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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보리채플 특징 - 제2장 교회의 정치체제

이요나 2006. 7. 15. 15:02
제2장 교회의 정치체제                    서울 갈보리채플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에베소서 1:22)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교회정치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진술을 제시하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교회정치에 대한 세 가지 기본적인 형태를 발견 할 수 있다. 두 가지 형태는 신약성경에서 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교회사를 통해서 발전한 형태이다. 첫째 교회의 정치형태는 감독에 의해서 통치 되는 것이요 헬라말로는 ‘에피스코프스’라고 한다. 디모데전서 3:1절에서 바울은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라고 기록했다.

“디모데는 ‘에피스코포스’에 대한 자격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디모데전서 3:2-7).

또 다른 형태의 정치체제는 장로 혹은 ‘프레스비테로스’라고 부르는 재능이 있는 자들의 그룹이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사도행전 14:23)라고 기록한 사실을 볼 수 있다.

신약성경은 분명히 감독(episkopos)과 장로(presbyteros)를 임명 수립한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이 두 정치 형태는 그 직책의 본질상 서로가 충돌하기 쉽게 보인다. 교회를 이끄는 자가 감독이 되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장로로 구성된 보드에서 이끌어야 할 것인가? 감독이냐 장로들이냐? 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오늘날 이 문제로 인하여 두 교단으로 나눠지게 된 것이다.

에피스코팔 교회는 감독제도를 따르며 이들은 교회가 감독의 통치하에 운영되고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장로교회 혹은 프레스비테로스 교회는 장로들로 구성된 당회(보드)의 통치하에 있는 것이다. 이 두 교단이 존재하고 있으나 각 교단이 교회 정치의 올바른 형태에 대해서 정확한 성경적인 가르침이 결여되고 있다. 그러나 자기 나름대로 그들의 견지에서 보는 경우들을 말하고 있으나 성경적으로 수락될 만한 이유들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정치의 셋째 번 형태가 발생하였는데 그것은 회중정치로 알려져 있다. 나는 회중정치 체제는 아예 선택의 여지에 들지도 않는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회중이 옳았다는 경우를 성경에서 전혀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회중은 항상 와서 하는 말이 “우리에게도 다른 나라와 같이 우리를 통치하는 왕을 원한다”라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요구를 한 것이 회중인 것이다. 나는 회중정치가 효과 있게 시행된 성경적인 표본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우리는 회중이 통치 해보려고 시도했던 사건을 읽을 수는 있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출애굽기 16:2).

그리고 민수기에서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수기 14:1-3).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망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민수기 14:27). 그래서 회중정치를 하는 교회의 목사에게 화가 미치게 된다. 모세가 당했던 것 같이 그 목사는 다만 수근거리고 반역하는 일만 경험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교회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세 가지 형태로 되어있다. 첫째는 감독정치(Episkopos), 장로정치(Presbyteros), 그리고 요 근래 발생한 회중정치(Congregationalists)이다.
지금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의 초기에 하나님께서 설립하시고 모형으로 세우신 정치 형태를 성경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신정(新政, Theocracy)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 이스라엘 나라가 처음에 발단 할 때에 하나님이 통치하는 정치 형태였다. 곧 하나님의 통치의 체제였다.

그들의 붕괴가 하나님의 통치를 싫어하고 그 대신 왕을 요구 한데서부터 초래한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이방 나라들과 같이 우리를 통치하는 왕을 원한다”라고 했다. 사무엘은 그들이 와서 그들을 다스리는 왕을 세워 주기를 요구했을 때 크게 실망했다.

하나님이 통치하신 신정의 예를 살펴보자. 하나님 아래 모세라는 사람을 세우셨다. 모세는 하나님께 가서 그들이 가야할 방향과 할 일들에 대해 하나님의 지도를 받았다. 모세는 나라를 위한 율법과 규칙 그리고 나라가 가야할 방향과 해야할 일들에 대한 지도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고 인정을 받는 이 땅위의 지도자였다. 사람들은 모세를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과 연결하는 자로 인정했다.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께 접근하기가 두렵다 그는 너무나 위엄하시고 두려운 분이다. 우리는 불과 천둥을 보았다.

