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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보리채플 특징 - 제5장 은혜 위에 은혜

이요나 2006. 7. 15. 15:07
갈보리채플 특징 - 제5장 은혜 위에 은혜                 서울 갈보리채플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히브리 13:9).

갈보리 채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대목에 관해서 특징적인 위치를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아무도 살아 남을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다. 우리의 생활에서 우리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는 날마다 경험하고 우리자신이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은혜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과 은혜가 타락한 자를 다시금 새로운 생명의 길로 회복케 하는 것을 믿고 있다.

어떤 교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것이 심히 결핍되고 있다. 범죄한 자들이 회개하고 다시금 회복케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지 않고 아주 가혹하고도 융통성이 전혀 없는 심한 율법주의의 형태에 얽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타락한 자들을 다시 회복시키기를 원하기 때문에 취하는 역할을 당신들이 보면 놀랄 것이다. 내가 탤런트가 있는 하나님의 종이 원수의 유혹에 빠지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훌륭한 하나님의 종들을 빼앗아 가기에 혈안이 되어 날뛰는 사탄을 볼 때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은혜에 대해서 아주 강한 위치를 지켜 왔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가르침을 믿는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다룸에 있어서 그의 가장 큰 특징들 중에 하나이다. 만일 그가 은혜의 하나님이 아니었더라면 아무도 살아남을 자가 없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필요하다. 내가 기도를 할 때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공의롭게 해달라고 하나 나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지 않고 자비나 은혜를 구한다. “주님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나에게 악하게 해한 자들에게는 공의로 대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주여 나에게는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주님은 우리가 자비를 얻게되고 은혜를 입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고 강조하심을 볼 때 아주 흥미 있는 일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7).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것과 동등시하게 보인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것이 주님이 가르치신 주기도에서 잘 나타나 있다. 표본적인 기도의 마지막에 주님은 간구하는 것 가운데 단 한 가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용서에 대한 것이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태복음 6:15).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서 용서의 필요성을 다루고 계신다. 마태복음 18장에서 1600만불의 빚을 진 종을 탕감해준 주인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16불의 빚을 진 동료를 빚을 갚지 않는다 하여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주인이 그 종을 불러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갚을 빚이 얼마냐? 내가 그 빚을 모두 탕감 해주지 않았느냐? 내가 듣기로는 너에게 작은 빚을 진자가 갚지 않았다고 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하니 어찌된 일이냐? 주인은 그 종을 책망하고 네가 그 빚을 한푼도 빠짐없이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으리라 하시고 옥졸에게 붙였다”(마태복음 18:23-35).

만일 우리가 많은 용서를 받았으면 다른 형제들도 용서하여 주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우리도 넘어진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날마다 필요하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서있다. 나는 나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가 하신 일에 대해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나는 내가 행한 일에 대해서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 내가 행한 일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의로운 행함이 아니라 은혜로 얻은 것이다.

이것이 전 신약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 할 수 있는 한 대목이다. 그래서 우리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대목인 것이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이 두 공관 복음은 아주 의미 심장한 책들이다. 그 이유는 이 두 권의 책이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을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이 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어 보고자 하는 것과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범죄 하여 넘어진 자를 다시금 회복시키는 것을 추구해야 해야한다고 믿고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을 가르친 것과 같이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라디아 6:1 ). 나는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계속 받고 있는 은혜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으며 또한 이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주려고 애쓰고 있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가 많은 목사가 넘어졌다는 말을 들을 때에 사탄에게 대한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주님을 위한 일에 큰 능력과 재능을 받은 자들이 사탄의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나는 사탄이 승리를 거두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서 넘어진 주의 종들을 회복 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회복될 때에 그들이 받은 재능을 가지고 다시금 주님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애에서 넘어진 자들을 회복시키는 일을 많이 해왔다. 이것은 단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나는 모두 부서져 쓸모 없이 된 것을 재생하여 아름다운 것을 만들기를 좋아한다. 나는 1957년에 제작된 포드자동차 회사에서 만든 ‘스카이라이너’라는 승용차가 하나 있었다. 내가 처음에 이 차를 구입했을 때 여러분들이 그 차를 보았다면 이것은 폐차 처분 직전에 있는 고물 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차를 아름다운 차로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을 많이 투자해야 하는 것이다. 이 차를 모두 분해해서 녹슨 것을 갈고 닦고 페인트를 칠하여 다시 재조립을 하면 드디어 쓸모 없이 버려야될 고물 차가 아주 아름다운 자동차로 변신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을 완성하고 나면 그러한 일에 기쁨과 성취감이 있는 것이다. 나는 또한 오래된 집을 수리하기를 좋아한다. 나의 딸은 항상 많이 고쳐야할 다 낡은 오래된 집을 구입한다. 그리고 나에게 와서 “아버지 내가 산 집을 한번 봐 주세요”라고 말한다. 나는 다 낡은 오래된 집을 다시 수리하기를 좋아하며 그 일이 끝난 뒤에는 그 낡고 오래된 집이 아름답게 단장한 새로운 현대식의 집으로 변신하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탄이 망쳐 놓은 인생에게도 같은 원리를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쓸모 없이 폐인이 된 인생들을 취하여 다시금 빚어서 재생하고 발전시켜 새롭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 갈보리채플의 대부분의 목사들을 보라 그들은 참으로 파선된 인생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의 인생을 다시금 쓸모 있게 회복 시켰나 보라! 하나님께서 이러한 절망의 인생들로부터 얼마나 부하고 가치 있는 삶을 낳게 하신 것을 보라! 세상이 볼 때에 도저히 희망이 없다고 버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취하여 아름답고 영광스런 귀한 그릇으로 만드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하고 계시는 아름다운 사역이다.

