코올 중독자들이 하나 둘 모여 들었습니다. 그리고 귀신에 들려 정신병원에 입원한 어느 부자의 외아들도 찾아 왔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을 치유할 은사를 가진 목회자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나는 그들과 같이 문둥병과 같은 죄의 고통 가운데 주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였고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이 내게 역사하여 함께 예배들이며 성경의 말씀을 전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나와 함께 생활을 하며 함께 예배를 드리며 매일같이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들의 부모는 변화된 자녀들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감사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그들은 정상적인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가족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족들은 다시 그들을 데리고 자기가 다니던 교회로 돌아 갔습니다. 지금 이들 중에 나와 함께 갈보리채플에서 주를 섬기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실 나는 그들이 나와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염려하는 것은 이들이 문둥병에서 풀려 나와 다시 중풍병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외견상으로 볼 때 이들은 상당히 발전된 종교인으로 발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영혼에 대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II. 하나님의 나라(20-37)

A. 초림의 때

 

바리새인들이 주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물었습니다.  이 때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스라엘의 중심 종교 공동체인 바리새인들도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질문은 오늘날 모든 교회들의 질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은 오늘날 우리와 다른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곧 메시야의 왕국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이 대망하던 메시야는 이미 오셨고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께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올 것이냐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문답은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기다리며 언제 올 것이냐 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질문은 아닙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처음부터 천국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믿는 사람이 나에게 천국이 언제 임할 것이냐 물으면 나는 그에게 천국은 이미 임하였고 우리 가운데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이 땅에 도래할 천국의 주체를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모든 것을 주셨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속한 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가 만군의 주재이시며 만왕의 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알지 못하고서는 천국도 없는 것이고 그에게 속할 때에 이미 천국이 임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아직 예수를 주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천국이 이미 그들 속에 임한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며 또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너희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경에 기록된 천국은 실제로 이 땅에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의 믿음도 소망도 허사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B. 재림의 때

먼저 주님은 제자들에게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때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입니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 가운데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였으나 그것은 믿음의 실체이지 현실의 실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혹의 시대

계속하여 주님은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좆지도 말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날이 임하기 전에 적그리스도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미혹할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년전 한국에서도 이장림 목사라는 사람이 나타나 1993년에 주께서 오실 것이라 하여 대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런 일들로 하여 사람들이 점점 재림에 관하여 무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 대로 곧 오실 것입니다.

 

  *초자연적 재림

주님은 계속하여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 하리라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주께서 오실 때에는 육체를 입고 초림하셨을 때와는 달리 초자연적인 상황 속에서 임하실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저편까지 번뜻하여 비춤과 같이 임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물질적 속성과 질서 속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고난을 받으신 후 부활하신 새로운 영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C. 세상의 두 풍속도

계속하여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의 날이 임하기까지 전개될 세상 풍속도를 설명하셨습니다. 먼저 주님은 성경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를 인용하여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이 땅에 임했던 멸망에 대한 증거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의 강림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해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3:5-7) 증거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늘날도 노아 홍수 때의 사람들과 같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결혼을 하여 부귀 영화를 누림을 삶의 목표로 삼는 것을 빙자하신 것입니다.

 

계속하여 주님은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사람들이 롯의 때의 사람들이 상업적이 되어 재물에 집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상황은 더 극심합니다. 흥미롭게도 오늘날 우리나라의 상품과 컨텐츠가 전세계 상권을 휘어잡고 있습니다. 또한 강남불패를 외치며 하늘 높은지 모르고 치솟는 집값 문제는 이제 한국인이 사는 전 세계 가운데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로서 우리는 주께서 이른 날이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상황의 긴급성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재물에 집착에서 마음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롯의 처를 생각하라하셨기 때문입니다.

 

계속하여 주님은 무릇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생명의 주인이 주인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죽음에서 살아나심처럼 그의 말씀을 따라 목숨을 내어버린 자들을 주께서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대환난 때의 일들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대항하여 그때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자들은 목베임을 당하였으나 주님은 그들의 영혼을 제단 밑에 보전하셨습니다. 

 

D.선택의 중요성

주님은 34절에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하셨습니다. 또 킹제임스 성경에는 두 남자가 들에 있으매 하나는 붙잡히고 다른 하나는 남겨지리라(36)기록되었습니다.

 

나는 이 비유는 대환난 전에 이 땅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성도의 휴거를 의미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두 남자와 두 여자의 비유입니다.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어 있는 것도 흥미롭고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저는 이 말씀은 택하심과 부르심에 관한 말씀이라 믿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한 배에서 태어났으나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셨고 장자의 직분보다 재물을 탐하고 음행하던 에서를 버리셨습니다.

 

또한 바울은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갈4:22,23) 증거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수많은 교회와 성도가 함께 누워 있고 또 열심히 일을 해도 오직 주의 택함을 따라 부름받은 성도들이 들림을 받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주여 어디오니이까?하고 주께 물었습니다. 종말에 있을 일들에 대한 주의 말씀을 들을 제자은 이 일들이 이스라엘과 이방 중 어디에서 일어 날 것인지에 관심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에 주님은 주검(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셨습니다. 참으로 선문답같기만 하여 그 진의를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요한 계시록 19장 21절에도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기록되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왕국의 체제가 무너지자 몰려든 새들을 비유한 것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말씀은 모든 일들의 사필귀정을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말에 방귀가 잦으면 뭐가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안 땐 굴뚝에 연기나랴 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모든 일은 그 원인과 결과가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0장에 기록된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마르다에게 마리아는 좋은 것을 선택하였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교회 곧 성도들을 비유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늘 바쁘게 활동하는 여인이였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르다는 상당한 성경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늘 주님 앞에 앉아서 주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마리아는 자신의 모든 것을 올인하여 주님의 장사를 준비하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여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 속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주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마리아의 일도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기념하라는 말씀은 마리아의 선택의 중요성을 모든 성도(교회)들이 회상케 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오늘날 먹을 것을 쫓아 헤매는 새들이 많습니다. 수년전 카나다 토론토 블래싱이란 말이 교계에 유행되었습니다. 전세계에서 20만이 넘는 교인들이 참여하여 넘어지고 짐승을 소리를 내고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아직도 많은 교회들이 야단법석을 떨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사방에서 고기냄새를 맡은 독수리들이 모여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원래 야답법석이란 들판에서 벌어지는 불교축제에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 것을 말합니다. 이 글을 읽은 분들은 제발 야단법석일랑 떨지 마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