당신이 하나님께 올라가서 그와 대화하시고 내려와서 그가 하신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해 주시오 그리하면 우리가 순종하겠나이다. 우리는 올라가기를 원치 않으니 당신 혼자 가십시요”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로 올라가서 그가 하신 말씀을 듣고 다시 내려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명하신 말씀을 전했던 것이다.

모세에게 사람들이 자기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 혼자서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모세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자기 이웃사이에 일어나는 사소한 문제들을 가지고 모세에게 와서 그것을 판단해 주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모세여 나의 이웃이 괭이를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습니다”등의 작은 문제들을 가지고 해결 받기 위해서 모세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며 모세는 이것을 심판하여 해결해주기 위해서 하루 종일 매일같이 같은 일을 계속했던 것이다.

이때에 장인인 이드로가 이것을 보고, 하는 말이 “여보게 사위 자네가 이 일을 이런 식으로 매일 계속한다면 이것으로 인해 얼마 못되어 자네가 쓰러질 것일세 자네 혼자서 이 많은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네”라고 말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장로 70인을 세워 회중의 천막으로 모으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성령을 그들에게도 부어 주시고 그들을 백성 앞에 세우시고 그들의 문제들을 판단하고 다스리게 하셨다. 만일 그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모세에게 가져오고 모세는 하나님께 물어서 그 문제들을 해결하게 하셨다.

출애굽기 18:13-27 “이튿날에 모세가 백성을 재판하느라고 앉았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의 곁에 섰는지라 14 모세의 장인이 모세가 백성에게 행하는 모든 일을 보고 가로되 그대가 이 백성에게 행하는 이 일이 어찜이뇨 어찌하여 그대는 홀로 앉았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대의 곁에 섰느뇨 15 모세가 그 장인에게 대답하되 백성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내게로 옴이라

16 그들이 일이 있으면 내게로 오나니 내가 그 양편을 판단하여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알게 하나이다 17 모세의 장인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하는 것이 선하지 못하도다 18 그대와 그대와 함께한 이 백성이 필연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그대에게 너무 중함이라 그대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19 이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그대에게 방침을 가르치리니 하나님이 그대와 함께 계실지로다 그대는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있어서 소송을 하나님께 베풀며 20 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

21 그대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재덕이 겸전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를 빼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22 그들로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무릇 큰 일이면 그대에게 베풀 것이고 무릇 작은 일이면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그대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이 그대에게 쉬우리라 23 그대가 만일 이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도 그대에게 인가하시면 그대가 이 일을 감당하고 이 모든 백성도 자기 곳으로 평안히 가리라

24 이에 모세가 자기 장인의 말을 듣고 그 모든 말대로 하여 25 이스라엘 무리 중에서 재덕이 겸전한 자를 빼서 그들로 백성의 두목 곧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으매 26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되 어려운 일은 모세에게 베풀고 쉬운 일은 자단하더라 27 모세가 그 장인을 보내니 그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니라”

신정의 형태를 더욱 보좌하는 예로써 아론과 제사장은 모세 아래서 나라의 영적인 일에 필요한 일들 곧 희생제물을 준비하는 일들을 감독해 왔다. 장로들과 아론의 아래에 이스라엘 회중이 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를 위해서 설립한 정치형태였다.

오늘날 교회서도 수정된 형태를 가진 이와 같은 구조를 볼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인 것이다. 예수님이 교회의 책임자요 지도자인 것이다. 이것은 그분의 교회이다. 우리는 모세와 같이 예수님께 항상 연락을 취하면서 그의 방향과 지도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목사인 우리는 교회를 이러한 방법으로 이끌어 나갈 때에 사람들은 이 교회는 과연 주님이 주장하고 계심을 알게된다.

어떤 문제가 생길 때 우리는 말하기를 “내가 주님께 물어 볼 수 있는 기도시간을 달라고 하며 이 문제에 관해서 주님의 지혜를 찾아야겠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찾아보자”라고 말하고 기도하며 주님의 인도하심과 지혜를 찾아야 한다. 모세와 같이 교회에서 장로들과 함께 교회를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방향을 찾으면서 장로들은 목사들을 도우면서 함께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기도함이 중요하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고하기를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디모데전서 5:22). 사람이 어떠한지 잘 알고 그 후에 권위의 직분을 주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결혼과 같다. 아내와 결혼 생활을 한동안 하기까지는 자세히 알기가 힘들다. 많은 경우에 놀라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교회가 부흥하고 성공적으로 자라며 능력 있는 교회가 될 때에 문제가 야기함을 잊어서는 않된다. 그들이 은행에 많은 돈이 저축된 것을 볼 때에 그들은 그것을 지배하려고 직분을 가지려 한다.