용서를 받은 자들은 용서를 해줄 필요성이 있다고 믿는다. 긍휼을 입은 자들은 긍휼을 베풀어주어야 한다. 은혜를 입은 자들은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고 전하는 것이 갈보리 채플의 목회에 중요한 한 부분이다.

요한복음 8장에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오는데 예수님이 성전에 오셔서 2절에 보면 앉아서 가르치려고 하는데 갑자기 소동이 일어나면서 가르치시는 일을 중단하게 하였다. 한 여인의 흐느끼며 우는 소리가 들려 오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요한복음 8:3-4).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계속 예수님의 가르침이 모세의 율법과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려 하였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율법을 그들에게 주실 때에 모세를 도구로 사용 하셨음을 알고 있다. 모세에 대한 권위에 대해서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다. 모세는 하나님의 대변인이었다.

만일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에 대해서 반대되는 말을 했다면 예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주장할 수 없게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혼에 대한 중요한 주제였던 것이다. 그들이 예수께 와서 묻기를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태복음 19:9 ). 그들이 말하기를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라고 묻고서 속으로 이제 예수를 함정에 빠지게 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시금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태복음19:8 )라고 대답하셨다.

여기서도 보면 그들은 예수가 모세의 율법에 어긋나게 가르치는 것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간음한 여인을 세워놓고 예수께 묻는 말이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한복음 8:5-6). 이것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고자 하는 시도가 너무나 확실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한 말씀도 아니하시고 몸을 꾸푸려 마치 말을 듣지 않으신 것처럼 땅에다 손가락으로 글을 쓰시기 시작하였다.

지금 무슨 말을 땅에다 쓰셨을까? 아마 “남자는 어디 있느냐?”라고 기록했었는지 모르나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현장에서 잡았나이다”. 그런데 그들은 현장에서 남자는 잡지 못하고 여자만 잡아 온 것이다. 모세 율법에 의하면 남자와 여자 둘 다 돌로 쳐죽이라고 하였다. 그들이 참으로 모세의 율법을 지키기를 원했다면 남자도 그곳에 끌고 왔어야 했다. 그러나 아마 그 남자가 자기들의 친구인지 그 남자는 놓아주고 여인 잡아 왔으니 이것은 진실로 공의롭지 못하다.

예수의 원수들은 예수가 저들의 말하는 것을 무시하는 것처럼 땅에다 글만 쓰고 있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예수께 대답할 것을 재촉하였다. 드디어 예수님이 일어서시며 하시는 말씀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한복음 8:7). 그리고 다시금 꾸푸려 땅에다 글을 쓰셨다. 이번에는 무엇을 쓴 것을 내가 알겠다. 예수님이 그 여자에게 돌을 던지려고 서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아마 나이 많은 자부터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이 많은 자가 여자친구와 함께 많이 범죄한 사실을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가 범죄한 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하기 시작했을 때에 이 나이 많은 남자는 말하기를 “오늘 내 마누라가 집에 빨리 오라고 하는 말이 생각나는군 자네들 내가 먼저 집에 가 봐야겠어”라고 그는 떠나 버렸다. 예수는 계속하여 그 다음 나이 많은 자의 죄상을 자세하게 기록하기 시작했을 때 그 사람도 떠나버렸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나이 많은 자로부터 젊은 자에 이르기까지 계속 그들의 숨기운 죄상을 기록했을 때 모두다 돌을 땅에 떨어뜨리고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다 떠나 버리고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때에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John 8:10-11).

얼마나 아름다운 예수님의 반응인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심한 자동차 사고 났을 때에 차가 충돌하여 박살이 나고 사람의 몸이 부딪쳐 상처가 나서 출혈이 심하여 길거리에 누워 생명이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두 종류의 응급차가 그 장면에 도착하게 된다. 첫 번에는 보통 순경 차가 와서 안전지대를 조성하여 사람들과 차량의 접근을 못하도록 하며 교통정리를 하는 일들을 한다. 그 후에 사고 난 차의 위치와 바퀴가 미끄러진 자국을 조사하여 그리며 증인들과의 인터뷰를 하여 증언을 기록하는 일들을 한다.

