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보리채플특징

갈보리채플 특징-제4장 하나님의 방법으로 교회를 지음

이요나 2006. 7. 15. 15:06
갈보리채플 특징 - 제4장 하나님의 방법으로 교회를 지음            서울 갈보리채플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스가랴 4:6)


갈보리 채플의 다른 하나의 특징은 딱딱하지 아니한 격식 없는 스타일이다. 우리는 많은 영적인 흥분에 관여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우리는 또한 사람들을 육신적인 동기로 일을 하도록 종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회중을 향하여 고함치지 않는다. 이러한 주된 생각들이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신앙의 태도에서 태동한 것으로 믿는다. “여호와께서 집을 짓지 아니하면 집 짓는 자의 수고가 허사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흥분적으로 하는 일과 압력에 의해서 하는 노력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성령이 하시는 일과 그리스도께서 그가 말씀 하셨듯이 자기의 교회를 친히 지으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믿고 있으면 된다.

만일 우리가 교회는 그의 것이요 그가 지으신다는 것을 완전히 믿을 때에 주님께서 교회를 지으신다. 내가 해야할 일은 내가 맡은 일에 충성을 하면 된다. 나는 다만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게 할 때에 압력이 나에게 내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흥분하고 압력을 받게 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는 나의 교회가 아니고 주님의 교회이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당신이 이 광대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짐이 너무 무겁다. 그 일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당신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임을 발견할 것이다. 당신의 힘으로 할 때는 이일을 위해서 계획을 하고 사람들을 동원하여 그들로 하여금 일을 하도록 인간적인 조작을 해야 하는 압력에 내 자신이 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난 1969년도 경에 우리가 현재 교회 위치에서 한 블록 떨어진 선 풀라워와 그린빌 거리의 모퉁이에 1.5 에이커의 땅을 구입 한 적이 있었다. 이 건물은 그때에 옛날 시골 학교였다. 우리는 그 건물을 분해하여 그 재료로써 조금마한 예배당을 지었다. 우리가 기존한 건물을 분해한 자재를 사용했기 때문에 성도들이 앉는 좌석까지 포함해서 교회를 짓는데 약 40,000 불이 소요되었다. 2년 후에는 이 예배당이 좁아서 아주 적당치 못했다. 우리는 3부 예배를 드려야 했고 마당에 의자를 500석이나 추가해서 놓아야 했으며 사람들은 자동차로 거의 1 마일에 가까운 거리에 떨어져 있는 LA 타임스 건물까지 주차하게 되었고 남북으로 놓여져 있는 페워뷰 거리 상에도 고속도로 405에 이르도록 약 1 마일 이상의 거리에 자동차를 주차해야 하는 형편에 이르렀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당의 협소한 장소와 주차장에 대해서 무슨 간구를 대책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때에 현재 갈보리 채플이 위치하고 있는 땅이 판매에 나와 있었다. 우리 교회의 교인 중에 한 사람이 부동산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여러 사람을 동원하여 한 그룹을 만들어 11에이커 에 해당하는 땅을 구입하여 이익을 남기고자 했다. 그들이 여러 가지 방안을 세워서 산타아나 시에 제출하였으나 그들이 제안한 여러 가지 방안들이 모두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때에 그들은 350,000불이라는 차액 잔고의 일괄 지불의 날자가 다가오고 있는데도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그들은 그 땅의 소유하고 있는 여주인에게 매달 이자를 지불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중지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그것을 모두 잃게 되었다.