하나님이 교회의 목회자로 부르시고 기름 부으신 경건한 사람을 목사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성도들은 그러한 사람과 함께 일할 것이요 교회에서 도구로 쓰임 받는 목사로써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지시하는 일들을 협력하여 도울 것이다. 좋은 장로들로 구성된 운영위원회(보드)는 당신의 목회에 가장 큰 저력이다.

나는 코스타메사의 갈보리 채플교회의 보드 위원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성 된데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는 토요일 밤 기도회 때와 밤새도록 기도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보드 위원을 뽑는다.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을 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을 보드 위원으로 봉사하기를 원한다. 우리 교회의 보드 위원은 그러한 사람으로 구성되는 축복을 받았다. 나는 하나님께 그들에 대해서 감사한다.

지금 참된 장로들은 “예”라고 만 대답하는 무리가 아니다. 그들은 성령님께 순종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목사인 나를 보호하고 감싸준다. 그들의 직분은 성도들과 목사와 연결하여 교회가 조화를 이루어 나간다. 교회에서 성도들로부터 문제를 가져 올 때에 장로들은 그 문제를 잘 관찰한다. 많은 경우에 그 문제에 대해서 장로들이 답할 수 있다. “이것은 교회서 결정한 정책이므로 이러 합니다” 라고 대답 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이 더 이상 가지 않고 거기서 해결을 본다.

어떤 경우에 보드 위원이 말하기를 “이러한 문제를 나에게 가져 왔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대답하기를 “그 일에 대해서 아직 내 마음에 강한 동의가 가지 않으니 이 문제를 놓고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기도 해 봅시다.”라고 하면 대부분의 경우 나는 그 문제가 스스로 해결됨을 본다.

내가 애리조나 주의 투산 시에서 젊은 목사로써 교회를 섬길 때(이것이 나의 두 번째 섬기는 교회였다). 우리가 매년 7원 4일 미국 독립 기념일에 교회에서 연중 행사로 레몬산에서 교회 야외 피크닉을 가게 되어 있었다. 7월 4일의 투산의 계곡은 화씨 110도이다. 그래서 레몬산에 올라가면 온도가 떨어져 서늘해서 좋다. 레몬산의 국립 공원은 픽크닉하기가 매우 좋은 곳이다. 거기는 화장실도 있고 흐르는 수도 시설도 있고 야외 식탁이며 아들이 놀 수 있는 넓은 장소도 있다.

이곳은 교회에서 7월 4일에 교회가 피크닉 가기에 안성맞춤이다. 성도들이 교제를 하는데 아주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한번은 보드 위원중의 한사람이 말하기를 “레몬산에 일 에이커 되는 땅이 있는데 이번에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섞여 지내는 것 보다 따로 나의 땅에 와서 피크닉을 갖도록 합시다“라고 제안했다.

그때 우리는 묻기를 “그 장소에 변소가 있는가?” 그의 답이 “없습니다”. 그러면 “흐르는 수도 시설이 있는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번에는 온 교회가 하루를 주님께 금식 기도하며 보내자”라고 제의했다. 목사로써 교인이 주님께 금식기도하자는 데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하지 말자고 말 할 수 있겠는가? 만일 목사가 그 의견에 반대한다면 목사가 얼마나 영적인 사람이 아니다 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한 그룹이 의논하기를 “그거 좋은 생각이다”라고 하며 우리 교회만 가서 거기서 금식 기도하면 아주 영광스런 시간이 되겠다고 했다.

그런데 교회 안에 다른 그룹은 말하기를 “수도시설도 없고 변소도 없다면 우리는 가지 않겠다. 아이들을 대리고 어떻게 그러한 곳에 간단 말인가? 우리가 금식 기도 할 때에 아이들은 누가 볼 것인가? 교회에서 그곳에 간다면 우리는 가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이제 영적인 그룹이 말하기를 “만일 교회서 국립공원에 간다면 우리는 가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영적인 면을 아주 강조함으로 교회가 두 의견으로 나뉘게 되었다.