그들의 해야하는 일들은 누가 법을 어겼나 이러한 비극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사람을 구명하는 것이다. 순경의 주된 관심은 누가 어떤 법을 어겨서 이러한 참사를 일으켰고 누가 잘못했나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둘째 번의 응급차는 구호대원들이 탑승하여 도착한다. 이 사람들은 누가 잘못했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길거리에 누워서 출혈하고 있는 사람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출혈을 멈추고 골절의 여부를 조사하고 심장 모니터를 부착하여 환자의 상태를 속히 파악하여 환자의 위기 여부를 확인하여 들것에 실어 앰뷸런스 태워 병원으로 빨리 달려가는 일을 한다. 그들은 누가 실수를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누가 잘못했는가를 구명하려 온 것이 아니고 교통 사고로 인하여 다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왔다.
지금 두 가지 종류의 일을 관찰 할 수 있다. 순경의 하는 일의 태도를 가지고 하는 자가 있다. 그들은 비극을 당한 자와 깨어진 인생에게 와서 하는 일이 법전 책을 끄집어내어 비극을 당한 자들에게 율법을 읽어 주는 것이다. “비극을 당한 자들은 그 말을 듣고만 있고 침묵을 지켜야할 권리가 있고 무슨 말을 하면 그것을 가지고 그들에게 불리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순경은 사고현장에서 법적인 방법으로 누구의 실수이며 누가 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종류의 일을 하는 자들은 마치 구호대원들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주가 법을 어겼으며 누가 실수를 하였느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다만 이 사람들이 어떻게 치료가 될 수 있느냐 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상처를 고칠까? 파괴된 인생을 어떻게 도와줄까? 어떻게 이 사람의 생활을 정상으로 돌릴 수 있을까? 어떻게 치유를 할 수 있을까?

지금 여기서 요한복음 8장에 기록한 사실에 바리세인들은 법전을 가지고 나와서 따지는 자들이다. “우리의 법은 돌로 치라고 했는데 당신은 무엇이라 말하겠느냐?” 예수님은 그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고 범죄한 여인을 도와주고 다시금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주기를 원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씀 하셨다. 예수님의 소원은 그 여인을 다시금 올바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상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추구하고 있다. 우리의 소원은 상한 자들이 회복하는 것이다. 그들의 발로 일어서서 다시금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다. 요한은 말하기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왔으나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다고 했다. 만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라면은 나는 예수와 같이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교회를 바라보거나 목회를 바라 볼 때에 우리는 많은 자들이 근본적으로 모세 율법의 수종자들임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아주 율법주의 적이요 거칠다. 법을 어기게 되면 그들은 정확히 법이 무엇이라고 한말을 해준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없는 자는 돌로 먼저 쳐라...나도 너를 정죄 아니하노니”라고 말씀 하셨다.

율법에 의해 저주를 받은 많은 자들을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기쁨이요 또한 특권이다. 나는 이 사람들이 회복되기 전에 참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율법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 참으로 회개치 않은 자들에게는 율법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율법이 필요한 곳이 있다. 만일 율법을 율법답게 사용한다면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우리가 회개를 한 뒤에 때로는 율법의 형벌을 자청하는 때가 있다. 우리가 회복되기를 원치 않는다. 예수께서는 은혜와 진리를 위해서 오셨다. 우리는 항상 넘어진 자를 다시 일으켜 주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넘어진 자가 다시 일으킴을 받기 전에 있어야할 중요한 것은 회개의 필요성이다.

산산이 찢어지고 멍들은 희망 없는 한 인생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서 다시금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은혜에 대해서 좋지 않은 반응을 가지고 올 위험성도 있다. 사람이 은혜를 받으나 참된 회개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밖으로는 회개하는 것 같이 보이나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자들이 있다. 내가 은혜를 베푼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이 있다. 나중에 그들은 나에게 손해를 끼치곤 한다. 나도 완전치 못하다. 내가 판단을 잘못하여 아직도 죄 가운데 있으면서 진심으로 회개치 않은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왔다.

나는 죄를 회개한 줄 알고 한 사람을 돕는 목회자로 교회에 채용하여 일을 하다보면 나중에 그 사람의 생활에서 회개치 아니한 죄성이 드러나 내가 실수했음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아마 미래에도 같은 실수를 저지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한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만일 내가 실수한다면 판단을 잘못하여 실수 했다기보다 오히려 은혜를 베풀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았다는 편을 택하고 싶다.