우리 교회의 교인인 그 부동산 업자는 나에게 와서 교회가 이 땅을 구입 할 것을 종용했던 것이다. 그때에 나의 반응은 “세상에 우리가 11에이커나 되는 큰 땅을 가지고 무엇을 한단 말인가?”라고 일소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말하기를 이 땅을 사서 우리가 언제든지 한 부분을 팔 수도 있다고 암시 해주었다. 그때에 교인 중에 또 다른 사람이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가 300,000불에 그 땅을 살 수 있을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나는 말하기를 “우스꽝스런 소리 말라 그 여주인이 유질 처분(FORECLOSED)의 액수를 350,000불에 내어놓았는데 어림도 없는 말하지 말라 그 여인이 왜 300,000불에 팔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때 그 사람은 말하기를 “내가 그 여인에 대해서 사정을 좀 아는데 그 땅 여주인이 이 사람들로부터 이자를 받아서 세금을 내고 있는데 그들이 요 근래 이자를 내지 않아 세금을 내지 못하는 형편에 있고 또 이자를 낼 돈도 없는 형편이며 그 여인의 나이가 80에 가깝고 또 현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300,000불에 땅값으로 제의하면 그 여인이 아마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말하기를 “그것 아주 좋은 생각이군 그러나 도대체 300,000불이라는 현금이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라고 대답했다. 그는 또 대답하기를 “우리가 300,000 불에 구입하면 은행에서 땅값의 반의 액수의 돈을 빌려 줄 것이며 또 우리교회 재정이 은행에 110,000불이 있고 내가 90,000불을 무이자로 일년간 빌려 줄 테니 살 수 있다”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그 여인은 결코 그 값에 팔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나에게 말하기를 “그러면 나에게 교회이름으로 그 여인에게 그 값에 이 땅을 살 것을 제의하도록 허락만 해주시오”로 요청했을 때 나는 “좋습니다”라고 허락 해주었다. 조금 있다가 그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말하기를 “척 그 여인이 받아 들였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때 나의 마음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이 “야 좋구나! 그런데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

그때에 페워뷰 거리가 선풀라워 거리를 통해서 방금 완성되었을 때였다. 나는 다른 채플에서 나와 페워뷰와 선풀라워의 모퉁이에까지 운전하곤 했는데 내가 사거리에서 파란 불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때에 나는 이 넓은 평야와 같은 큰 땅을 바라보고 불안하여 당황하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하기를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빚도 갚고 부채도 없으며 은행에 60,000불이나 되는 잔고도 있고 지금은 흑자로 일이 잘되고 있는데 내가 이러한 큰 땅을 사서 앞으로 이 땅에 건물을 짓게 된다면 교인들에게 빚을 지게 하는 부담을 주게 될 것이니 왜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있나? 또 대체 나의 두뇌가 어디에 있나? 라고 불안해하였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진땀을 빼고 있을 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누구의 교회이냐?” 나는 대답하기를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러면 왜 파산에 대해서 염려하느냐? 나는 생각하기를 왜 내가 파산을 해야 하는가? 내가 아니고 파산을 한다면 주님이 파산을 하는데 왜 내가 염려해야 하느냐?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누가 문제를 야기 시켰는가?” 주님이 일을 만들었지요. 많은 사람들을 오게 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장소가 더욱 필요하도록 만든 이도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에게 이것이 주님의 교회요 주님의 문제임을 확인 시켜 주셨습니다. 주님이 이러한 상태를 창조 하셨다. 그렇게 생각한 후에 내가 다음 거리의 모퉁이까지 운전해 와서 그 넓은 땅을 바라보고 나는 큰 안도의 숨을 내 쉬게 되었다. 나는 완고한 종류의 사람으로 한동안 이러한 과정이 계속 되었다.

이 교회가 주님의 교회임을 깨닫고 나니 나의 마음에 큰짐을 덜게 되었다. 이제 내가 나 혼자서 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가지 않아도 됨으로 아주 안정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주님 자신이 잘 돌보실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Matthew 16:18). 주님은 “이 반석 위에 네가 교회를 세우라”고 하시지 않았다. 우리는 이 교회가 주님의 교회이며 주님이 이 교회를 세우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않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하기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복음 21:16)라고 물었을 때에 베드로는 대답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럴 때에 주님이 “가서 나의 교회를 세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 양을 먹이라”- 또 내 양을 치고 돌보라“라고 하셨다. 교회에 사람의 수를 증가시키는 것은 주님의 일이며 교회를 세우는 일도 주님이 하시는 일이다. 내가 할 일은 양들을 사랑하며 그 양들을 치는 것이다. 주님이 구원 얻을 자들을 더하시고 교회를 세우심을 믿고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무엇을 얻으려고 애를 쓴다면 또한 그 얻은 것을 유지하려고 애를 써야만 하는 것이다. 당신이 진실로 그것을 얻기 위해서 압력을 가하고 인위적으로 밀어 부칠 때에 당신은 그 받은 것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또한 압력을 계속 가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만들거나 사람이 세운 프로그램을 유지하기란 아주 힘들다.