여기서 매년 교회가 연중행사로 7원 4일 공휴일 때 즐기던 피크닉이 이러한 의견의 차로 분열하게 되어 교회가 쓰디쓴 맛을 보게 되었다. 이럴 때 양쪽 그룹의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척 목사님, 7월 4일 공휴일 피크닉은 어디에서 보내실 것입니까?”라고 물어왔다. 그래서 나는 대답하기를 “보드에서 결정하기로 하자”라는 지혜를 주님께서 주셨다. 그래서 보드 회의를 열어서 만장 일치로 국립공원에 가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나는 회중에게 선언하기를 “이번에는 보드 회의에서 온 교회가 국립공원에 가기로 결정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영적인 그룹에게 가서 “하루를 주님께 금식 기도하는 것 아주 좋은 생각이다. 우리 언제 한번 같이 가서 금식기도 하자”라고 말하고 “그러나 이번에 교회적으로 가는 피크닉은 국립 공원에 가는 것이 좋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드가 그러한 결정을 내려 주었기 때문에 양편 모두를 만족시키면서 문제없이 교회에 덕을 세우면서 이끌어 나가게 되었다. 보드가 이러한 진퇴 양난에서 나를 감싸주고 보호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교회가 두 의견으로 나뉘었을 때 만일 목사가 어느 편에 편파적인 결정을 내린다면 반대편의 교인들과 자연적으로 대립이 되는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이럴 때에 보드가 결정하므로 어느 편에서도 목사에 대해서 불평을 할 수 없음으로 목사를 보호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의 모델은 목사가 교회를 이끄는데 기름부음을 받은 도구로써 주님께로부터 통치를 받고 이것을 온 회중이 인정하며 그러한 원칙 하에 보드가 주님의 지시를 따라 나가는데 구체적인 협조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을 보완하는 것이 돕는 목사 즉 부목사들의 사명이다.

그들은 거기서 매일 영적인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도와주며 봉사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성을 가진 큰 교회의 정치체제의 목사로 있는 당신은 삯군의 위치에 있어서는 않된다. 교회에서 삯군이 된다고 하는 것은 특히 장로교 정치체제를 가진 교회에서는 아주 위험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보드가 통치하는 것이다. 보드가 목사를 체용도 하고 해고도 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통치 체제는 목사가 삯군이 되는 것이다.

회중 통치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목사가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는 것 보다 회중에게 고용되어 삯군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목사는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는 것 대신에 회중이나 보드에 의해서 선택이나 투표로 선출되는 것이다. 여기서도 목사가 삯군이 되는 것이다. 아무도 삯군으로써 가장 좋은 일의 효과를 나타낼 수 없다.

나는 모든 사람이 집사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목회를 돕는 근본적인 일의 기능은 집사의 일이다. 그들은 교회의 물질적인 일을 돌보며 또한 교인들의 필요한 것을 돌보며 병자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교회에서 아주 나쁜 일이 바로 사람들에게 어떤 직분을 주어서 보통 성도들 보다 높은 위치에 놓는 일이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교회 지도자의 영적인 자격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은 유다서의 축도의 말씀에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유다서 24).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이 흠이 없게 되다. 우리 모두는 죄를 범하였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자신이 목회에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에베소서 3:8)라고 했다. 자신을 평가하기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라고 말했다. 또 그는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기 때문에 사도라고 칭함을 받기에는 너무나도 자격이 없다”라고 말했다.

다른 곳에 자신을 가리켜서 진술한 말은 “죄인 중에도 괴수 된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라고 했다. 바울은 그의 사도직분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주워진 것을 깊이 깨달았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기술한 사실을 보면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라고 했다. 그는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흠이 없는 자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목사 혹은 교회의 지도자의 주된 자격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흠이 없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아니하고 육으로 사는 자는 에페스코포스(감독)의 자격이 없다고 믿는다. 육으로 행한다고 하는 것은 생활양상이 육신 적인 것을 말한다. 사탄은 밖에서 효과적인 목회를 하는 자를 넘어뜨리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넘어질 수 있는 자들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누가복음 22:31-32).

베드로는 대답하기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태복음 26:33). 그는 말하기를 “주여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 주여 내가 주를 위해서 죽는 자리에도 가겠나이다”라고 했다. 그가 온전히 성령님께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 이러한 자신감을 먼저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자신감을 그의 생활에서 다룰 필요가 있었듯이 또한 우리 모두의 생활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이다.

