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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보리채플 특징- 제3장 성령의 능력

이요나 2006. 7. 15. 15:05
갈보리채플 특징 - 제3장 성령의 능력                    서울갈보리채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 1:8).

또 다른 갈보리채플의 특징은 성령에 관한 우리의 위치이다. 믿는 자가 중생함을 받을 때에 성령의 내재하심과 그리고 믿는 자의 생활에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나타나는 경험과는 다르며 믿는 자에게 중생함과 성령의 능력 받는 것 두 가지 경험으로 구분한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그들이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라고 물었다. 성경의 어떤 번역을 보아도 성경은 구원 얻는 중생의 경험과 성령의 능력 받는 것, 성령에 관한 이두 경험이 분리 되어있고 차이점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빌립이 사마리아로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믿었고 세례를 받았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가 사마리아인들도 복음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내었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사도행전 8:15-16).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는 성령의 두 가지 분리된 독특한 역사, 곧 구원과 성령의 능력을 힘입음의 일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사도행전 2:37-38 ).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주님을 맞나 중생함을 받았다. 그가 다메섹에 왔을 때 주님의 명령으로 아나니아가 그에게 손을 얹어 기도했을 때 그는 시력을 다시 회복하고 성령을 받았다(행 9장).

우리는 중생의 경험과 성령의 능력 받는 경험 두 가지가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성령과 믿는 자의 사이에 세 가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인지한다. 헬라 말의 전치사로 구분하고 있는데 첫째는 함께('para', 영-with), 둘째는 속에('en', 영-in), 셋째는 위에('epi', 영-upon).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한복음 14:16-17). 여기서 너희와 ‘함께’는 para의 관계를 말하고 있고 그 뜻이 ‘너희의 곁에서 함께’란 뜻이며 en은 ‘너희 속에’란 뜻이며 영어에서 in이란 전치사와 같으며 ‘그가 너희 속에 계신다’는 뜻이다.

우리는 성령이 중생 이전에 그 사람과 함께 하심을 믿고 있다. 성령께서 그에게 죄에 대한 가책을 주시며 예수 그리스도 만이 답이라고 하는 것을 학인 시켜 주신다. 성령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다가올 심판에 대하여 끊임없이 증거하고 있다. 우리는 또한 사람이 성령의 증거를 받아드리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의 죄를 모두 없이 하심을 믿고 있다.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생활을 통치하고 조절하기를 원하여 그의 마음속에 영접할 때 성령이 그 사람의 생활 속에 오심을 믿는다. 성령은 우리 각 사람과 함께 계시고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대리고 오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와서 그를 영접할 때에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린도전서 6:19-20). 바울은 또한 에베소 성도들에게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에베소서 5:18 )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중생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마다 그 속에 성령이 계심을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명령 아래서 그의 몸을 성령의 조절에 맡기며 또한 성령의 충만함을 계속 받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이 믿는 자의 생활에서 죄에 대해서 육신에 대해서 승리 할 수 있도록 능력을 공급하심을 믿는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행하며 육신을 쫓아 행치 않음을 배웠다. 성령을 쫓아 행하는 자는 육신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한다. 성령은 우리의 육신 생활을 이기는 능력을 주시며 타락한 기질을 이기는 능력을 부여하신다. 성령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우리 생활에서 능력으로 역사 하신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린도후서 3:18). 그래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성령이 우리 속에서 (헬라 말은 'en', 영어에서 'in') 내재 하셔서 역사 하시는 놀라운 능력을 볼 수 있다. 성령이 우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일을 시작하심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믿는 자가 갖는 첫번 두 가지의 관계와 다른 세 번째의 관계가 있음을 믿는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 1:8). 이러한 관계는 성령이 당신의 위에 임하실 때를 말하는 것인데 헬라 말에서 'epi'라는 말로 표시했는데 영어의 전치사의 번역이 'upon ' or 'over'로 번역되어 있다. 나는 넘친다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가 우리의 생활에서 넘쳐흘러 나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이 단지 성령을 담고 있는 그릇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있는 세상에 흘러나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수도관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령의 객관적이 역사이다.