오래 전에 내가 어떤 교파에 속해 있을 때에 나는 교회를 지어라 하는 압력을 받게 되었다. 나는 사람들이 암시하고 제의한 모든 방법을 다 사용했었다. 그러한 것들 가운데는 교회 성장 프로그램 그리고 여러 가지 종류의 교회성장 시합 같은 것들이 있었다. 나는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 사용된 이 모든 인위적인 방법을 다 사용 해 보았다. 내가 한 가지 발견한 사실은 내가 노력하여 얻은 것은 그 얻은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애써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내가 얻으려고 애쓰지 않았다면 또한 그것을 유지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만일 주님의 일이라면 그리고 주님이 하셨다면 주님이 더하시므로 당신이 그것을 유지하려고 애 쓸 필요가 없다. 목회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은 목사가 지쳐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당신을 죽이는 일을 할 것이다. 이것이 당신을 밑바닥으로 몰아 넣을 것이다. 이것이 당신으로 하여금 온갖 종류의 이상한 일들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애써 모은 무리들이므로 이제 당신은 그 무리들을 유지하기 위해서 애써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아주 힘든 일인 것이다.

전국적으로 우리는 놀라운 교회 성장 프로그램을 통하여 크게된 많은 대형 교회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은 여기에 기름을 치고 밀고 댕기고 해서 프로그램을 유지하도록 하지 않으면 곧 이것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될 때에 그 동안 이 프로그램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노력한 일들이 절대적으로 당신을 죽이고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오늘날 많은 대형 교회들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곳에 피곤에 빠진 많은 지도자들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운 것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 성장을 위한 노력이 단지 최근의 교회 성장 프로그램을 구입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영적인 흥분의 분위기를 조성하여 일어날 수 있다. 그러한 곳에서 교회의 성장이 영적이며 감정적인 흥분과 성령의 흥분적인 은사에 의하여 일어날 수도 있다. 이러한 것은 아주 힘든 종류의 상태인데 왜냐하면 당신이 이러한 영적인 흥분을 일으켜서 군중을 매혹하여 이끌어 왔기 때문에 이것은 당신이 일방통행의 길로 시작 한 것이다. 그래서 가면 갈수록 일이 어려워 질 뿐이다. 만일 당신이 초자연적이요 눈부신 장관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당신이 주된 힘이라면 당신은 이러한 종류의 현상으로 끌어들인 무리들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더 색다른 다른 영적인 경험들을 가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에 특이한 점은 아무리 매혹적이요 색다른 경험을 가졌다 할지라도 우리는 곧 그것에 권태를 느끼며 또 다른 새로운 어떤 능력이나 매력적인 영적인 경험을 원하는 경향이 있다. 같은 흥분과 전율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더 많은 능력이 계속 요구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점에서 한 예를 들어 내가 보트의 경험을 통해서 설명한다면 오래 전에 내가 12피트 되는 존슨 25hp의 엔진을 가진 보트가 있었다. 이것은 흥분적인 경험이었다. 그리고 이 보트를 가지고 수상 스키도 배웠다. 놀라운 한 여름을 보내었다. 이제 겨울이 와서 제블린이란 14피트 되는 보트를 샀는데 25hp 엔진은 도저히 힘이 약하여 배의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머큐리 55E 엔진을 사서 달았더니 속력이 더욱 빨랐다. 우리보다 앞서 가는 배가 아무도 없었다. 아주 신이 났었다. 그 해 여름이 끝날 무렵 지나가는 75E 좀더 큰 엔진을 가진 보트를 보고 55E와 바꾸었다. 이제는 큰 엔진은 샀지만 배 자체가 조금 엔진에 비해서 작았다. 그래서 이제는 배밖에 다는 엔진을 살 것이 아니라 배속에 있는 자동차와 같은 엔진을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쉐비 354를 구입했다. 언제 더 큰 것을 사는 것을 중단 할 것인가? 다행히도 나는 중지했다. 항상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좋은 것을 찾는 것이 사람의 심리이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흥분을 통하여 만들어진 매력도 같은 것이다. 여러분들이 “주께서 말씀하시기를”이란 말을 하면서 주님의 명하신 예언을 말하는 것도 한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항상 새롭고 어떤 다른 것을 계속 말해야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당신은 조절할 수 없는 웃음이라든가 아니면 개가 짓는 소리를 낸다던가 아니면 사자가 우는 소리를 내는 일을 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어떤 교회들은 얼마나 이상한 일들을 하나에서 또 다른 것으로 자꾸만 변경하면서 행하고 있는가? 당신이 처음에는 합리적인 것을 하다가 그것이 다 진하면 그 다음은 비합리적인 것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새롭고도 이상한 다른 종류의 영적 경험을 계속하게 하여 사람들이 바라고 갈망하는 같은 종류의 영적 흥분을 계속 갖도록 하는 것이다.