자신감에 대해서 주님은 점차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너희 힘이나 너희 안에 있는 것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다. 바울은 말하기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로마서 7:18). 언제나 우리가 그 원칙에 예외라고 생각할 때에 주님은 우리가 온전히 그만 의지 하도록 가르치기 위해서 넘어짐을 허락하신다.

우리가 육적인 면으로 들어가 육을 쫓아 살기로 결정 할 때에 우리가 주를 섬기는 위치에서 즉시 우리 스스로가 자격상실을 당하는 것이다. 우리가 “흠이 없다”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취한다면 우리 모두는 목회를 그만두고 보따리를 싸서 목회 현장을 떠나 자동차 판매하는 직업이나 구하는 것이 낳을 것이다. 나는 회개가 열쇠라고 믿는다. 참된 회개, 참된 회개가 있을 때 용서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회복이 시작되는 것이다. 참된 회개는 죄에서 참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나는 장로 제도를 따르는 교회들을 관찰해 볼 때 그들은 많은 경우에 목사를 찾고 있지만 실상은 삯군을 찾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목사에 대한 그들의 관념은 “목사가 와서 자기들의 박자에 맞추어서 춤을 추는 자를 찾고 있다. 우리가 줄을 당길 때 그에 따라 움직이고 행동하면 당신은 고용된 사람으로 있을 수 있으나 만일 당신이 당신 마음대로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가 갈보리채플에 오기 전에 내가 코로나에 있는 집에서 시작한 가정 성경공부가 자라서 교파에 속하지 않은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가정 성경공부에 참석한 사람들이 “코로나 크리스챤 협의회”라 이름 짓고 주 정부에 등록하여 사람들의 헌금이 세금혜택 공제가 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그들이 헌금을 모아 일차적으로 나를 코로나에 있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였다.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자 많은 무리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속해 있는 교단에서 떠나 독립하기를 원했다. 이 사람들이 나와 함께 코로나에서 교회를 시작하기 위해서 나를 초빙하였다. 나는 그 초청을 받아 드렸다. 그래서 우리는 “코로나 크리스찬센터”를 시작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큰 축복이었다. 나는 아직도 뉴포트 비취에 살고 있었고 주일마다 그곳에 운전을 해갔다. 우리는 주일 하루 종일을 그곳에서 보내고 주일 밤에 집에 돌아오곤 하였다.

어떤 주일 오후에 우리가 세를 주고 예배드리는 미국재향 군인회관에서 나의 가족들이 나와 함께 있었을 때에 나는 의자를 줄로 지어 놓는 것 보다 둥글게 놓고 강대상을 치우고 큰 원형을 이루어서 가정 성경공부 형태와 같이 서로 마주 보도록 하였다. 오르간이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서 찬송가를 부르기 보다 무반주로 찬송을 아카펠라로 불러 회중을 인도하였다. 그후에 우리는 기도 시간을 가졌다. 우리가 기도 제목을 주어서 사람들이 그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했다. 그리고 형식이 없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의자에 둘러앉아 있고 내가 성경말씀을 가르쳤다.

나는 이것이 성령님의 인도로 느껴졌고 그날 성령님의 역사가 대단히 컸다. 그날 나는 놀라운 성령님의 역사 하심을 경험했다. 거기서 그날 밤 몇 사람은 평생 공중 기도를 해본 적이 없는 자들이 기도를 하고 많은 자들이 감화를 받고 큰 은혜를 받았다. 그러나 보드 위원들이 그후에 특별한 회의를 위해서 모였다. 그들이 이튿날 아침에 나에게 전화하여 말하기를 전날 밤에 무슨 일을 하였느냐고 묻고 다시는 그러한 일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때에 나는 생각하기를 “이것은 나의 목회이며 나는 어떤 제약도 받지 않을 것이며 성령의 음성을 따라 갈 것을 결심했다.”

그래서 우리가 갈보리 채플에 왔을 때 교회 헌법을 재정 할 때 장로교 식의 장로정치를 설립하지 않았다. 갈보리 채플은 다소 에피스코포스(감독) 정치체제인 이것이다. 우리가 믿는 바는 목사는 주님에 의해서 통치되고 장로들 그리고 부목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예수님의 교회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마음을 발견하여 주님의 통치를 받는 신정이 하나님의 교회의 모델이라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