에스겔 34장에서 주님은 멀리 떠나 잃은 양을 찾지 아니한 목자에 대해서 책망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에스겔 34:4). 하나님은 나의 실수에 대해서 행하시는 일이 내가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해서 행하는 것 보다 훨씬 관대하게 대하고 계신다고 믿는다. 나는 하나님이 이미 용서하신 그 사람을 용서는커녕 저주하고 있는 것이다.

판단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대복음 7:1). 우리는 우리 스스로 판단 기준을 세워두고 그 기준에 의하여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로마서 14:4). 나는 판단하는 실수를 범하기를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진실로 회개한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판단을 잘못하여 실수하는 위치에 있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그래서 내가 만일 실수를 한다면 은혜의 편에서 실수하는 편을 택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내가 사람을 잘못 판단하여 실수하는 것 보다 은혜를 베풀다가 실수할 때에 나에게 더욱 은혜로 대하실 것이다. 나는 사람을 잘못 보고 판단하는 실수를 범하기를 원치 않는다.

율법주의에 빠지기란 아주 쉽다. 우리는 이러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과격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대개 ‘개혁신학’에 깊이 심취하는 사람 가운데서 볼 수 있다. 그들은 보통 율법주의에 깊이 빠져있다. 그들은 T자는 교차로 I자는 점선으로 똑 바로 그려져 있나 하는 것을 확인하기를 원한다. ‘개혁 신학’은 고슴도치에 좋은 점들이 있듯이 어떤 면에서 좋은 점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꽉 않으면 당신이 찔리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어떤 성경 구절들을 모나지 않게 얼버무려 해석한다고 느껴 반대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논쟁의 대상이 되는 주제들을 고의적으로 모나지 않게 해석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보통 그러한 경우 두 가지 면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편이 생기고 분열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한쪽으로 치우칠 때에 분열이 생기는 것이다.

전형적인 예로서 하나님의 절대권과 사람의 책임에 대해서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성경은 실제로 두 가지 모두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이해로는 이 두 가지가 상호 상반되는 것이다. 이 문제를 가지고 분열되는 사람들은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함께 받아 들일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절대권을 극도로 주장하다 보면 사람의 책임이 제거되고 만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책임을 극도로 주장하다 보면 하나님의 절대권을 제거하는 결과를 가져 오게된다. 사람이 이러한 교리를 가지고 사람의 논리로 결론을 지으려 하면 이러한 실수를 범하게 된다. 사람의 논리를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절대권을 주장 해보면 논리적인 결론은 사람에게 선택권이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절대권과 사람의 책임을 똑 바르게 나눌 수가 있을까? 우리는 이 둘 다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나의 이해력으로는 이 둘을 모두 만족시킬 만한 밸런스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 둘이 어떻게 함께 공존 할 수 있는지 이해 할 수 없지만 나는 이 둘을 모두 믿는다. 나는 하나님의 절대권을 믿으며 또한 나 역시 나에게 책임이 있으며 내가 선택한 일에 대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단지 이 성경의 두 교리가 진리임을 믿는 것이다.

요 근래 어떤 목사가 칼빈니즘에 관한 작은 책자의 표지에 저울이 있었다. 그 저울의 한쪽에는 요한 칼빈을 다른 한쪽에는 요한복음 3:16절을 얹어 놓았다. 당신은 어떤 쪽을 선택하겠는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라. 사람들로 하여금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라. 당신이 그렇게 하는 순간 교인의 반수는 잃어 버렸다. 왜냐하면 대게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사람들이 반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으면 당신의 교회 교인들의 반을 잃은 셈이다. 당신이 참으로 당신의 교회의 교인 반을 잃어버리기를 원하는가?

당신은 갈보리채플이라고 불리 우는 교회의 미덕을 아는가? 사람들은 당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잘 모른다. 만일 당신이 침례교단에 속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당신이 어디에 서있는 것을 안다. 반수의 교인들이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은 침례교단에 속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이름에다 장로교라는 간판을 부치면 그들은 당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 것을 알고 반수의 교인들이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장로교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당신의 이름에다 나사렛 교단이라 붙이면 그들은 즉시 당신을 새장에 집어넣어 쫓아내어 버리고 만다. 그들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안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를 떠날 필요가 없게된다.

갈보리채플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다소 신비로운 점이 있다. “이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가? 모르겠는데 한번 가서 알아보자. 그래서 모든 밭이 우리 것이다. 당신은 제일 큰 연못에서 고기를 낚을 수 있다. 당신이 마케팅을 할 때에 할 수 있으면 가장 큰 마케팅을 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므로 시장을 짤라 좁히지 말라 또 “우리는 이 작은 마켓에서 고기를 낚을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시장을 넓혀라 큰 연못에서 낚으라 생선이 잘 잡히는 곳에서 낚시질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