성령의 첫 번 역사는 주관적인 역사인데 이것은 성령이 나의 속에 들어와 나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성령의 능력이 나 위에 임한다고 하는 경험은 성령의 놀라운 다이내믹한 능력이 밖으로 나타나는 증거를 보여 주신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효과 있게 증거 하도록 성령이 우리들에게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상적인 계획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의 생활에서 성령의 능력이 넘쳐 날 때에 나의 주위에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도록 나를 도구로 쓰시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한복음 20:22). 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 하셨을 때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은 단지 상징적인 행동이다”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상징적이라고 말한 곳이 성경에 있는지 보여라. 성경에서 이것이 상징적이란 말이 한곳도 없다. 이것이 상징적이면 왜 요한이 이것이 상징적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나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실 때에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거듭 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씀 하셨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사도해전 1:5).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 1:8). 그들은 주님을 효과 있게 섬기기 위해서 넘치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했다.

우리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7장에서 초막절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외쳐 말씀하신 것이 이것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무리들에게 일어서서 크게 외쳐 말씀 하셨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한복음 7:37-38). 그리고 요한은 주석을 달아 쓰기를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한복음 7:39). 성령이 오신다는 말씀이 여기서는 성령세례 혹은 성령의 넘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슨 종류의 넘침일까? 이것은 믿는 자의 생활에서 넘쳐흐르는 급류 같은 생수의 넘침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첫번 경험은 성령의 충만함이 있고 그리고 다른 하나의 경험은 성령의 넘쳐흐르는 것이 있다. 성령이 내 속에 임하심은 능력과 다이나믹한 일이나 성령의 능력이 나의 생활에서 넘쳐 흘러나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과 변화를 일으키는 놀라운 역사를 말한다.

예수님께서 성령에 대해서 세 가지 약속을 하셨는데 첫째는 성령이 너희와 함께 둘째는 너희 속에 그리고 셋째는 그가 너희 위에 오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겠다고 하셨다. 성령이 우리가 중생을 받기 전에 우리와 함께 하신다. 죄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시는 이가 성령이시다. 당신의 마음속에 죄에 대한 가책을 주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당신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며 그리고 당신의 죄에 대한 유일한 답은 예수뿐이라고 지적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당신이 그리스도께로 인도 된 후에 당신이 마음 문을 열고 그리스도를 믿어 마음속에 영접 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당신 속에 들어와 거하시는 것이다. 당신 속에 내재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당신을 예수의 형상을 닮아 가도록 빚어 주시는 것이다. 성령이 당신을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살수 있도록 도와주시며 또한 당신을 그의 형상을 닮아 가도록 도와주시는 것이다. 당신이 혼자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성령이 당신을 위해서 하신다.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린도후서 3:18). 또 그는 말하기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린도전서 6:19-20).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통하여 나의 몸은 성령의 전이다. 성령은 나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변화시켜 주시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성령이 나의 생활에서 넘쳐흘러 세상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이 주님의 원하시는 바이다. 컵에 물을 가득 채우는 일이 있고 다른 하나는 그 컵에 물이 넘쳐흘러 나는 것이다. 하나는 성령이 당신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성령이 당신을 채울 뿐만 아니라 당신 생활에서 넘쳐 흘러나게 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목회를 위해서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심지어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시기 전에는 목회를 허락하지도 않으셨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사도행전 1:4).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 이 성령의 능력인 것이다. 이것이 'epi'의 경험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영어에서 'upon' 성령 세례 혹은 성령의 능력 입히심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대개 구원의 경험으로부터 구별된다. 그러나 이러한 두 경험이 동시에 일어날수도 있다. 고넬료의 집과 같은 경우를 말한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시작할 때에 그들 위에 성령이 임하셨다. ‘epi' 그리고 그들이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사도행전 10:47).

우리는 성령의 역사에서 중생과 성령의 내재로부터 구별된 경험이 있음을 믿는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성령세례라고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충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신이 이것을 무엇이라 부르든지 그 뜻이 성령의 넘치는 경험을 말한다. 당신이 컵을 가득 채울 수 있다. 만일 당신이 계속 그 컵에 물을 붓는 다면 그 컵은 넘칠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넘치는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성령의 은사라고도 말하고 어떤 사람은 성령의 능력 입히심이라 부른다. 당신이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지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그것을 가졌느냐가 문제이다. 우리가 신학적인 용어로 서로 논쟁을 벌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을 성경은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흐른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당신이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목회에 필요한 성령의 능력 입히심에 대한 중요한 질문은 간단하다. 당신은 그 능력을 받았느냐?