갈보리 채플은 감정적인 흥분을 빼낸 것이다. 우리는 육적인 새로운 프로그램이나 영적인 흥분을 추구함으로 사람들에게 호소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고 우리가 가르치고 우리가 신뢰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우리가 기초를 세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마르지 아니하는 무진장한 보고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고갈치 아니한다. 이 생명의 말씀은 샘물과 같이 계속 솟아 날 따름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긴장하지 않고 자유스런 태도를 가지게 마련인데 이것이 우리의 목회에도 반영이 되고 있다. 교회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진땀을 내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교회를 어떻게 세우나 혹은 어떻게 친절한 교회를 만드나 또는 5개년 계획을 세워 어떻게 교회를 성장시키나 하는 세미나를 할 필요도 없다. 5년 후에 내가 여기 있을지 누가 알 수 있나! 오늘 맡겨 주신 목회에 충성을 다하자!

나는 페닉스에 있는 사회적인 전략의 한 그룹의 지도자 세미나의 강사로 초청을 받았다. 그들은 우리가 앞으로 새 천년으로 들어 갈 때에 교회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일과 여러 가지 사회적인 경향을 연구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 그 모임에는 아주 몇 유명한 인사들도 미래의 전략을 위한 공개 토론에 참석하고 있었다. “미래에 필요한 것들을 어떻게 충당할 수 있을 것이며 그리고 그에 대한 교회의 적절한 전략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라는 모임이었다.

그런데 내가 말하기를 “나는 하나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만일 어떤 것이 부서지지 않았으면 고치려 하지 말라”라는 말이 사회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축복하신다. 그리고 교회는 계속 성장 할 것이며 하나님은 날마다 구원 얻을 자들을 더하실 것이며 그리고 하나님은 그가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의 말씀을 존귀하게 하실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그의 말씀을 축복하시는 한 나는 만족 할 것이며 나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것이다. 왜 내가 변경을 해야 하나? 잘되고 있는 교회를 왜 다시 바꿔야 하는가? 만일 그것이 더 이상 역사하지 않는 날이 온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했다. 그러면 왜 말씀을 가르치겠는가?

물론 사회자는 그 말에 대단히 마음이 상했다. 그래서 나머지 하루의 시간을 가시 돋친 말을 주고받고 했던 것이다. 흥미로운 일은 그 이후로 다시는 그 모임에 내가 강사로 초청을 받지 않았다.

나는 구약 성경 공부가 끝날 무렵에는 나는 신약 성경에 대한 갈망이 생기고 그것을 공부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또 신약 성경을 끝낼 무렵에는 또 다시 구약 성경 창세기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아주 흥미진진한 일이다. 이 성경말씀 전체를 끝낼 때마다 우리들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배우며 또 큰 유익을 갖게 되는 경험을 하게된다. 목사 자신이 영적으로 부유하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교인들도 풍성한 영적인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케케묵은 것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결코 어떤 새로운 종류의 기교나 책략이나 경험 같은 것을 교인들을 유치시키기 위해서 가지고 오지 않아도 된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능력이 있어 사람의 영을 축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